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바트 어만
갈라파고스
허형은
2021년 6월 11일
간암에 걸린 교우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어느 목사의 글을 읽었다. 간암에 걸리고 나서 육십 평생 처음 신앙을 갖게 된 그 교우가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긴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무어라고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라 심란했는데 대화를 나누며 오히려 자신이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성경도 잘 모르고 기도도 할 줄도 모르는 그 교우가 “좀 더 살게 된다면 주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이고 곧 죽어도 천국에 가니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고 하더란다.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교우가 생각하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이길래 죽음을 앞두고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울에 돌아오기 전 몇 년은 지옥을 살았다. 어느 날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하고 나서 비로소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마음은 수없이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렸지만 한 번 평안을 맛보고 나니 지옥 같은 순간에도 평안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잃지 않게 되었다. 문득 이생의 삶에서도 이렇게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천국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 지금 이 순간 이 땅을 떠난다 해도 괜찮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한 해 반,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평안을 얻었다. 돌이켜보니 어느 순간부터 천국이 내 삶에서 지워져있었다. 오랫동안 머리로는 천국은 가는 곳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정작 천국을 누리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 뜻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천국의 삶이라면 나는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천국을 기대할 이유가 없어지고 천국이 내 삶에서 지워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앞서 언급한 암 투병 중인 교우처럼 고통 속에서 살면서 천국에 대한 기대로 그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에게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만약 성경이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면, 예수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없었다면 그래도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는 죽고 나서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구약에도 없고 예수가 직접 가르친 일도 없다고 말한다. 놀랍지 않은가?
“구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냥 ‘죽음’으로 간다는 표현이 수천 번 등장한다. ‘스올’이라는 표현이 60번 정도 등장하는데, 성서학자들은 ‘스올’이 지옥을 뜻하지 않는다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스올’을 언급한 성경 구절 거의 대부분이 이를 사망이나 무덤을 지칭하는데 사용했고, 그래서 ‘스올로 내려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구약을 통틀어 영원한 형벌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언급한 구절은 어디에도 없으며, 죽은 사람이 상과 벌을 받는 장소로 천국과 지옥을 언급한 구절도 단 한 곳이 없다. 유대교 연구자인 엘런 시걸도 ‘구약에는 어떤 지옥과 천국의 개념도 등장하지 않으며 죄인이 받을 명백한 심판도 의인이 받을 넘치는 상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도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라고 고백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으니(창2:7)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상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었다는 생각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저자는 우리가 받아들인 사후 세계관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어떻게 공평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공정하다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빚어낸 개념”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심각한 박해와 순교를 지켜보면서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는데도 저렇게 번영하는데 옳다고 믿는 것을 고수한 자신들은 고통 받다 죽는 게 과연 공평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 의문은 “종말 때 죽은 개인을 부활시켜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생각으로 발전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상벌에 해당하는 천국과 지옥의 교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변화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어떤 이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죽음 이후에 멸망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들은 초점을 개인에게 맞춰 종말이 와서 모두가 심판 받을 때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더 후대에는 몇몇 사상가가 종말의 때가 아닌 인간이 죽는 시점에 정의가 이루어지며, 그래서 의롭게 산 자들은 불멸의 영혼을 상으로 받고 악하게 산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숨이 떠난 육신은 사후에 아예 존재를 멈춘다는 개념에서 시작해 천국에 올라간 영혼이 영원한 생을 누릴 거라는 개념으로 극적인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의는 언제인지 모를 먼 미래가 아니라 죽음 직후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죽는 즉시 정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으면 곧장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 자는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이고,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산 사람이나 남을 보살피고 옳은 일을 하며 신을 섬기고자 애쓴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 벌도 상도 한 번의 생애 동안만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그분이 내리는 상과 벌도 영원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변화를 거치며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기는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에도 언급된 바가 없고 예수가 가르치지도 않은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성경, 외경, 초대기독교의 전승, 바빌로니아 문서를 비롯한 고대문서, 신화와 문학작품을 넘나들며 자신의 주장을 논증해나간다. 열심히 따라 읽기는 했으나 배경지식이 없어 한 번 읽은 것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다시 읽기에는 너무 지루했다. 뒷부분으로 가면서는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대충 건너뛰며 장만 넘겼다. 그러다 보니 읽었으나 읽었다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날이 멀지 않았다고 가르쳤다(묵시론적인 가르침). 저자는 이런 묵시론적인 가르침은 당대에 이루어질 줄 알았던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었다고 설명한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철저히 묵시론적이던 예수의 가르침은 누가복음에서 조금 덜 묵시론적으로 달라졌고, 요한복음은 비묵시론적으로 한 발 더 나아갔으며, 요한복음으로부터 20년 후쯤 기록된 도마복음에서는 반묵시적으로까지 바뀌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시대에서 두어 세대 후에 기록된 누가복음에서 그 증거를 찾아낸다.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재판받을 때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우주의 심판관인) 인자가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막14:62).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최후의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제부터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계시리라(눅22:69)’고 말한다. 시간적인 개념이었던 ‘최후의 심판’이 수직적 개념인 ‘저 위의 하늘나라’로 대체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강도 하나가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요청한다. (아마 그는 최후의 심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며 강도가 죽는 순간 낙원에 들어갈 것을 암시한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저자는 또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현세에서 이루어질 상벌에 대한 언급이 훨씬 자주 나온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누구든,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든 아니든, 모두 종말론에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밝힌 것으로 해석한다.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서술의 양이 많은 게 아니라 너무 폭 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과연 저자의 논증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이해한 것을 정리하자면; 히브리 성서(구약)에 상벌의 개념인 천국과 지옥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없고, 예수의 가르침에도 그런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예수는 당대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으로 가르쳤지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자 복음서가 묵시론적인 것에서 덜 묵시론적, 비묵시론적, 반묵시론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렵게라도 정리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천국을 소망하며 살던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피라도 잡을 수 있는 실마리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이 저자의 관심사도 아니고, 논증 이후 적용의 문제이니 결국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다. 이번에는 그저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선에서 마무리 져야 하겠다. 더 들여다본다고 뭔가 더 알게 될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