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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스루에 여행

by 박인식

아이들과 함께 혜인 아범이 6월과 7월에 있을 공연을 준비하느라 며칠 머물고 있는 카를스루에에 다녀왔다. 1806년 1,800석 규모로 출발한 카를스루에 극장은 당시 인구가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과 현재 카를스루에 극장이 1천 석 규모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위상이 어땠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극장은 1847년 공연 도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는데 이때 62명이 목숨을 잃었다. 1853년 다시 세워진 이 극장은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는 영광을 누리다가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어 한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카를스루에 극장은 1975년에 세워졌으며 몇 년 전부터 리노베이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Karlsruhe Staattheater 1808-1847.jpg 1806년 카를스루에 극장
Karlsruhe Staattheater 1853-1847.jpg 1853년 카를스루에 극장
Karlsruhe Staattheater 1945.jpg 1944년 폭격 당해 폐허로 남은 카를스루에 극장


이처럼 대단한 역사를 지닌 극장에서 연주하게 되었는데도 혜인 아범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일전에 바그너가 작품을 구상했다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공연하고 와서는 그렇게 감격해하더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극장 모습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비스바덴 극장에서 일하다가 현대식 감성으로 지어진 극장을 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내 눈엔 비스바덴 극장의 클래식한 모습 못지않게 현대적 감각의 조형미가 돋보였다.


Karlsruhe Staattheater.jpg 현재 카를스루에 극장
KakaoTalk_20230603_140830314_08.jpg 카를스루에 극장 리노베이션 안내판


카를스루에는 독일 남서부 국경에 위치한 도시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가 지척에 있다. 독일에서 경제사정이 가장 좋다는 바이에른 주 다음으로 꼽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안에서도 굉장히 잘 사는 도시 중 하나다. 독일에서 가장 큰 연구소가 있고 유수한 기업의 본사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도착해서 먼저 눈에 띈 것은 자전거와 자전거 도로였다. 가는 곳마다 자전거가 늘어서있었고, 도로에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확실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많고 평지이다 보니 자전거 인구가 많아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대학 도시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과 카를스루에 음악대학을 비롯해 카를스루에 교육대학 국립 조형예술 아카데미가 있다. 한국 유학생도 많고 내가 아는 청년들도 몇몇 이곳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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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스루에는 도시 중앙에 있는 카를스루에 궁전과 그곳에서 2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중앙역을 잇는 도로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간쯤에 카를스루에 극장이 있다. 이 지역은 궁전에서 도로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와 어느 곳에서도 궁전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을 부채꼴 도시(Fächerstadt)라고도 부른단다. 사람이 모일만한 곳은 중심축에서 서북쪽 지역에 몰려있다. 학교를 돌아볼 게 아니라면 궁전과 그 지역을 돌아보면 대충 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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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하철이 깨끗해 보여 확인해보니 이 도시가 최초로 노면전차인 트램과 일반철도를 연결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를 카를스루에 모델이라고 부른다는데, 시내에선 트램으로 운행하던 노선이 시외로 나가선 일반철도와 선로를 공유해 광역철도로 운행할 수 있다. 덕분에 카를스루에 광역권에 살던 시민들이 철도를 이용해 시내로 오기 위해 중앙역에서 환승해야 했던 것이 이 시스템이 상용화 된 이후 환승 없이 시내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도시 건설 3백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을 목표로 2012년부터 도심을 통과하는 트램을 지하화하는 공사를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2021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지하구간을 운행한지 채 3년도 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깨끗한 게 당연한 일이겠지.


궁전이 크기는 해도 딱히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궁전 앞에 열려있는 공간도 그렇고. 하지만 궁전에서 뻗어나간 서른 개가 넘는 부채꼴 모양의 도로가 도시와 궁전을 연결해주고 있어 다른 궁전과는 달리 시민친화적인 느낌을 받는다. 이 도시를 건설한 카를 3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를스루에를 철저하게 계획도시로 건설하고 도시 어느 곳에서나 궁전을 바라보고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여느 전제군주와는 달리 시민의식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짐작한다. 아무리 전제군주라고 해도 자신의 거처가 들여다보이는 것이 편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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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카를스루에 예술디자인대학에 속해 있는 미디어아트센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옛날 군수공장 자리에 들어선 미디어아트센터는 미디어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시설인데, 그곳 3층에 컴퓨터게임 전시공간이 있다는 걸 혜인 엄마가 찾아냈다. 규모가 그다지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컴퓨터 게임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의 테트리스 게임부터 최근 게임까지 누구든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아이들이 다른 거 보러 가자는 데도 테트리스만 삼십 분 넘게 매달려 있다가 결국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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