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람 라잔
김민주 송희령 옮김
에코리브르
2011년 2월 25일
아마 과장 시절이었을 것이다. 고가의 장비를 구매할 일이 있어 기획실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기술자라서 잘 모른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담당자가 상급자가 되려면 기술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점잖게 충고를 하더라. 고깝기는 했는데 그 후로 지내면서 그 말을 자주 떠올릴 일이 생겼다.
경영이나 경제와 관련해 배운 일도 없고 관심도 없어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게 충고했던 이 말대로 감당해야 할 일이 늘어나니 그걸 몰라서 될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호기심도 있고, 필요도 느껴서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이것저것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열심히 읽기는 했는데 워낙 바탕이 없으니 들어도 무슨 말인 줄 모르겠더라. 그렇게 삼십 년이 지났지만 모르기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런데 서브프라임이 뭔지 조차 몰랐다. 금융위기를 무척이나 힘들게 건넜으면서도 그게 왜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은퇴한 마당에 그걸 알아서 뭘 하겠는가 마는, 그래도 타고난 호기심 때문에 작년부터 읽겠다고 이 책을 꼽아 놨다. 벌서 며칠 째 붙들고 있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런 글을 올려놨더니 이 책을 읽은 이들이 하나같이 시간 낭비이니 지금이라도 접으란다. 그래도 기왕 읽기 시작한 것이니 건성으로라도 마치고 기억나는 것 몇 개 정리하면 시간 들인 것만큼은 유익이 있지 않을까 싶어 미련스럽게 꾸역꾸역 읽었다. 어쩌면 들인 시간이 아까워 포기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소득불평등으로 심화된 서민 유권자의 불만을 다독이기 위해 주택 구매 융자를 풀어서 생긴 일이다. 저자는 이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제도’라고 정의한다. 이것으로 저자가 이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책을 어떻게 끌고 갈지 짐작할 만하다.
“저소득 가구에게 쉽게 주택 자금을 대출해주자 소득재분배 효과가 즉각적이고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대출이라면 지불을 유예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규제와 감시 장치를 단단히 해놓아야 하는데,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규제 당국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결국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알고도 방치했다는 말이 아닌가. 거기서 더 나아가 정치권에서는 그것이 미국이 부흥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클린턴은 이 정책을 담은 보고서 서문에서 “주택 보유율이 증가하면 미국 가정과 공동체의 힘이 증대될 것이고 미국 경제의 힘도 강화될 것이며 미국의 위대한 중산층도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 이 정책을 통해 미국을 21세기에 훨씬 더 부강한 나라로 말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좋은 말이다. 상환 부담만 없다면. 잠깐만 생각해도 그것이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꼭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저소득 가구들이 당시 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감소추세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 내 집을 마련하려는 계획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정부가 갑자기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는 게 아닌가. 이 정도라면 나 같아도 판단이 흔들리기는 하겠다. 정부가 먼저 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고 그게 나 하나의 문제도 아니라면 왜 그렇지 않겠나.
그래서 클린턴 행정부는 이에 걸림돌이 되는 금융장벽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기조는 다음 부시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이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옳은 방법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폭탄 돌리기에 지나지 않는, 아니 필요 이상의 소비를 조장할 수 있는 정책이 어떻게 단기적이라도 옳을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정치인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말이다.
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1999년에서 2007년 사이 미국 주택 가격은 계속 상승하자 이를 근거로 은행에서 추가로 돈을 더 빌려줬다는 것이다. 숫자에 불과한 집값 때문에 수입이 늘지도 않은 상태에서 추가 대출을 얻었고, 그랬으니 모기지 상환을 연체한 저소득 가구 비율이 두 배 증가하고 신용카드 연체 비율도 75% 증가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모아놓은 작은 저축액마저 털린 채 자기 집에서 쫓겨났다. 이것을 두고 정책 실패라고 할 수 있는 일일까? 범죄라면 지나친가?
참고로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은 신용등급에 따라 Prime, Alt-A, Sub-prime으로 구분된다. 이 중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서브프라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무절제하게 풀어놓은 대출 때문에 일어난 것이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이다.
“소득 10분위 배율이란 상위 10%에 속하는 사람들의 평균 소득을 하위 10%에 속한 사람들의 평균 소득으로 나눈 수치이다. 미국에서는 이 수치가 1975년 3에서 2005년에 5 이상으로 증가했다. 상당수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대학 프리미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로 그런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을 점점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과거 4년제 대학 졸업자 비율에서 세계최고였던 미국은 이제 선진국 중에서 13위로 밀렸고 고졸자 비율은 선진국 중 꼴찌에서 세 번째이다.”
