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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23. 2023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사계절

2000년 5월 29일 1쇄

2015년 4월 30일 44쇄     


1.     


알 낳는 닭을 난용종(卵用種)이라고 한단다. 알을 낳을 용도로 키우는 종자라는 말이다. 생명에게 붙이기에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하긴 식용 소를 육우(肉牛), 젖소를 유우(乳牛), 식용 닭을 육계(肉鷄)라고 부르지 않는가.     


난용종 암탉인 ‘잎싹’이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는 암탉을 폐기한 웅덩이에서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으로 이 동화는 시작된다. 웅덩이에 던져진 다른 암탉에 눌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잎싹에게 청둥오리가 정신 차리라는 말을 건넨다.     


2.     


잎싹은 양계장에 갇히던 첫날부터 아카시아나무를 보았다. 처음에는 아카시아나무에 꽃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 안 가서 초록 잎사귀가 나오고 나중에 조용히 졌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연한 초록색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감탄했다. 잎싹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진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에 세상에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잎싹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 지어 가졌다.     


잎싹이 탈출해 머물고 있던 헛간은 아늑했다. 날개를 퍼덕이려고 할 때마다 갑갑하게 닿는 철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잎싹은 혼자서 낳은 알은 아무리 품어도 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진작에 알았다면 알을 품고 싶다는 소망 따위는 아예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잎싹은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이 몹시 부러웠다.     


잎싹은 찔레덤불에서 알을 발견하고 누구의 알인지도 모른 채 품는다. 그런데 청둥오리가 날마다 물고기를 물어오고 덤불을 서성거렸다. 청둥오리는 족제비 때문에 밤마다 깨어 있었던 것이다. 잎싹을 위해서. 아니 잎싹이 지키는 알을 위해서. 알에서 깨어난 아기가 찔레덤불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수탉이 그 아기를 ‘오리 새끼’라고 부르자 잎싹은 깜짝 놀란다. 그리고 청둥오리가 족제비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놓은 것이 족제비가 배가 차있는 동안 잎싹이 자기 아기와 함께 보금자리를 떠나기 바랐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족제비가 다시 자기와 아기를 겨냥하자 잎싹은 벼락 같이 달려 나가 족제비를 앙칼지게 쪼았다. 잎싹이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아기인 ‘오리 새끼’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리 새끼는 엄마의 품을 떠나 오리 무리에게로 돌아간다.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는 건 알지만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잎싹은 그것조차 기뻐하며 오리 무리를 따라가서 다른 세상에 뭐가 있는지 보라며 떠나보낸다.     


잎싹은 다시 족제비를 만났다. 하지만 족제비는 도대체 며칠이나 굶었는지 가엾을 정도로 말랐다. 바람처럼 달려들던 옛날 사냥꾼의 모습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뜻 보인 배와 젖꼭지. 잎싹은 머리가 아찔했다. 눈 덮인 벌판에서 족제비가 왜 그렇게 배가 불렀는지 왜 그렇게 몸이 굼떴는지 한 순간에 이해가 되었다. 은밀한 굴속에서 배가 고파 낑낑대던 어린 것들의 어미가 바로 족제비였던 것이다. 잎싹은 족제비에게 논에 있는 짚가리를 알려주었다. 겨우내 살찐 들쥐 무리들이 비좁은 잠자리 때문에 날마다 싸운다는 말에 족제비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하지만 잎싹은 결국 족제비의 먹이가 된다. 족제비가 잎싹의 목을 조였는데 오히려 뼈마디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보였다. 정시도 말끔하고 모든 게 아주 가붓했다. 그러더니 깃털처럼 몸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아래에 있었다. 비쩍 말라서 축 늘어진 암탉을 물고 족제비가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3.     


닭이 낳은 알은 모두 부화되는 줄 알았다. 암탉이 수탉과 교미하여 낳은 알인 유정란이라야 부화할 수 있다는 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내게 닭은 그저 치킨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육계나 난용종을 구분하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암탉과 수탉으로 나누어진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음식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동화 첫 머리에 나오는 ‘이듬해’라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닭의 수명이 얼마가 되길래 잎싹이 ‘이듬해 봄’에 초록색 잎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찾아보니 닭 수명은 길게는 30년까지도 가능하지만 대체로 10년 내외란다. 하지만 요즘은 경제적 가치에 의해 육계는 48일이던 것이 33일로 줄었고, 난용종 암탉은 20주에 초란을 생산하기 시작해서 52주까지 품질 좋은 계란을 생산하다가 75~100주 사이에 도태된단다. 닭의 수명이 고작해야 몇 달인 줄 알았던 것은 육계의 경우이고 난용종 암탉은 그래도 2년은 넘어가는구나.     


난용종 암탉인 잎싹이 도망쳐 나와 가장 좋았던 것은 갑갑하게 닿는 철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축은 사람들에게 그저 음식 재료일 뿐 생명이 아닌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면서 애완동물은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고 가축에 대한 동물복지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그런데 닭에 대한 동물복지는 그다지 들어본 일이 없다. 과문한 탓이려니.     


동화의 주인공인 잎싹의 관점에서 보자면 남의 생명으로 먹이를 삼는 족제비는 없어져야 할 존재이다. 하지만 족제비도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새끼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잎싹도 자기가 살자고 자기보다 들쥐 무리가 사는 짚가리를 알려주는 것이고. 결국 이 동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결국은 먹고 먹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4.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가 나를 특별한 자리에 불러주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미국 젊은이와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선교사 자제를 위해 독서 소모임을 가지려 한단다. 그리고 그들의 교재로 이 동화를 택한 것이다.     


일전에도 동화를 가지고 독서모임을 진행한 일이 있어서 최근 동화의 흐름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찾아보니 백만 부가 넘게 팔렸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초등학교 권장 도서에 자주 추천도 된 작품이지만, 반대로 유해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어쩌면 그 사실이 이 동화의 진면목일지도 모른다.    

 

동화로서는 다루기 어려운 주제인 삶과 죽음과 소망과 자유를 어렵지 않게 묘사한 우화적인 동화라는 평가와 아이들에게는 일면 잔인한 구석이 있어 유해도서로 선정되었다는 평가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래서 어른을 위한 동화로 가르는 게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지난번에 <긴긴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지만, 그래서 독자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우리말이 낯선 젊은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자리이니 뭔가 의무감도 생기고 그래서 동화를 동화로 읽지 못하고 행간과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이렇게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으면 대체로 실패하던데, 이번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암탉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치킨을 떠올렸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한 것일 테니 말이다. (사실은 그 생각이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가능한 열심히 듣는 것이 미덕인데, 이 모임은 그런 자리도 아니고. 그래도 그 젊은이들이 동화를 읽으며 받은 느낌을 듣는 것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조금 막막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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