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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20. 2023

서울은 기억이다

도시사학회

서해문집

2023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칠십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서울에 살고 있지만, 그런 나를 과연 서울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강원도 어촌에서 가난을 피해, 어머니는 평안도 안주에서 전쟁을 피해 단신으로 서울에 와서 가정을 이루셨다. 송은영 선생이 <서울 탄생기>에서 정의한 바에 따르면 내 정체성은 ‘도시 난민으로 산 이주민’이 아닐까 한다.


요즘 들어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흔적이 남아있을 리 없지만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돌아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 가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곳을 찾아가보기도 한다. 나이니 탓인지, 할 일이 없어서인지. 서울에 대한 책도 열심히 찾아 읽는다. 앞서 언급한 <서울 탄생기>에서 시작해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오래된 서울>, <경성의 화가들>까지. 이번에 송은영 선생께서 필진으로 참여하신 <서울은 기억이다>가 발간되었다고 해서 도서관에 신청을 해서 첫 번째로 빌려 읽었다.


서울에 대한 책이라면 대개 장소를 중심으로 풀어나가는데, 이 책은 독특하게 3부를 <공간의 명암>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의 공간을 집, 백화점, 하수도 등과 같은 유형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평생 설계엔지니어로 일한 사람이다 보니 이 중에서도 지하공간과 하수도 항목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명륜동 일대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예전에 ‘문안’이라고 했던 지역에 대한 서술도 궁금했다. 더구나 요즘 내 일상의 중심이 그곳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정동


요즘 지인 한 분이 정동교회 역사관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서 정동에 공관을 비롯한 외국인 관련 시설이 왜 그렇게 집중되었는지 궁금해 한 번 물어보려 하던 참이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박동 일대는 도성의 중심이었다. 인접한 재동에는 통상과 외교를 담당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관립 영어학교인 동문학과 그 부속기관인 박문국이라는 근대적 인쇄소, 우정총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박동은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정권을 둘러싼 변란이나 민중의 반외세운동이 벌어지면 혼란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컸고 방어와 탈출이 쉽지 않음을 보여줬다. 반면에 정동은 제물포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있고, 궁궐을 비롯한 조선 정부의 시설에 접근하기 쉽고, 상대적으로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이어서 대지와 가옥 구매비용이 저렴하고, 구릉이 있어서 전망이 좋다는 이점 때문에 외국 공관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관저와 업무공간으로 한옥의 형태와 외관은 바꾸지 않고 내부만 생활에 맞게 고쳐 사용했다. 미국과 영국의 공관이 정동에 마련된 이후 외국 선교사들이 자리 잡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들의 서울 진출을 허가하면서 병원과 학교만 허가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 예배는 선교사들의 사저에서 조용히 행해졌고, 선교를 위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미국 공사관 거리 북쪽으로 언더우드, 헤론, 엘리스 등이 고아원, 경신학교, 언더우드 학당, 정동여학당을 세웠고, 공사관 거리 남서쪽 성벽을 따라 서소문 방향으로 스크랜턴이 병원을 세웠고,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순차적으로 세웠다.”


혜화동


명륜동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지만 그곳에서 살던 기억은 없다. 태어난 곳이 부모님께서 형님처럼 가까이 여기던 분 댁 문간방이어서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몇 번 가본 일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마음이 들어서인지 다른 곳보다도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소설 <청춘극장>을 쓴 소설가 김내성 선생댁 바로 앞집이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그것을 훈장처럼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소설을 안 읽었다.


“혜화동 일대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마을을 쉽게 형성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왕의 거처가 된 창덕궁이 가까이에 있어 현재 서울대 병원이 있는 언덕이나 낙산에 오르면 궁궐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성균관 인근의 반촌, 즉 성균관 노비가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명륜동 일대)이나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경모궁(연건동 일대)에만 예외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혜화동 일대는 개발되지 않은 토지가 상당했다. 이미 도성 밖 성저십리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빼곡해지는 상황이었지만 이 일대의 개발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도성 안에 위치하면서도 이렇게 유휴지가 많다 보니 이곳은 넓은 부지가 필요한 근대적 시설물들이 들어서기에 제격이었다. 그래서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전신인 공업전습소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대한의원이 들어섰고, 1925년 연건동과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 본과 캠퍼스가 들어섰다. 기존에 전차노선이 종로4가-총독부의원까지 깔려 있었는데 1939년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경성고등상업학교까지 연장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공과대학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의과대학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는 상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전차 노선은 돈암동 미아리고개 아래까지였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소문 고개를 넘어 한참을 더 가야했다. 아마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때쯤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을 것이다.


