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by 박인식

하나님 나라 (2017.03.0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뜻이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성경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산다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심상정 (2017.03.01)


당선 가능성이 낮은데 대선에서 완주할 수 있겠느냐는 손석희의 질문에 대해 심상정은 “민주사회에서 선거는 당선자 확정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답변했다. 그 설명 하나로 소수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선명하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심상정이나 노회찬과 같은 구성원의 면면을 보아 정의당이 건강한 소수당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분복 (2017.03.02)


자식 만날 계획을 세우고 나서는 늘 그 만남을 허락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오늘 자식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허락하셨으니 분복을 풍성히 누리다 오겠습니다. 분복이란 본디 분에 맞는 복일 것인데, 언제나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고 삽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지만, 그래서 때로는 민망하기도 합니다. 언제 허락하신 것을 거두실 지라도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으니 그간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며 기꺼이 그에 순종하겠습니다. 어제도 어리석은 삶에 개입하시고 지켜주셨을 뿐 아니라 오늘 또한 평안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내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지금껏 그러셨듯이 내 삶에 내내 개입하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행복 (2017.03.02)


오페라 하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가 최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식이 성악을 시작하고 나서 그 무대에 서는 날을 꿈꾸기 시작했다. 얼마 전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오페라에 출연했는데, 혜인 엄마가 혜인이를 다른 집에 맡겨 놓고 학교 가느라 쩔쩔매는 걸 보면서 명성이 올라가고 바삐 사는 게 행복한 일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노래하며 사는 게 꿈이라고 했고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 같다고 했으니 굳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까지 큰 무대를 목표로 삼아야할 이유가 뭘까 싶더라. 명성은 얻을지 모르겠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옹색하게 살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만 일을 늘리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자기도 그랬으면 좋겠단다. 그러면 됐지.



최선 (2017.03.09)


최선을 다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자주 쓰는 말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부터는 아예 이 말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는 할 만큼 했으니 뒷일은 내 알 바 아니라는 책임회피의 말로 들릴까 해서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당장은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지나고 나면 늘 미진한 구석이 드러나곤 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 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져서 그 말을 쓰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예 자신에게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묻지도 않게 되더라.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아야 하나, 아니면 지킬 자신이 없더라도 약속을 하고 지키도록 애써야 하나 모르겠다.



훈장 (2017.03.12)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동안 쑥스러움을 핑계로 하지 못한 말이 많습니다. 너무 힘들어하시는 거, 어려워하시는 거, 그러면서도 저한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결과가 바라던 것이든 아니면 피하고 싶은 것이든 전 상관없습니다. 그 결과로 어떠한 상황이 나와도 더 기뻐하지도 더 속상해하지도 않을 겁니다.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시고 기도로, 열심으로 하는 아버지 모습만으로도 저에게는 늘 감동이었고 승리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관점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했고, 작은 고난은 우리가정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병에 걸린 욥에 비하면 이일은 아주 작은 고난에 불과하잖아요. 저도 열심히 기도하고 기대하며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에 부어주실 축복을 기대하며 살겠습니다. 1년, 아니 몇 달 후에는 분명히 이 일들이 주님의 기적이 시작된 에피소드가 되길 늘 기대하면서 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입니다. (2006.06.23)


살면서 자식의 눈길이 무서웠다. 민낯을 드러내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자식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006년 어느 날, 자식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뭔가 어려운 상황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자식이 보낸 위로의 글이었다. 물론 내 삶이 그런 글을 받을 만큼 온전하지 못했고 삶의 다른 한 편에는 부끄러운 모습이 그에 못지않았지만, 내 삶의 한 편에 있는 진정성을 인정한 자식의 글이 정말 큰 격려가 되었다. 그래서 그 후로 십 년이 훨씬 넘도록 그 메일을 지우지 않고 있다.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식에게 부끄러운 아비가 되지 말자고 다짐하느라 말이다.



사모 (2017.03.14)


스스로를 사모라 부르는 사람은 목사 아내들 밖에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국어공부를 하지 않아서일까? 알고도 그러는 걸까? 그러고 싶을까? 정말 사모라 불려야 할 분들은 스스로 사모라 부르는 경우를 못 봤건만... 기독교의 슬픈 자화상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사모(師母) : 스승의 부인 <동아새국어사전>



안희정 (2017.03.14)


각 공중파 방송에서 대선주자를 검증한 프로그램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가능한 선입견을 버리고 살펴보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 중 보수 쪽에서는 유승민이, 진보 쪽에서는 안희정 눈길을 끈다. 인물을 떠나 정당의 기능으로 보자면 뜻밖에도 정의당만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책이나 철학으로 보면 안희정이 그 중 눈길을 끈다. 그런데 왜 그가 이야기하는 걸 보면 매번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걸까?



회개 (2017.03.17)


요나서가 니느웨에 대한 경고와 회개와 용서인 것은 알았는데, 100년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다시 경고하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아 멸망한 사건을 나훔서가 다루고 있는 것은 미처 몰랐다. 이 설교 말씀이 한 주일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심판을 거두고 용서하신 것과 결국 멸망에 이른 것을 가른 건 회개였다. 돌아보니 분에 넘치도록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넘쳤지만 애통하며 회개한 기억은 없다. 그저 응답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연약함을 토로하는데 그쳤다. 한 주일 동안 회개에 힘썼지만 내내 막막했다. 회개도 훈련이 되어야 하는가 보다. 오늘 아침 그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회개의 영을 허락해주시기를 구했다.



착각 (2017.03.18)


늘 자신을 억누르고 살았다. 어려움을 당하면 그 까닭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고 했고, 까닭을 모르겠으면 하나님께 물었다. 그래서 기도는 언제나 질문이었다. 까닭이 내게 있으니 누구를 원망할까. 평생 그러고 살았으니 하나님께 투정 한 번 해보지 못했고, 더구나 원망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께 원망 한 번 하지 않고 산 건 믿음 때문이 아니라 내 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성정 때문에 삶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고 고해였다. 그 고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몰라 늘 답답했고, 답답해 묻는 질문을 성숙한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았다.


모처럼 자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꿈꾸었던 바를, 세웠던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도에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려는 모습도 보이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아내고 말겠다는 모습도 보인다고 했다. 사람이란 본디 부족하게 지어졌는데,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려는 모습이나 하나님 뜻을 모두 알아야 하겠다는 모습이 하나님께는 교만하게 비치지 않을까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실 텐데, 고통을 자초하며 사는 게 과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겠는지 물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아침, 묵상 가운데 모든 염려와 근심이 자초한 것인 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죄인 줄 새삼 깨달았다. 그저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고, 어제도 지키셨고 오늘도 지키시니 내일도 지켜주실 것으로 믿고,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맡기고, 오늘은 오늘 허락하신 분복을 누리리라.



자업자득 (2017.03.30)


며칠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수감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바른 말 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권력의 정점에 서있었으니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고, 그 중에 사리판단이 바른 사람이 왜 없었을까. 사리판단이 바른 사람이라면 입에 쓴 조언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는 것쯤은 짐작했을 것이니 상사가 싫은 내색을 해도 조언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어 보인다. 제대로 조언할 사람도, 권력을 좇아 빌붙던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조언을 하는 사람은 내쳤으니 없고, 권력을 좇아 빌붙던 사람은 권력의 끈이 떨어졌으니 떠나지 않았겠나. 누구를 탓하겠나, 자업자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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