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샥터
홍보람 옮김
인물과사상사
2023년 2월 3일
며칠 전 성가대 반주자의 초대로 음악회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함께 다녀온 교우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앵콜곡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기억력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동영상은 내 기억과 달랐다. 나이는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것이 나이 탓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 하는 것을 어른들은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만, 그건 그저 현실과 희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지 않는가.
우리는 기억이라고 하면 과거에 대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미래에 대한 것도 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두 사건이 일어난 때와 장소를 혼동하는 건 그저 ‘기억’을 불신하는데 그치지만, 점심 약속을 잊는다거나 약속한 일을 하지 않으면 ‘사람’을 불신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이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억의 오류를 소멸, 정신없음, 막힘, 오인,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 이렇게 일곱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크게 기억하려는 사실이나 생각을 머릿속에서 떠올리지 못하는 오류(소멸, 정신없음, 막힘)와 기억이 머릿속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부정확하거나 원하는 기억이 아닌 기억의 오작동에 의한 오류(오인, 피암시성, 편향, 지속성)로 나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을 소멸이라고 한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나이든 이들이 젊은이들에 비해 기억력이 10~15% 정도 뒤진다면서 60~70대에 접어들면 이런 현상이 뚜렷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억력 저하가 노화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고 상당한 개인차를 보이는데, 실제로 어떤 실험에서는 70대 중 약 20%가 새로 익힌 단어를 대학생만큼 기억하기도 했다. 특이할만한 점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서 알츠하이머병이나 그 밖의 다른 치매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보다 사용할 수 있는 ‘정신적 비축분 mental reserves’이 더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작 ‘정신적 비축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어느 곳에서는 사람마다 흡수할 수 있는 뇌 손상의 정도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정신적 비축분이라고 하며, 사회적 교류나 새로운 자극 경험이 많을수록 뇌 손상에서 더 잘 회복된다(비축분이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이를 인지비축분(cognitive reserve)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저자는 특정 사건을 생각하거나 말하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기억이 더 강화된다고 말한다. 일상적인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함으로서 소멸을 줄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저자는 교회를 찾은 방문객 사례를 들며 교회 사진을 찍은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지 않았던 방문객보다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는 사진 찍는데 정신이 팔려 기억을 약화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는 소멸의 사례가 아니라 다음에 설명할 주의력(mindedness) 결핍의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았을까?
소멸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저자는 간섭을 들고 있다. 기억하려는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되풀이하면 기억을 손상시키는 간섭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일주일 내내 일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조금씩 무뎌진다. 하지만 월요일 퇴근 후 휴가를 떠난 사람이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일주일 내내 일했던 사람보다 지난 월요일에 있었던 일을 더 자세히 기억한다. 휴가를 떠나 월요일에 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활동을 했기 때문에 간섭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멸은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엇인가를 덜 잊어버리려면 그것을 자꾸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고, 뇌에 자극을 주는 활동도 도움이 되기는 하겠다. 그런데 소멸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굳이 기억을 붙들어놓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저자는 두 번째 오류로 ‘정신없음’을 들고 있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을 정신없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보자면 기억의 오류 일곱 가지가 모두 ‘정신없음’의 결과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이 용어만으로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구글링을 해보니 원문은 Absent-Mindedness였다. 차라리 ‘주의력 결핍’이라고 표현했다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겠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자동 수행’단계에 이르면 주의와 노력을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 신체적인 기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자동 수행한 활동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인 결과가 아닐까. 저자는 자동차 열쇠나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 고민이나 곧 있을 회의를 어떻게 진행할지 생각하는 일에 정신적인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고, 일상에서 미디어 멀티태스킹을 자주하는 사람은 특히 회상하는 일을 잘해내지 못한다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같은 장에서 저자는 정보를 반복하는 것이 기억에 더 잘 남는다면서 한번에 10번을 몰아치듯 읽는 것보다 시간 간격을 두고 10번을 나누어 반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주의력 결핍을 만회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막힘은 사람 이름을 기억하려고 할 때 가장 자주 일어난다고 말한다. 고령층은 자신이 겪는 어려움 중에서 아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것을 가장 힘들어하는데, 같은 고유명사 중에서도 국가나 도시와 같은 지명보다는 사람 이름에서 더 자주 막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비록 막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고유명사 중 특히 이름을 기억하는 일에서 막힘이 많이 일어나는 건 다른 나이대에서도 다르지 않다.
저자는 이의 사례로 베이커-베이커 패러독스를 설명하고 있다.
“시험 참가자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첫 번째 그룹에게는 첫 번째 남성의 이름이 베이커이고 두 번째 남성의 이름이 포터라고 알려준다. 두 번째 그룹에게는 첫 번째 남성의 직업이 제빵사(베이커 baker)이고 두 번째 남성이 도예가(포터 potter)라고 알려준다. 나중에 사진을 보여주며 얼굴에 맞는 정보를 기억해보라고 했을 때 참가자들은 이름보다는 직업을 더 기억했다.”
