권석천
어크로스
2020년 6월 5일
나는 매우 우파적인 성향으로 살아왔다. 극우까지는 아니겠지만 거의 그 근처까지 가지 않았을까 싶다. 신문이라면 조중동 쯤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신문을 읽다보니 내 성향이 그리 된 것인지 내 성향이 그래서 그 신문을 읽어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도 소위 말하는 조중동 성향이 내게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파 성향의 언론을 보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주장에 정작 보수의 가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말이다.
권석천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그의 글을 눈여겨 읽고, 때로 그의 글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언젠가 좌파 성향의 인사가 어떻게 조중동에 이런 글이 실릴 수 있느냐며 그의 글을 링크해놓기도 했다. 누군가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었다는 기사를 링크해놓고 그의 성향으로 그곳에서 더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소감을 달아놓은 글을 읽은 일도 있다.
며칠 전 그가 일했던 신문에 그의 칼럼이 실렸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고, 문득 그의 글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에 그가 쓴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읽은 일이 있다. 내가 알아왔던 그다운 글이다. 이번 책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회의 비리와 그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아온 기자로서 가진 사회에 대한 절망, 그것을 과감하게 지적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 그러면서도 좀 더 나아질 사회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는 그의 생각을 담담히 풀어놓았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저 사탕발림 같은 측근의 달콤한 언사를 물리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리 어리석을 수 있나 싶다. 저자는 왕이 간신을 쓰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편해서라고 말한다.
“왕이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 줄 왜 모르겠나. 알면서 간신을 쓰는 이유는 그만큼 편하기 때문이지. 왕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곧이 속마음을 입술로 옮기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해주지. 입안에 있는 혀처럼, 풀숲을 조용히 미끄러지는 뱀처럼. 충신들을 생각해보라고. 꼬장꼬장하게 답답한 소리나 하고 마음만 영 불편하게 하지 않느냐고.”
그러고 보면 어리석은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셈이다.
참사가 일어나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은 참사가 일어난 원인을 밝혀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여론을 이끌어야 하는데 실상은 편을 가르고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기 바쁘다. 그런 와중에 피해자는 다시 책임을 추궁 당해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저자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켜서 만은 아니고 그것이 문제를 은폐시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길을 막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고가 터지면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체 하면서 그 선택을 한 사람들 탓으로 돌린다. 누가 당하든 당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됐든 당사자가 감수해야할 몫이라는 거다. 그것이 개인의 윤리로는 옳을 수 있으나 사회의 윤리가 되면 전혀 딴 이야기가 된다. 누가 대신 책임져주느냐는 반문이 사회윤리로 굳어지면 힘 있는 자가 모든 걸 먹어치우는 약육강식의 세렝게티 초원이 펼쳐진다. 누가 미끼에 걸려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책임을 당사자가 지라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잔인한 요구다. 그 요구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교묘하게 은폐시킨다. 불행이 엄습했을 때, 범죄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과 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저자는 언론대학원에서 열린 공개좌담에서 언론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찮은 사람이 되지 말고 불편한 사람이 되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여러분이 나아갈 사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쁜 일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십시오.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원칙이 없으면 여러분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도 편하게 느끼겠지요. 원칙을 지키다 보면 여러분 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해고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빛나는 경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해지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여러분은 그 어려움들을 돌파해내리라 믿습니다.”
저자는 하찮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불편한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그렇게 걷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어쩌면 그런 자책을 더 견디지 못하고 기자의 필봉을 내려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베드로는 아니지만 나 역시 살면서 여러 번 믿음에 등을 돌렸다. 배신한 뒤 문밖에 나가 여러 번 슬피 울었다. 그 과정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이 아주 약한 사람이란 사실이다. 누가 칼을 들이댄 것도 아니었고 힘으로 제압한 것도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닌 보이지 않는 회유와 압박에 힘없이 무너지곤 했다. 왕년에 배신 좀 해본 사람으로 이야기한다면 너무 쉽게 물러서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버티고 버티다 어쩔 수 없을 때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가만히 있었는데 제풀에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멈춰야할지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다시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다. 다만,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포즈로 넘어지지 않길, 배신한 후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만큼은 포기하지 말길 바란다.”
저자는 강문대 변호사의 글을 인용하며 편견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판사들의 친구 중 노동자, 특히 노조활동을 하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런 친구가 한 명도 없으니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스산하고 노조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피부에 와 닿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판사가 맘 편히 가는 동창모임이나 교회모임 등에서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기업가 아니면 관리자일 것이고, 이들 중 노조가 헌법상 보장된 단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신 이들은 하나같이 기독교인이 이단 대하듯 노조를 비난할 것이다. 이런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판사 자신도 노조가 불법단체는 아니되 유해한 단체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과 같은 엘리트 그룹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사고방식은 그들과 다르지 않을까? 기득권층에 들지 못하는 주제에 기득권층의 논리로 살아왔으니, 돌아보면 부끄러운 모습뿐이다.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은 독서가 갖는 훌륭한 가치 중 하나이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알고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하는 건 덤이고. 그렇게 만들어준 그의 글 몇 토막.
“우리는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짓은 아닐까. 문제는 많은 이들이 진짜 ‘너를 위해 이런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폭력의 위력은 단지 통증에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인격에 모멸감을 갖게 한다. 자신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고 언제라도 무릎 꿇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자각은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폭력은 아무 수식어도 필요 없다.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