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by 박인식

정치인의 수준 (2017.04.01)


비판은 언제든 허용되어야 한다. 비난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조롱은 금할 일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고, 설령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안다. 정치인의 수준이 국민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정치인의 수준은 그런 상식적인 국민에 미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산티아고 가는 길 (2017.04.01)


학교 다닐 때 오디오를 사고 싶었다.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넉넉했더라도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씀드리기엔 너무 비싼 사치품이었다. 친구가 오디오를 사고 싶으면 먼저 음반을 사라고 했다. 음반을 사면 오디오를 갖고 싶다는 희망이 구체적인 목표가 되고,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그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때문이라고 했다. 친구 말대로 음반을 사기 시작했다. 음반이 쌓여가자 오디오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다.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1년짜리 적금을 들었다. 오디오를 샀을 때 이미 사들인 음반이 100장이 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쉽게 엄두 낼 일이 아니어서 그냥 희망사항으로 묻어둘까 했다. 그러다 문득 오디오를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로 정보도 찾아보고, 책도 읽고, 링크도 찾아서 매일 새로운 소식을 받아본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오래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800km라니 그 열 배쯤 걸으면 체력적으로는 준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8천km를 걷기로 하고 한 번에 10km씩 해서 한 달에 200km 걷는 걸 목표로 삼았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했는데 한 달에 200km는 고사하고 100km 걷는 것도 벅찼다. 오늘까지도 300km를 채우지 못했다. 그렇기는 해도 이제 매일 올라오는 산티아고 사진을 보면 내가 그 길을 걷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시작했으니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그 길을 걷지 않을까, 남보다 잘하는 건 없었지만 시작해놓고 중간에 포기한 기억은 없으니 가기는 가지 않겠나 싶다.



사순절 (2017.04.06)


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있다고 믿는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기까지 은혜를 베푸신 것이니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을까?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일도 없고 그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던 적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마땅한 감격과 감동을 느껴본 기억이 없다. 그것은 사실이었고 믿음의 근거였지만 그 감격과 감동이 내 삶을 바꿔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순절을 지날 때마다 이를 해결해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애쓸수록 전능한 하나님께서 왜 굳이 그 길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궁금증으로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을까? 다른 길이 없었다면 그런 분이 어떻게 전능한 하나님이실 수 있을까.


올해도 또 이렇게 사순절을 흘려보낼 것인가? 아직 한 주가 남았으니 좀 더 씨름해 보리라. 이제는 깨닫게 해 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 Kyrie Eleison.



전도 (2017.04.13)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것은 수단일 뿐이다.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다. 도는 전해졌으나 삶이 그를 따르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수단을 목적 자체로 오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성구 암송 (2017.04.13)


나는 성구를 잘 외우지 못한다. 오래 전 청년부 사이에 끼어서 한동안 부지런히 외워보기도 했지만, 따라가기도 벅찼고 외우고 나도 바로 잊어버렸다. 올해부터 교회에서 한 달에 하나씩 성구를 외우기로 했다. 외우지 못하는 건 여전해서 함께 외울 때마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 며칠 전부터 암송할 성구를 전화기 뒷면에 붙여놓고 틈틈이 외우고 있다. 그래도 쉽게 외워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아침에 성구를 외우면서 그 뜻을 살펴보았다. 꽤 오래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그 성구가 외워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성구를 외우려고만 했지 그 뜻을 깊이 살펴본 일이 없었다. 먼저 이해하고 그것을 나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온전히 기억할 텐데, 무턱대고 외우려고만 했던 모양이다. 성구 암송을 왜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공약 (2017.04.14)


대선 주자들은 하나 같이 비용은 낮추고 소득은 높이겠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임대료를 낮추면 임대비용이 줄어 덕을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임대소득이 줄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지 않겠나. 대선 주자들에게는 임대비용은 낮추고 임대소득은 높이는 묘책이 있기라도 한 걸까?



글쓰기 (2017.04.15)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는 날 동안 병치레 하지 않기를 꿈꾼다. 병치레하는 본인도 본인이지만 곁에서 돌보아야 하는 가족도 여간 고달픈 게 아니다. 병치레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 못지않게 경제적인 부담도 큰 문제인데, 은퇴자들 가운데 병치레 때문에 서민에서 극빈층으로 급전직하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자식을 하나 두었다. 부모 수발을 오롯이 자식 혼자 감당해야 하니 평소에 건강을 잘 지켜서 나중에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실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고통으로 따진다면 병치레보다 치매가 더 하지 않을까. 가족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될 뿐 아니라 본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은 채 삶을 마감해야 하는 일이니 어떻게 해서든 그 경우는 피하고 싶다.


