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련
천년의상상
2023년 3월 24일
“사흘이 멀다 하고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여성이 있다. 한밤중에 들어온 남편이 자고 있던 여성을 두들겨 팼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지만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아들이 깰까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고 때리는 대로 맞았다. 그리고 새벽 같이 일어나 남편을 위해 해장국을 끓였다. 피해여성은 왜 소리 지르지 않았을까? 남편 손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명 소리를 듣고 아들이 뛰쳐나와 충격을 받을까봐, 아버지에게 대들다 더 큰 비극이 일어날까 이를 악물고 참은 것이다. 남편이 예뻐서 해장국을 끓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면 남편이 화를 내 아들이 맘 편히 학교에 가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런 피해자의 숨겨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이다.”
국어사전은 피해자를 “불법 행위 또는 범죄에 의하여 생명이나 재산, 명예 따위에 침해나 손해를 본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법이나 범죄로 손해를 입었다면 사회는 당연히 손해 입은 사람 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회는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를 바라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해자 중심주의’를 호소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군가 내게 폭력을 가하면 저항하는 게 당연하다. 폭력을 당하면 이에 맞서고, 맞설 힘이 없으면 소리쳐 도움을 요청하고, 그럴 형편도 되지 않으면 도망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맞서지 않고, 소리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으면 폭력이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을 통념으로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너무 무서우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너무 겁이 나면 말문이 막히고, 너무 떨리면 심장이 쪼그라들어” 사람들이 통념으로 여기는 것처럼 반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통념적인 반응’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가해자 중심주의’이고, ‘폭력의 위력에 짓눌려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똑같은 범죄 피해자인데도 우리는 유독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서는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편견이 ‘가해자 중심주의’와 결합해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입힌다고 분노한다.
“통념과 다르게 피해자가 반응했다고 해서 가해자의 범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이 있었을 때 피해자에게는 소리 지를 권리가 있지만, 소리 질러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소리 지르고 저항할 경우 가해자는 더 큰 폭력을 저지를 수 있고 그 폭력으로 피해자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왜 저항하지 않았냐며 피해자를 몰아세우는 것은 성폭력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신체와 생명을 노출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다.”
‘가해자 중심주의’는 폭력이 일어난 이후에도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그러나 저자는 피해자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은 허상이라고 단언한다. 성폭력을 입었다고 일할 권리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가해자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졸업을 하지 못할 경우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지만 친한 친구들을 만나면 잠시나마 즐거울 수 있고, 그래서 소셜미디어에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이 폭력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깨달았으니 생각을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저자조차 배꼽티 입고 피어싱 하고 눈에 컬러렌즈를 낀 피해자에게 경찰 조사 받을 때 수수한 차림으로 가면 좋겠다고 권하기도 하고, 가슴 파인 옷 대신 블라우스를 입고 가자고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의 겉모습 때문에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편견을 피하려 한 것이었지만, 그것 역시 피해자다움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피해자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론하지 못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깨야한다고 외친 것이 그 자체로 모순이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일어난 성추행의 경우 피해가 일어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의심을 받는 일이 왕왕 일어난다.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으로서 피해를 입고서도 위계에 눌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은 충분히, 그리고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과거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하급자는 생계를 위해 평온한 직장생활을 위해 피해를 견딜 수밖에 없고 상사는 업무 능력을 핑계로 얼마든 하급자를 괴롭힐 수 있는 구조’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견디다 못한 하급자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러 문제를 제기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사건이 일어나고도 한참 뒤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로 몰아간다. 이는 비단 직장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고, 위계가 작동하는 조직이라면 어디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정을 살펴보고 그 맥락 속에서 판단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성폭력 범죄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것인데, 그래서 피해자가 심리적이나 물리적으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거기에 특히 성인지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사회적 지위나 직장 내 권력 차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성범죄자든 다른 범죄자든 자기 잘못에 대해 제대로 형사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달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성범죄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여긴다. 그러다 보니 성범죄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죽기 살기로 범행을 부인하면서 피해자를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성범죄자라고 해도 죄 값을 치르고 난 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이 계속 공격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느 경우든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고 그 때문에 고소조차 망설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대변하는 변호사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조금 뜻밖이다. 성폭력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 피해가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누구보다 오랫동안 피해자의 곁에서 그들의 삶을 지켜본 그가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저자는 직업으로 법정을 드나드는 변호사인데도 법정은 긴장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높은 법대 위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판사는 흡사 저승사자처럼 보인단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발언이 어눌하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판사는 ‘일목요연하게 작성된 서면이나 육하원칙에 따라 말하는 변호사의 화술에 익숙’하니 피해자들의 진술이 판사를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요즘은 드라마 뿐 아니라 실제로도 판사들이 공공연하게 법원은 진실을 가리고 정의를 회복하는 곳이 아니라 제시된 증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하는 곳이라고 말한다니 피해자들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저자는 마지막 4장에서 수사관들과 판사들에 대한 아쉬움을 적지 않게 피력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가 ‘성인지 감수성’을 그렇게 강조하는 대상이 그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인 김재련 번호사는 2020년 여름에 일어난 유력 정치인의 성추행 사건 피해자를 대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물론 이전에도 성범죄 피해자 변호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고 6백여 건의 무료 법률구조 활동을 벌여온 당사자로서 관련 분야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하지만 이 일로 그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만 마녀사냥의 타깃이 되었고, 이후로부터 아직까지도 모두가 지켜보는 것처럼 부당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에 대한 비난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쯤 페이스북에서 그의 글을 만났고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글을 읽고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심경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 그러면서 성폭력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피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더 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달아 가고 있다.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글을 읽으면서 분개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그런 비난에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걷기를 응원하는 것뿐이다.
그런 그가 참으로 유쾌하고 흥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와 관련한 기사라는 것이 죄다 잿빛이어서 읽을 때마다 민망했지만, 그런 상황에 꺾이지 않고 씩씩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털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곤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자의 분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피해자 구조사건을 담당하면서 자신이 변호사인 것을 늘 감사하게 여겼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변호사가 수없이 많지만 삶의 힘든 지점에 서 있는 피해자가 다시 용기를 내어 일상을 살아내도록 곁에서 도움을 줄 기회를 갖게 되는 사람이 많지 않고, 그래서 그런 기회를 얻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분투를 이어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에 그가 책을 펴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문해 단숨에 읽었다. 예상과는 달리 자신이 폭풍의 중심에 서있었던 2020년 여름의 그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여느 책에서 흔히 마주치는 개인사도 없고 자기자랑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저 오롯이 성범죄의 해악과 그로 인한 피해자에 초점을 맞췄고, 그래서 저자의 이 일에 쏟는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의 바람대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