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의 생애 재구성
진규선
수와진
2023년 6월 7일
기독교의 진수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고,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뚫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데 있다. 원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더없이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은 동시에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신앙이 한낱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논의의 종착점은 부활의 역사성이 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단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를 죽음으로 활동을 멈춘 운동가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령으로 잉태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존재를 인식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별난 주장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 학계에서는 이미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저자를 알고 지낸 것이 이미 오래 되었고 바젤로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봤지만, 사실 나는 저자가 연구하는 학문을 구체적으로 뭐라고 규정지어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저자의 연구 활동 중 역사비평에 관심이 있으니 그저 역사비평학자라고 해두자.
저자는 역사비평이란 실제로 예수에게 다가가고 싶어 했던 이들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발전시킨 학문적 기술로서, 실제 예수와 사도신경의 예수사이에는 최소한 네 가지 예수가 있다고 소개한다. 실제의 역사적 예수, 초기 기독교에서 선포한 부활한 예수, 복음서의 주인공인 예수, 사도신경 속의 교리적 예수. 그리고 나는 저자가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실제의 역사적 예수’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견해를 따를 경우 부활은 증발해 버린다. 내가 평생 지녀온 신앙의 토대도 무너지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연구 결과를 상당 부분 수긍하면서도 나는 신앙에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스터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조차도 알지 못해 궁금해 하다가 얼마 전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바울 선생 말 대로 율법이 복음에 이르는 몽학선생이라면 내게는 복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한 몽학선생이라고 말이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 반세기가 넘었고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여기고 산 것도 수십 년이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사이에 쌓인 사연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제는 굳이 성경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정도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결국 성경이 역사서가 아니고 신앙고백서이며, 기록할 때 당시의 표현방식인 문학적 장치를 사용했다는 것이 별다른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지.
오늘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 참석했다가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만든 분이 예수라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칭한 구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마치 혈육의 아버지처럼 가까운 존재로 여겨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백성을 대표로서 하나님을 부를 때 쓰는 공적 칭호였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물어서 확인한 내용이다.)
어쩌면 예수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대속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보다 하나님을 혈육의 아버지처럼 여기게 이어준 역할이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유일신으로서의 하나님과 내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나. 그런 신이 어떻게 나와 관계가 맺어질 수 있을까. 그저 능력 있는 신일 따름이지.
정직하게 말하자면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자식의 생명을 내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십 년 가까이 부활절을 지날 때마다 이 숙제를 풀지 못해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복음서는 역사기록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복음서의 기사가 모두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서는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 여러 신앙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종교적 감수성과 문학적 기교를 최대한 발휘해 쓴 드라마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들자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전설은 예수에 대한 신격화의 결과이며, 각 복음서 저자가 꿈꾸는 세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반영한 신학적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헤롯이 아기를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모세의 어린 시절 전설을 가져와 만든 것이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인구조사는 당시 로마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실시한 일이 없으며, 로마에서는 인구조사 할 때 일반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수태고지에 등장한 천사는 태어난 이이가 신성한 사명을 감당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 기법이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말에 곧바로 따라 나선 것은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나 예수가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일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제자들 역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제자들만 안식일을 어기며 밀 이삭을 먹을 리가 없고, 설사 그랬다 한들 다른 유대인들이 뻔히 보고 있는 곳에서 고발당하는 것을 각오할 만큼 배고픔을 참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위반한 예수를 비난하고 고발하는 전승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고대 랍비 유대교는 ‘생명을 위한다면’ 안식일 위반을 문제 삼지 않았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샤라 빌립보에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의 활동무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북쪽에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지 말라고 했던 사마리아보다도 북쪽이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와 제자들이 실제로 가이샤라 빌립보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배경은 예수의 지위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것이다.”
“빌라도의 재판 역시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를 비롯해 모든 제자가 도망갔기 때문에 예수 재판과 관련해 어떤 전승도 남아 있을 수 없다. 빌라도가 예수를 정식으로 심문했을 확률도 거의 없고 바라바를 놓아준 유월절 특사와 같은 전례도 로마에는 없었다. 총독으로서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잘 다스려야 할 빌라도가 굳이 산헤드린과 충돌을 일으키면서까지 알지도 못하는 유대인 청년을 위해 애썼을 확률도 낮다. 실제로 복음서의 빌라도 재판 장면은 모두 정식 로마 재판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순전한 창작이라는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확인된 사실을 기록하는 전기와는 달리 대상 인물의 덕을 전하기 위한 당시의 문학적 표현기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화로 여겨질 만한 기록 또한 세계를 설명하는 당시의 언어일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성경의 전제를 부정하는 참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보면 요셉은 예수탄생 사건에 등장할 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에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복수의 여동생까지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는 어머니 이름을 따라 ‘마리아의 아들’로 부른다. 이는 ‘아비 없는 놈이라는 욕설에 가깝단다. 저자는 마리아의 가족이 언급될 때 아버지는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리아는 아마도 남편 없이 홀로 예수를 낳아 키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는 다윗의 후손, 즉 왕가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신학적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합법적인 왕으로 여기게 하려는 신학적 의도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배경도 힘도 이름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그런 가난한 하층민 집안에서 태어난 예수에게 이렇게 자세한 족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만무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올바른 이해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왜곡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는 성서로부터 나왔고, 성서는 초기 공동체로부터 나왔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제자들이 세웠고, 예수가 그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로부터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지나 성서와 교리로 나아가서 현재의 나에게로 도달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보름 전에 저자가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분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교리를 내세워서 역사적 예수를 재단하고 있는 것이니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판형도 작고 분량이 채 300페이지에도 이르지 못하는 책 한 권에 역사적 예수를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를 그 분량에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책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입문서라고 여기는 것이 적절하겠다. 아니 어쩌면 저자의 연구 중간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복음서의 여러 사건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서술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적지 않은 곳에서 그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역사비평의 성과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저자가 연구가 거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이 내게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 결과를 기대한다.
이 책은 저자의 첫 번째 저서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글을 발표했고 번역서도 적지 않게 발간했지만 본인 연구의 성과물로서의 저서로는 첫 번째라는 말이다. 누가 되었든 자신의 학문적 결과를 책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연구해온 결과를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설명이 된 부분도 있고 말하다가 만 것 같은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사건과 그때 예수가 말한 가상칠언에 대해서 아무런 해석도 가하지 않고 단지 가상칠언을 인용하고 끝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적 결과에 대한 중간보고서 또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연구계획서라고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자기 학문에 대한 중간보고서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성과로서 <마리아의 아들>을 내놓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비록 내 생전에 그것을 보기는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