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희 외
태학사
2023년 3월 1일
어제 보니 앞집에 홍매화가 활짝 피었다. 매일 바라보면서도 저렇게 활짝 필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참 무심했다. 홍제천변에 개나리도 피었던데, 이제 어쩔 수 없는 봄인 모양이다. 안산의 벚꽃이 필 날도 머지않았다.
개나리 진달래도 반갑고, 화려하게 피었다 사그라지는 벚꽃도 좋지만, 봄꽃은 뭐니 뭐니 해도 복사꽃만한 것이 없다. 아마 서울올림픽이 있던 해였지 싶다. 공단 설계 때문에 동해 북평에 한 달 넘게 출장 간 일이 있었다. 공단이 들어설 자리가 완만한 구릉이었는데 그 골짜기를 복숭아밭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쌀쌀하던 날씨가 풀렸고 하루가 다르게 골짜기가 분홍색으로 물들어갔다. 마침내 골짜기에 모든 복사꽃이 만발했던 날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둔한 문장으로는 아름답다 못해 환상적인 모습을 도무지 그려낼 수가 없다. 그저 그래서 도원경이라는 구나 싶을 뿐이었다. 저자도 복사꽃을 노래한 서거정의 글을 이렇게 인용해 놓았다.
일만 그루 복사꽃이 바다처럼 붉으니 도원이 무릉에만 있는 것이 아니로다.
도화만수홍여해 미필도원재무릉 (桃花萬樹紅如海 未必桃源在武陵)
저자는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으로 복사꽃(桃花)과 함께 오얏꽃(李花)을 꼽는다. 그리고 이 둘을 묶어 도리화(桃李花)라고 부른다고 알려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오얏꽃과 배꽃(梨花)을 구분하지 못했다. 우리말 이름이 같으니 같은 꽃으로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꽃모양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하고. 오얏은 자두의 우리말이다. 자두는 워낙 자줏빛 복숭아라는 뜻의 자도(紫桃)이던 것이 자두로 바뀐 것이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 바로 이화문(李花紋)이었다.
학창시절 집 마당에 앵두나무가 있었다. (앵두도 앵도櫻桃였던 것이 앵두로 바뀐 것을 보면 옛날에는 복숭아나 자두나 앵두가 모두 비슷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앵두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면 벚꽃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얏꽃, 앵두꽃, 벚꽃, 배꽃이 모두 비슷하다. 식물분류에 따르면 오얏꽃 앵두꽃 벚꽃이 장미목-장미과-벚나무속에 해당하고, 배꽃만 장미목-장미과-배나무속에 해당한다. 모양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는 말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로 시작하는 이조년의 시조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하는 이매창의 시조에 나오는 이화(梨花)는 오얏꽃(李花)이 아니라 배꽃을 말한다.
이밖에 구분하기 어려운 봄꽃으로 진달래와 철쭉이 있다. 저자는 그 둘을 이렇게 구분한다.
“봄소식을 알리는 진달래가 질 무렵 연분홍빛 철쭉이 피기 시작한다. 철쭉은 진달래와 비슷해 구분이 쉽지 않은데, 자세히 보면 꽃잎에 주름이 잡혀있고 엷은 자줏빛에 검은 점이 박혀있다. 꽃과 꽃대에 끈적끈적한 점액이 있는데 여기에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진달래를 참꽃, 먹을 수 없는 철쭉을 개꽃이라고도 부른다.”
난초는 종류도 참 많다. 동양란이 있고 서양란이 있는가 하면, 바위 표면에 붙어사는 착생란이 있고 땅에 뿌리박고 사는 자생란이 있다. 봄에 꽃피는 춘란, 겨울에 꽃피는 한란, 바닷바람 부는데 사는 풍란도 있고. 예전엔 인사이동 때 선물로 많이 보내서 난 화분 한두 개 없는 사무실이 없었다. 저자는 옛 선비들이 난을 무척 아꼈다고 설명한다.
“난초는 일반적으로 그 꽃에 주목하기보다는 고결한 자태의 잎이 애호되었다. 그래서 난은 친다고 하지 그린다고 하지 않는다. 강희안은 난초를 두고 이른 봄꽃이 필 때 등불을 켜고 책상머리에 두면 벽에 비친 잎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즐길 수 있고 책을 읽는 동안 졸음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옛사람들은 난초의 잎 뿐 아니라 그 그림자도 사랑했던 것이다. 게다가 봄밤의 난꽃 향기까지 더해지면 그 정취가 어떻겠는가.”
