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김승진 옮김
생각의 힘
2020년 5월 11일
엔지니어로 살아오기는 했는데 나이가 들고 책임져야 할 범위가 넓어지니 경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땐 근처도 가본 일이 없으니 책 읽고 신문 기사 열심히 챙긴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하니 이해가 조금씩 늘기는 하더라. 이후로 재미 붙여 관련 서적을 적지 않게 읽었다. 그런데 요즘 읽는 경제 서적은 하나 같이 어렵고 지루하다. 곰곰 생각해보니 애당초 내가 읽겠다고 뛰어 들 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읽었던 경제서적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조금은 말랑한 책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씩 경제를 이해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며칠 전에 읽은 <폴트 라인>도 그렇고 이 책도 경제를 모르는 일반인이 읽을 책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경제학 교과서로 두 학기쯤 강의해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잘 모르는 건 건성으로 읽고 관심 있는 몇몇 부분만 집중해 읽었다. 그렇기는 한데 내내 고생스럽게, 후회하며 읽었다. 앞으로 경제서적은 가려 읽어야겠다. 겸손한 마음으로.
나는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인구감소를 꼽는다. 본사를 떠나기 직전까지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심했다. 한낱 엔지니어가 그렇게 고심해야 할 정도로 큰 현안이었는데, 그로부터 십오 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때만큼도 심각하게 여기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의아하고 난감하다.
당시 인구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생각한 것이 여성과 노인을 경제인구에 편입시키고 이민 문호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성ㆍ노인ㆍ외국인 직원을 대폭 받아들일 방법을 모색했다. 여성과 노인 문제는 진전도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될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가 이미 이백만 명을 넘어섰다는 데도 사회가 보여주는 이민에 대한 태도는 실망스럽다. 아마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이 그 중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알고 보면 단일민족이라는 게 착각이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민자 문제가 첨예하게 떠오른 6개국(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본국인들은 자기 나라에 들어온 이민자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실제와 매우 다르게 알고 있었다. 이주민이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에 빌붙어 산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민자 문제는 오해에서 출발했다는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근거 없는 선입견까지 거들고 나선다.
“저숙련 이주자가 부유한 나라에 유입될 때 현지인의 임금과 고용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노동시장은 표준적인 수요-공급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미 이슈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위력을 갖는 것은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올 경우 낯선 언어와 관습이 자기들의 순수한 문화를 압도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 영상만 봐도 우리 자신이 너무 낯설지 않은가? 문화라는 건 워낙 그런 것이다. 북촌 한옥이나 우리 전통음식이라는 한정식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고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순수한 문화? 글쎄다.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무역을 옹호한다. 자유무역이 당사국 모두에게 득이 된다는 개념은 현대 경제학의 가장 오리된 공리 중 하나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일반인들은 무역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시선이 섞여 있고 요즘에는 오히려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쳐 있다. 하지만 ‘자유무역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 꼭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장점을 모르지는 않지만 저숙련 노동자들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 중 무역으로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30%에 불과했고 27%는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일반인들과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큰 차이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경제에 대해 무지한 것인가, 아니면 경제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일반인들이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가?
“노동이 풍부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역 자유화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 나라의 불평등을 감소시킨다. 반대로 부유한 나라에서는 노동자가 손해를 보고 자본가가 득을 보기 때문에 불평등이 증가한다. 그렇다고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꼭 전보다 못살게 되는 건 아니다. 자유무역을 하면 국가 GNP가 올라가므로 ‘만약’ 자유무역 수혜자들에게 세금을 거둬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노동자들도 전보다 생활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문제는 ‘만약’이라는 조건이 정치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만약’이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이 정치에 좌우된다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주장을 고집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고. 결국 자유무역이 좋다는 주장은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할 수밖에.
“이력서에 범죄 적는 칸을 없애게 한 BTB(Ban The Box) 정책은 흑인 청년들의 고용을 증진시키기 위해 23개 주에서 도입하였다. 흑인 청년들은 다른 인구 집단보다 전과가 있을 확률이 높고 이들의 실업률은 전국 평균의 2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당초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차별이 악화되었다. 이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는 비슷한 조건을 지닌 백인 청년에 비해 흑인 청년이 서류전형을 통과할 가능성이 7% 정도 낮았는데, 이 정책을 시행하고 나서는 그 격차가 43%로 벌어졌다. 개개인의 범죄 이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자 고용주들이 흑인 지원자가 범죄 이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가정했고, 그래서 범죄 이력 대신 인종을 지표로 사용한 것이다.”
“아시아계 학생들은 학업성적과 교과 외 활동에서 일관되게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인성 등급은 일관되게 낮았다. 따라서 인성 등급까지 고려하면 아시아계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보다 동일한 실력일 때 입학 가능성이 더 낮다. 하지만 아시아계 학생들의 인성 등급이 낮은 것은 바로 아시아계 학생들을 차별하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
차별은 제도나 장치만으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저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제도나 장치를 마련해 놓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을 우회할 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저자는 게다가 그렇게 차별 받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그에 맞게 행동하고 자신들을 스스로 더 의심한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에 차별은 자기 강화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도나 장치를 거둬드릴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으니 사고방식과 태도를 더 바꾸라는 것이지.