미국의 소득불평등이 교육불평등의 결과라는 말이다. 선진국의 대표 주자이며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다는 미국에서 교육불평등이라니 의아하다. 놀랍게도 저자는 교육불평등이 학생이 진학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도중에 그만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무언가 배우고 경험한다는 느낌을 학생들에게 주지 못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대학 교육수준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학등록금이 중산층 가정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상승했지만 대학교육의 생산성은 지난 수 년 동안 그다지 향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발간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십 년 전에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많이 이들이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여긴다. 누구든 노력하면 계층 상승을 꿈꿀 수 있는 나라였다. 하지만 저자는 이제 미국도 계층 간에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교육불평등의 결과로.
“부자들에게 세금을 때리는 정책은 미국 저소득층에게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지금은 가난하지만 언젠가는 자신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 Survey)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빈곤한 사람도 언제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비율이 미국은 71%인 반면 유럽인은 40%에 불과하다. 사실 미국 최하위 소득계층 20%는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할 수도 없다. 과거 미국에서는 ‘부의 순환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두세 대가 계속해서 부를 누리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이제는 교육 불평등으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오늘날 점점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들에게 경쟁에서 이길 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으며, 당연히 미래에 대한 기대도 감소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날로 증가하고 작지 못한 자는 영원히 갖지 못한 자로 남을 가능성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가진 자에 대한 부러움도 다라서 커지고 있다. 이 트렌드를 바꾸지 못한다면 계층 간에 파괴적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1997년 금융위기를 고통스럽게 통과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낯선 이름의 국제기구에게 휘둘려 마치 식민지 시대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수모를 당했던 기억이 그보다 훨씬 뼈아팠다. 당시 모두가 한 마음으로 다른 국가의 예상을 깨고 조기에 그 수모를 탈출했지만 그때 당한 수모는 잊을 수가 없다.
저자는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는 기업의 과잉투자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기업은 제조 시설 뿐 아니라 사업용 부동산에도 대거 투자했는데, 이런 투자가 아무 탈 없이 성공할 경우 그 혜택은 극소수 엘리트 계층과 투자자에게 돌아가지만 잘못될 경우 경제 전체가 붕괴하는 위험이 발생하고 그 부담은 정부와 함께 현재와 미래의 국내 납세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고 그 실체를 열어젖힌다. 그 정도까지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었고.
저자의 설명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IMF의 행태였다.
“사실 2008~2010년의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서방 국가들이 취한 태도는 1990년대 말 동아시아 국가들이 취한 태도와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MF는 동아시아 국가의 관료를 청렴하지도 않고 어떻게 정부를 운영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인간으로 취급했다. IMF에서 이들 동아시아 국가에 파견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독재정부라고 여기는 정부를 벌주는 데만 몰두했다. 그들의 조치는 많은 무고한 국민을 큰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큰 징벌권이라고 있는 양 착각했다. 또한 동아시아 국가의 정부에 조건을 제시하면서 미국 같은 대주주 국가들의 의견에 지나치게 휘둘렸다. 이들은 동아시아 국가를 서방식 지배구조로 개조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를 서방 기업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방하려는 의도였다.”
우리에게 들이대었던 가혹한 규제와 제재는 워낙 그들이 갖고 있던 절차가 아니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만해 보여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자기 마음대로 칼을 휘둘러 댄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괘씸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 빌미를 준 것이 우리이고 원칙 없는 그들의 칼날을 막아낼 힘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을 탓할 일이지.
일기예보는 날씨를 어떻게 예측했던 상관없이 제 갈 길로 가지만 경제예보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진행방향이 바뀐다. 경제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그만큼 중요하다. 문제는 이때 전제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변수를 일일이 감안할 수 없으니 중요한 몇 가지 조건을 뺀 나머지는 이전과 동일하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일갈한다. 그러니 경제예측을 믿으라는 말인가 믿지 말라는 말인가?
인센티브가 과연 효과적인 수단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몹시 부정적이다. 인센티브로 무엇인가를 독려한다는 이점보다는 그 인센티브를 얻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을 훨씬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라는 게 꼭 금전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업에서는 임원의 자리가 큰 인센티브가 된다. 상사 한 분이 임원 연임을 위해 발주처에 소송을 불사한 일이 있었다. 발주처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해소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자기 연임을 위해 당장 실적이 필요했고, 임기 후엔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후임이 그때 망가진 발주처와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중동 건설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어떤 기업은 5억 달러짜리 건설사업 두 건을 5억 달러에 수주한 일도 있었다. 적어도 자기 임기 안에는 그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센티브 없이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제목인 <폴트 라인>이 지질학 용어라고 소개하고 있다. 지질학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사십 년 넘게 밥벌이를 하고 살아온 나는 <폴트 라인>이 지질학 용어라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다. 깨진 라인이 폴트인데 폴트 라인이라니. 역전 앞이요 축구를 찬다는 말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