이는 이름 자체로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특징과 연결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귀인’이라는 용어를 심리학에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처음 들어보는 것이어서 이것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주석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자를 함께 적던지 원어라도 적어놓았더라면 이해가 빨랐을 것이다. 찾아보니 오인(誤認, mis-recognize)의 한 형태가 아닐까 싶었다. 저자는 이것이 기억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일으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표절을 들고 있다. 물론 의도적인 표절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새롭다고 느끼는 ‘잠복기억’ 때문에 나쁜 의도 없이 타인의 저술이나 아이디어를 기억해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자신의 창작물로 오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아이디어조차 새로운 것으로 여겨 비의도적으로 표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자신이 지금 막 제시한 의미 있고 멋있게 표현된 주장이 오래전에 자신이 발표한 연구에서 제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노년기의 가장 절망스러운 경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치매예방의 한 방편으로 생각해 오래 전부터 최소한 하루 한 꼭지라도 글을 쓰려고 해왔다. (치매는 예방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만) 나중에 써놓은 글을 분류하다 보면 같은 주제 같은 내용의 글이 수없이 나타난다. 때로는 표현 방식까지 똑같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끄럽거나 절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본 일은 없다. 그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여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기는 한데 그것이 공적인 것이 되면 표절이 될 것이니 아예 공적인 글쓰기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1992년 10월 4일, 엘알 화물수송기가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을 이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해 11층 아파트와 충돌해 주민 39명과 승무원 4명이 사망했다. 10개월 후 네덜란드 심리학자들은 대학생들이 이 사고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조사했다. 응답자의 5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학생들은 비행기가 아파트에 추락했을 때 속도와 각도 같은 세부적인 사항도 기억했고, 충돌 전에 불이 났는지, 충돌 직후에 비행기 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기억했다. 그러나 비행기 추락 순간을 담은 영상은 없었다. 심리학자들은 비행기 추락 당시 모습이 TV에 방영되었던 것처럼 암시적인 질문을 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추락 후 장면 영상을 보았을 것이고 충돌 직전에 일어났을 법한 일에 대해 상상하거나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피암시성은 타인에게서 얻은 정보와 글, 사진, 미디어에서 본 정보를 자신의 기억의 일부라고 잘못 믿는 것이다.”
피암시성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했지만 일상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조작이고 범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일은 수사에서 무수하게 일어난다. 실제로 거짓자백을 하는 용의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무죄를 믿지만 경찰의 암시적인 질문을 받으면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구체적인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피암시성이 목격자 증언과 경찰 심문 과정에 작용하면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 있다. 저자는 이 폐해는 공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가장 개인적이고도 사적인 과거 경험에 대해서 기억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편향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화제가 될 때마다 잠깐씩 찾아본 것이 전부이고 아직 그에 대해 체계적으로 살펴본 일은 없다. 그렇기는 해도 그것을 기억의 오류 범주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저자는 이 장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견해가 바뀌었는데도 과거부터 그런 견해를 유지해오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관성 편향’,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마치 이전부터 그런 결과가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후확신 편향’, 자신의 기억을 다른 사람의 기억보다 더 신뢰하는 ‘자기중심적 편향’ 등 많은 편향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제시카 노델의 <편향의 종말>을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편향이 어떻게 차별을 낳았는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남석의 <인지편향사전>에는 편향의 종류를 101가지나 다루고 있다. 편향의 형태가 다양한 줄은 알았어도 이 정도까지 방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봐야겠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기억과 관련한 문제 가운데에는 잊어야 할 일, 잊고 싶은 일을 기억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지속성은 조금 짜증스러울 뿐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끈질긴 기억 때문에 중요한 일에 집중하지 어려운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극단적인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미국 프로야구 투수 하나는 월드 시리즈 진출을 앞두고 9회에 결승 홈런을 맞아 패배한 기억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져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지속성 때문에 문제가 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트라우마를 들 수 있다. 고통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불행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트라우마 생존자의 치료는 거의 예외 없이 충격적인 사건을 다시 경험하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환자들을 트라우마와 관련된 자극에 반복 노출해서 그 사건의 생생한 이미지를 회상하게 만드는 심상적 노출치료(imaginal exposure therapy)이다. 1990년대 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자행된 집단 학살에서 도망친 난민들은 극심하고 전형적인 PTSD 증상을 보였는데, 그들은 이 치료방법 중 하나인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시 말하고 체험하는 증언치료(testimony therapy)를 통해 기억을 확실히 감소시켰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전만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애쓰면 애쓰는 만큼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늦출 수 있기는 하겠지만 굳이 그것에 힘을 쏟을 생각은 없다. 그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저 남은 삶을 잘 꾸려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치매는 영 다른 차원의 일이다.
치매는 인격을 말살시킬 뿐 아니라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든다. 치매 환자 하나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지옥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치매와 망각의 경계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치매는 예방이 불가능하지만 초기에 발견할 경우 약물로 진전을 조금 늦출 수는 있는 정도라고 알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고 쓰려고 노력한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하는 것도 환경에 맞게 적응된 것이라고 말한다. 망각으로 인해 짜증날 수도 있지만 전화번호나 자동차 주차 장소를 잊어버리는 것은 대체로 유용하고 필수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인출되거나 반복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정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억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정보를 이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스템은 매우 실용적이라고 결론짓는다.
치매가 과연 망각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망각이 자연현상인 것처럼 치매도 자연현상이라면 이를 외면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게 합리적인 모습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대중서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전문적이고, 그러다 보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적지 않다. 가능하면 독자를 배려해 전문용어를 쉽게 풀어 썼으면 좋겠고 각주를 다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대중서에 각주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한자나 원문을 병기하는 정도의 친절은 베풀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용을 평가할 정도로 아는 것은 없지만 독자로서 불친절한 책이라는 정도의 불평은 남겨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