치매를 예방하자면 일단 건강해야 하고 음식이나 생활습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단다. 두뇌를 많이 쓰는 것도 도움이 되고. 평생 그다지 존엄하게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부지런히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글도 쓰려고 한다. 올해 들어서면서 하루 하나씩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지켜오고 있다. 묵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을 정리하기도 하고, 현안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요즘 들어서는 이곳에 부임한 이후에 겪은 일을 정리하고 있다. 훗날 그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데 집중하는 만큼 다른 생각을 덜 하게 되니 그것도 도움이 된다. 글을 쓰면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바를 깨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 습관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프레젠테이션 (2017.04.19)


앞에서 발표할 기회가 많았다. 수주를 위해서, 사업을 추진하면서, 교육을 위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발표자료는 스스로 만들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한다.


발표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발표자가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의사전달도 매우 중요한데, 그러려면 발표내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편하게 따라올 수 있다. 아무리 발표자의 의도대로 만든다 해도 남이 만들면 그것이 발표자의 것이 될 수 없다. 자기 것이 아니니 발표에 힘이 실릴 수 없고, 힘이 실리지 못하니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 발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도 없는 건 당연한 일이고.


다음 주에 메디나시 환경마스터플랜 중간보고가 있다. 본사가 주관하는 일이라 나는 곁에서 현지사정을 잘 반영하도록 돕는다고 거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발표자료 작성을 주도한 모양이 되었다. 발표자료를 만든 사람과 발표할 사람이 다르니 애써 준비한 것이 빛을 보지 못할까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고쳐야 할 것을 못 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뒤통수깨나 따갑게 생겼다.



사무실에 계신 예수 (2017.04.14)


예수께서는 부활하시자 제자들의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셨다. 그러면 내 사무실로도 가셨겠구나. 이미 그러셨을 텐데 한 번도 그 생각은 못해봤다. 이제부터 출근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져야겠다.



사무실에 계신 예수 (2017.04.21)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제자들의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셨다는 설교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내 사무실로도 가셨겠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출근했고, 예수께서 곁에 계시다는 걸 의식하고 하루를 보냈다. 몹시 불편했다. 내 삶이 믿음과 무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좀 더 새로운 각오로 출근했다. 여전히 불편했다. 불편하면 고쳐야 하는데 오후 들어선 각오마저 잊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난 오늘, 예배를 준비하느라 묵상하는 중에 각오마저 잊은 사실을 기억해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각오로 출근하자. 불편할 것이고 그마저 잊게 되겠지. 그러면 또 다시 각오를 새롭게 하고 출근하자. 기억도 못하고 각오도 하지 않은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글 쓰는 이유 (2017.04.23)


글 쓰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있다고 모두 글을 쓰는 건 아니지 않을까. 글을 자주 쓰기는 했다. 그러던 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 들어서면서 매일 짧은 글 하나라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스스로 가진 생각을 정리하고, 그렇게 정리한 글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고, 또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앞으로도 일상이 된 글쓰기를 그만 둘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글 쓰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누가 시킨다고 하겠나.



가보지 않은 길 (2017.04.27)


애는 쓰는데 도무지 성과가 나지 않아 심신이 고단하지만, 손에서 일을 놓고 나면 이 고단한 시간도 사무치게 그립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나이까지 그런 복을 누리고 살 수 있어 감사했다. 이 말을 들은 은퇴한 친구가 일을 떠나 조용하고 느리게 사는 것도 복이라고 했다. 열심히 달려온 그 삶도, 유유자적하는 이 삶도 다 살만하다고 했다. 친구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내면의 흔들림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마음을 비웠다고는 하지만 그 흔들림까지 모두 털어버리지는 못했다. 난 그것이 소명이라고 믿고 이루려고 애썼던 것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없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심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저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길도 걸을만하다니 용기를 내보자.



전인권 (2017.04.29)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 몇 있는데 전인권이 그렇다. 가수는 노래하는 게 업이니 무엇보다 노래하는데 힘을 쏟아야 하지 않겠나. 노래보다 입담으로 인기를 유지하려는 가수가 득세하는 세상에 어눌하지만 힘을 다해 노래하는 그가 그래서 유난히 돋보인다. 그의 노래가 좋은 건 곡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그가 불러서 그렇기도 하다.


그가 만들고 불러서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걱정 말아요’가 표절 논란에 휘말려 여러 사람을 걱정시키고 있다. 원곡을 들어보니 아니라 할 수 없겠다. 논란을 해결하러 원곡자를 만나러 간다니 잘 매듭짓고 돌아오면 좋겠다. 어눌하지만 진심을 담아 노래 부르듯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하면 되는 일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노래에 쏟아 붓는 그의 진심이 훼손되는 게 아니니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매거진의 이전글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