여의도


졸업하고 국책연구소에 잠깐 다니다가 1982년 말에 지금 회사로 옮겼다. 현장 생활 몇 년 마치고 올라온 1986년 회사가 서여의도로 이사했다. 당시 동여의도는 아파트도 있고 그런대로 사람이 북적였는데 서여의도는 빈 땅도 많고 사람도 없이 휑뎅그렁했다. 이사하고 몇 달은 식당이 없어 점심때마다 곤욕을 치렀고, 밤에는 택시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 야근이라도 할라 치면 대중교통 막차시간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있어야 했다. 그곳에서 2009년 사우디 현지법인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23년을 일했다.


“여의도는 조선시대 왕의 목축장으로 쓰였던 곳을 1916년 일제가 비행장으로 만들었다. 1958년 김포공항이 생긴 후 여의도비행장은 공군기지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숱하게 수해에 시달렸던 서울시는 한강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도로를 쌓고 1968년 윤중제 공사를 마쳤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여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5.16 광장이 만들어졌고 서쪽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섰다. 국회의사당 건물보다 주변이 높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 때문에 여의도 서쪽은 고층화, 고밀도화 되지 못한 채 동고서저 상태로 남았다.”


이제는 시청 앞이나 광화문을 빼놓고는 광장이라 할 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5.16 광장에 대면 그곳을 광장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하다. 폭 300미터에 길이 1.4킬로미터. 넓이는 13만 평에 달하고, 평당 열 명 남짓 설 수 있다고 하니 백만 명은 넉넉히 모일 수 있는 곳이다. 정치 집회 참석자가 백만을 헤아린다고 하는데, 그런 식이라면 5.16 광장은 수백 만 명이 모였겠다. 그곳에서 열린 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 74년 엑스플로 집회, 81년 국풍 집회를 모두 참석했다. 아마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서울 시내에서 백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려 할 것이다. 지금은 그곳이 헌다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작년 이맘때쯤인가 처음으로 공원이 된 그곳을 찾았다. 좋기는 하던데, 나와는 무관한 곳이 되었다.


광화문


은퇴하고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이곳이 내 일상의 거점이 되었다. 홍은동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걸어도 한 시간이면 도달할 곳이다. 별일이 없으면 홍은동 집에서 화동에 있는 정독도서관까지 걸어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가다가 서대문 역사박물관도 들르고, 비가 오면 비 맞으러 눈이 오면 눈 구경하러 경복궁을 제집 드나들 듯 한다. 광화문 앞 역사박물관, 경복궁 안 고궁박물관과 민속박물관, 그 뒤편으로 청와대, 옆으로 국립현대미술관까지. 볼 것 쉴 곳이 즐비하다. 그야말로 문화의 중심지이다. 예전에 어른들께 어디 가시냐고 물으면 ‘문안’에 간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문안’이 서울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중심은 경복궁이 아닐까 한다.


어린 기억 속에 있는 광화문은 광화문 네거리였다. 그 길 끝에는 광화문을 헐고 조선총독부 청사로 지었던 중앙청이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었다. 중앙청을 헐고 광화문을 복원해야 한다는 말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중앙청을 놔둔 채 콘크리트 광화문이 들어섰고, 한참 더 지나 중앙청이 헐리고 그 후로도 얼마 더 지나 지금의 광화문이 들어섰다. 저자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바로 그해, 신한국과 개혁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시간적 상황에서 총독부 건물 철거를 공론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91년 초반에 경복궁을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대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총독부 건물을 없애지 않고는 궁을 제대로 복원할 수 없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복원에 얽힌 정치적 배경을 짚어나간다.