“오늘날 성장 낙관주의자들과 노동 비관주의자들은 종종 같은 사람이다. 성장은 가능하겠지만 그 성장이 주로 로봇이 인간 노동자의 자리를 대체함으로써 달성되리라는 것이다. 로봇이 일상화 되면 고학력 노동자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지겠지만 로봇과 기계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나머지 노동자들은 극히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공지능은 기계가 스스로 학습할 수 있으므로 단순 반복 업무가 아닌 것도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지불하는 돈은 인간보다 훨씬 적은데도 그들은 훨씬 더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쩌면 회계사, 컨설턴트, 기자들까지도 그들에게 대체될 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자동화와 인공지능으로 낮아진 노동 수요는 앞으로 반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동화로 수익성이 높아진 영역들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돈을 쓰기보다 노동 절약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 더 투자할지 모른다. 또한 새로 창출된 부가 국내에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재화를 구매하는데 쓰일 지도 모른다.”
저자는 자동화화 인공지능의 부정적인 영향만 거론할 뿐 개선방안이나 긍정적인 측면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부정적이기만 하다는 말인가? 개선방안 없다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는 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가 그렇게만 말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놓친 것이 있는 모양이다.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나는 기본소득이란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상당한 증세 없이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근로의욕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가 방송에 나온 것을 들었다. 대상을 선별하는 비용을 감안하면 추가 부담이 그리 크지 않고, 기왕에 있는 복지 프로그램을 잘 조정하면 재원 마련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근로의욕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건 편향적인 선입견일 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성격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 설명을 듣고 부정 일변도였던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이 중립적인 정도까지 움직였다.
“조건 없는 보편 프로그램으로서 기본소득의 장점은 무엇보다 관리 비용이 적게 들고 대상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일어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혜택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복잡한 신청 절차에 익숙하지 못하다. 또한 수혜 대상이 되면 빈민층이라고 낙인이 찍히는 것도 큰 장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복지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될 만큼 가난하다는 것을 남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심사에서 불공정하게 떨어질 게 뻔하다는 생각으로 신청을 꺼리기도 한다.”
저자의 주장은 정성적으로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량적으로는 어떤가?
“기본소득은 돈이 많이 든다. 매달 모든 미국인에게 1천 달러를 주려면 연간 3.9조 달러가 필요하다.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다 합한 것보다 1.3조 달러나 많다. 다른 정부 지출을 줄이지 않으면서 이만한 자금을 조달하려면 기존의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없애고 추가로 세금을 덴마크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득 하위 50%에게만 지불하면 1.95조 달러가 되지만 대상을 설정하고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정작 궁금한 내용은 빠져있다. 소득 하위 50%에게 기본소득을 지불하면 기존의 복지 프로그램은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이며, 대상을 설정하고 확인하는데 비용이 얼마나 발생하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쉽지 않지만 조달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기본소득이 노동의욕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이를 반박하고 있다.
“복지 프로그램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금을 주면 그만큼 일을 하지 않거나 술 마시는데 그 돈을 써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가난한 것이 성취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전제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핑계거리라도 주어지면 곧바로 노동을 멈출 것이라는 예측으로 이어진다. 2014년 기준으로 119개 개도국이 빈곤층을 위해 비조건부 현금 이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52개 개도국이 조건부 현금 이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 대부분은 시행 초기에 효과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모든 시험에서 드러난 매우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현금을 주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충동적으로 다 써버릴 것’이라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실증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으로 돈을 받은 사람들은 식품 소비에 더 많은 돈을 지출했고 이에 따라 영양상태가 좋아졌다. 교육과 건강에 들어가는 지출도 증가했다. 알코올과 담배 소비가 증가할 것이라는 통념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너무 돈이 없어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 때문에 이제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사람들이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때로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도록 만들었다.”
우려한 부작용은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분석 대상의 모집단이 개도국 거의 전체에 해당하니 일부 사례라고 의미를 축소할 이유도 없다. 저자는 기본소득이 가진 덕목 하나를 다음과 같이 추가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그 돈을 사용할 용도를 각자에게 맡긴 것이다. 미국의 푸드 스탬프 같은 제도는 지금 받은 돈으로 식품만 살 수 있게 정해놓았다는 점에서 정부가 수급자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셈이다. 이런 조건을 붙이는 것은 쓸데없이 사람을 고생시키는 꼴이다. 어떤 행동이 정말로 그들에게 좋은 행동이면 정부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고, 어떤 게 좋은 건지 정부와 그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그들의 의견이 옳을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의지를 가졌다는 말로 들린다. 나 역시 인간은 대체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예외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믿음을 정책으로 옮긴다면 예외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 예외의 범위가 너무 작아 무시해도 좋을 경우도 있기는 하겠다. 그럴 때 그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