저자는 난을 설명하면서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이라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불이선란’은 마음속의 난과 종이 위의 난이 둘이 아니라는 선문답 같은 뜻을 담고 있는데,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 그림에 소장자들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황정수 선생이 <경성의 화가들>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서화에 소장자의 인장을 찍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이만큼 인장의 맛을 잘 살리고 작품의 격을 높이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꽃이야 봄꽃이 으뜸이지만 한여름에는 등꽃도 그에 못지않다. 저자는 등꽃은 향기가 진하고 널리 퍼져 보이지 않아도 등꽃이 핀 것을 알 수 있다고 소개한다. 아울러 꽃에 달콤한 꿀이 있어 옛날에는 등꽃이 피면 아이들이 꽃을 따먹으며 보릿고개의 허기짐을 견뎠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꽃을 따먹기로 말하자면 아카시아만한 것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아카시아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외래종이라서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저자는 선비들이 등꽃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설명하면서 “보는 이가 근본이 다름을 알지 못한다(觀者未知根本異)”는 문장을 인용해 놓았다. 서로 다른 뿌리(근본)가 엉켜 하나처럼 된 것인데 그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것으로 읽힌다.
오랜 셋방살이 끝에 새집을 짓고 이사하던 날 아버지께 마당에 널찍하게 등나무 그늘을 만들자고 졸랐다.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부러웠었나보다. 두 해쯤 지나니 꽤 넓은 등나무 그늘이 만들어졌고, 여름마다 그 그늘을 누리고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등나무를 베어버리셨다. 하는 일마다 안 된다고 속상해 하시다가 애꿎은 등나무에게 화풀이를 하신 것이었다. 앞마당에 배배 꼬인 등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예나 지금이나 엉킨 게 탈이었다.
평생 논리와 숫자만 들여다보고 살았으니 나무를 봐도 그렇고 꽃을 봐도 별로 감흥이 없고, 감흥이 없으니 아는 것도 없다. 얼마 전 울산대학교 노경희 교수께서 국어국문학부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동료 교수 두 분과 함께 정년을 맞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성범중 교수님을 축하하며 책을 만드셨다는 글을 읽었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분답게 꽃 피는 시기에 맞춰 꽃시를 감상하고 꽃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을 뒤적이며 이 책을 만드셨다고 했다. 꽃과 시와 서화가 어우러진 책이라고 해서 바로 주문을 넣었다. 저자께서 서문에 “주변의 흔한 꽃 이름 하나를 더 아는 것만으로 내 세계는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졌다”고 했듯이 나 역시 그랬다. 감성이 더욱 풍요로워졌을 뿐 아니라 꽃에 대한 상식도 꽤 늘었다.
“무궁화는 나라꽃이다. 하지만 무궁화가 어느 때부터 우리나라 국화가 되었는지 확실치 않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국화로 공포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조선 말기에는 지식인들 사이에 무궁화가 우리나라 대표 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무궁화는 7월부터 피기 시작해 가을까지 계속 피니 개화기간이 상당히 길어 무궁화라는 이름이 붙었을 수 있다. 나무 전체로 보면 무궁히 끝도 없이 피지만 꽃 하나하나는 하루에 피고 진다. ‘피고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라는 동요는 무궁화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개나리꽃은 봄을 맞는 꽃이라고 해서 영춘화迎春花라고 한다. 백합白合은 나리의 한자 이름인데 ‘흰 백白’이 아니라 ‘일백 百’을 쓰는 것은 여러 작은 조각이 합쳐져 하나의 뿌리를 이루는데서 유래했다. 목련은 연꽃을 닮은 꽃이 나무에서 핀다 하여 목련이라고 한다. 오늘날 흔히 보는 크고 화려한 붉은색 장미는 20세기 들어와 서양에서 유입된 것으로, 전통시대 동양의 장미는 오늘날처럼 그렇게 화려한 꽃이 아니었다. 색깔이 다양하고 나뭇가지에 돋친 가시는 여전히 장미를 묘사하는데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장미의 매력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꺾을 수 없는 도도한 아름다움이었던듯하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서는 삼짇날 화전처럼 노란 장미꽃을 따서 떡을 만들고 기름에 지져먹기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1931년 플로렌스 헤들스턴 크레인이라는 미국 선교사 부인이 한국 남부지방의 야생화를 그리고 그 꽃에 얽힌 이야기를 수집하여 만들었다는 <머나먼 한국의 야생화와 이야기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를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미시시피 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했고 그림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한문과 한글에 능통했던 남편 크레인 목사가 한국 고서에서 문헌기록을 찾아 번역해주었고, 꽃의 학명과 분류는 식물학자들에게 검증받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책이었겠다 싶어 검색해보니 도서관에는 없고 살 수는 있는데 값이 무려 49만 원이란다.
이 책은 독특하게 사철제본을 해서 저자가 귀하게 모아놓은 시와 서화를 편안하게 펼쳐놓고 감상하게 만들었다. 사철제본이란 책의 낱장을 접착제로 책등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접히는 곳을 실로 꿰매는 제본방식인데, 책이 잘 펴지고 넘어가지 않아 여간 읽기 편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덮을 책이 아니고 계절에 맞춰 펼쳐놓고 꽃과 함께 시서화(詩書畵)를 즐길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