“광화문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박정희의 글씨로 만든 현판을 통해서나마 복원되었다. 이것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은 이후 드높았던 반일 감정이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옮겨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정책이었다. 1968년 반일감정을 활용한 또 다른 정치적 상징물인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종로에 들어섰다.”


지금도 경복궁 복원이 한창이다. 2030년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니 앞으로도 7년이나 더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 찍으러 갔을 때 기억으로는 근정전과 주변의 행각, 그리고 경회루와 향원정이 전부였다. (물론 더 있기는 했을 것이다.) 최근 향원정에 이르는 다리가 복원되었다. 예전에 있던 나무다리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하얀 쇠다리로 복원되었는데, 익숙했던 모습과 너무 다르고 주변 건물과도 어울리지 않아 몹시 거슬렸다. 이 때문에 복원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또 다른 저자는 복원에 대해 이렇게 견해를 밝혔다.


“복원한 청계천이 조선시대 청계천이 아니고 복원한 광화문 광장도 조선시대 그 거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복원이라고 이르는 것은 일제가 훼손하기 이전, 또는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파괴되기 이전의 공간 이용방식을 되살리겠다는 의도 때문이다. 물이 흐르는 청계천 변을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 시민이 육조거리를 다시 걷게 하는 것만으로도 복원이라는 표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복원이 보존이 아니라 사실상 재해석이라는 이름을 빌린 새로운 창조라면 우리는 지금도 광화문을 계속해서 변형하고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하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 바로 하수도였다. 사우디 현지법인에서 근무하면서 사우디 하수처리시설에 대해 여러 차례 검토한 일이 있었고, 그럴 때 기준으로 삼은 것이 우리나라의 하수처리 시스템이었다. 지금은 시설이 상당히 선진화 되어 있지만, 서울에 처음으로 들어선 오수처분시설은 1976년에 설치한 청계천 하수처리장이었다. 역사가 채 50년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하수처리 시스템을 기준 삼아 일했으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시스템이 언제 어떻게 갖춰졌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21년 동아일보에 돈화문과 연결되는 청계천 남쪽 을지로 3가 일대에서 진행된 수해방지 목적의 하수도 암거(파묻은 도랑)공사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면서 물의 도시이기도 했다. 서울을 감싼 여러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도성 한가운데로 모여 큰 개천과 시내를 이뤘다. 도성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과 남북의 지천이 그것이다. 개천의 상당수는 자연하천이었지만 몇몇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배수로로 이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깊게 판 인공하천이었다.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한 직후부터 청계천을 비롯한 하천을 정비하기 시작해 대략 세종 대에 완료되었다. 한양도성은 20만 인구를 기준으로 설계되었지만 임진 병자 양대 전란으로 도성 인구는 이를 훨씬 넘어서자 하천에 버려지는 오물의 양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영조 대에 이르러 이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규모 청계천 준천작업을 시행했다.”


“개항 이후 개화파에서 위생을 위한 하수도정비론을 들고 나왔다. 그 단초는 김옥균의 논설 <치도약론 治道略論>에서 찾는다. 이 논설은 기본적으로 도로정비론이지만 그중 상당 부분을 하수도정비론에 할애했다. 개화파의 하수도정비론은 갑오개혁기에 일부 정책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암거에 대한 문제의식은 희박했다. 1910년 이전에 일제가 벽돌과 모르타르를 이용한 암거를 서울역에서 용산 일대, 남대문로, 한국은행 앞, 회현동, 소공동, 태평로, 명동, 을지로에 설치했다. 총독부 토목국은 1916년 <1기 하수도 개수 사업안>을 만들었다. 이 계획에서 성내와 성외를 나누어 성내는 빗물을 배출하는 개거(개방된 도랑)와 오수를 배출하는 암거를 분리해 설치하고 오수정화시설을 설치하며, 성외는 이를 합쳐 설비해 마지막에는 정화된 하수를 한강에 방류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이를 후일로 넘기고 성내외를 막론하고 오수와 우수를 한꺼번에 배출하는 개거 하수도로 정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옥균이 하수도정비론을 집필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개화파의 주장이 이상론에 그쳤을 것이라고 여긴 생각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이 매우 실질적인 문제까지 검토했다는 사실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도시개발


도시 변두리를 근교라고 부르는 게 뜬금없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알고 보니 예로부터 “도성을 둘러싼 100리 이내를 교, 성 밖 50리까지를 근교”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좀 더 구분해서 한양도성의 성 밖 10리 이내를 ‘성저십리’라고 했는데, 이 지역은 성저십리에는 금표를 설치하고 한성부가 관리했다. 이 지역에서는 함부로 벌목할 수도 없고 식물과 흙과 돌을 채취할 수도 없고 묘지를 쓸 수도 없었다니 요즘의 그린벨트인 셈이다. 이제는 그린벨트가 거의 유명무실해졌지만 도시전문가들은 꼭 필요한 제도였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제도가 사문화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게 의도대로 잘 유지되었더라면 도시가 지금보다는 많이 쾌적했을 것인데.


2000년 지나서 이태원 명물로 떠오른 경리단길이 이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처럼 되어 활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사실 도시개발은 주민의 생활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어떤 형태로든)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면 원래 살던 서민들은 밀려나고 돈을 앞세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재개발사업이 그렇게 도시재생사업이 그렇다.


“서울시의 외면 속에서 형성된 집단이주정착지는 지역주민에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곳일 뿐 아니라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산기슭에 위치해 물이나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고 교통이 불편했다. 대신에 주거비가 다른 일반주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쌌다. 1983년 합동재개발사업을 도입할 당시 정부는 세입자에 대한 대책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 방식은 건물주만 재개발조합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작 지역에 거주하는 세입자 대다수는 보상이나 대책을 전혀 요구할 수 없었다. 결국 저소득층인 기존 주민은 개발 이후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었고 또 다른 저렴한 주거지역을 찾아 떠나야 했다. 집주인이라 하더라도 개발 이후 높아진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떠난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 살았던 저소득층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의 지하 셋방이나 옥탑방으로 옮겨 갔다.”


“2006년 정부는 도시재생사업을 본격화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표현되는 이 작업은 노후하고 불량한 기존 시가지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하고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다시금 도시를 소생하게 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군의 젊은 예술가, 인문학자, 문화기획자가 주도했다. 좀 더 저렴한 곳을 찾아들어온 젊은 예술가와 문화기획자의 시도로 지역의 가치가 상승하자 자본이 이를 잠식했고 정작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 주체는 지역에서 내쫓겼다. 도시재생사업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빈곤한 자의 삶을 개선하고 해결하겠다는 개발이 빈곤한 자의 삶을 몰아내고 부유한 자의 공간만을 창출하고 있다.”


나 또한 그렇게 밀려난 도시 빈민의 자녀로 자라났다. 그 어려운 살림 중에도 자식 교육의 포기하지 않으신 부모님 덕분에 그나마 서울에서 집칸이라도 지니고 산다. 그런데도 재개발이나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할 때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을 몹시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재산이라 할 것도 별반 없으면서 재산권 침해에 격분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얼마나 가소로운지. 개구리 올챙이 때 생각 못한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도시사학회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서울 사람들보다는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이 품어 온 오랜 기억을 모은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도시사학회와 연구모임 공간담화에서 활동하는 저자 열두 분이 각각의 전문분야를 나누어 집필하였다. <서울 탄생기>를 집필하신 송은영 선생의 글 때문에 읽기 시작했는데, 매우 흥미 있게 읽었던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의 저자 염복규 선생께서도 참여해 마침 눈길을 끌었던 하수도 부분을 집필하셔서 매우 반갑게 읽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부에서 <공간의 명암>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던 유형별 서술은 그동안 별로 만나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흥미로웠으나 한정된 유형에 분량도 그다지 많지가 않아 다소 아쉬웠다. 저자들이 역사 연구자로, 시대의 사관으로 이런 종류의 대중서 발간에 좀 더 힘을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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