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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17. 2023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아라이 유키

배형은 옮김

메디치미디어

2023년 6월 30일


엊그제 폭우로 하천 둑이 유실되면서 지하차도에 쏟아져 들어온 물에 차량이 갇히면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을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라고 보도한 언론은 없었다. 막을 수 있는 사고를 막지 못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더 나아가 이제는 지구온난화의 결과라며 폭우조차 인재로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를 천재로 여기고 그런 상황을 피하지 못한 부주의를 탓했을 것이다. ‘자기책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자기책임’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여성이 성폭력을 당해도,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노동할 수밖에 없어도, 병에 걸려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힘들어도, 인권 침해가 횡행하는 기업에 들어간 것도, 노후를 준비하지 못했어도” 자기책임이라는 것이다.


‘피억압자의 자기표현법’을 전공하는 저자는 ‘자기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해도 타인이 그 일로 마음 아파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자기책임’이라는 말을 쓰면 쓸수록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이 망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권력자가 자기책임이라고 말하면 몹시 화나겠지만 섬뜩하지는 않다. 권력자란 원래 그런 존재이려니 할 수 있다. 진심으로 섬뜩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책임이라는 말로 서로를 상처 입히고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현상이다”라며 걱정한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건넬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젠가 남편을 떠나보낸 여인이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위로가 되었던 일을 고백한 것을 읽은 일이 있다. 많은 위로를 남긴 조문객이 모두 떠나고 집에 돌아오자 이모가 와있었는데, 이모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묵묵히 집안을 다 치우고 돌아갔고, 그것이 그렇게 위로가 되더란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묵묵히 아픔을 겪는 이의 옆을 지키는 것이, 그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훨씬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위로라고 건넨 말들이 오히려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저자는 차별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서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묻는다. 차별 당하는 사람은 대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위기에 몰려 있고, 그런 사람이 고립된 상태에서 일어나 맞서봤자 필경 사회에 짓눌려 버리게 마련이며, 차별과 싸우는 두려움을 앞에 두고 사람은 그렇게 간단히 용기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차별 당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는 대신 용기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고립시키지 않을 수 있는 연대감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격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구조를 개선하는 일이다. 물론 그 일이 한두 사람이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육아를 병행하는 직장인의 고충과 그에 대한 반응을 예로 들면서 말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시키고 파괴적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남성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다고 불평을 해도 ‘그러면 일을 그만두지’ 같은 말을 듣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여성이 그런 불평을 하면 ‘일을 그만두지, 그렇게까지 일할 필요가 있나’라는 말이 돌아온다. 말하는 쪽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것이라 해도 이런 말들은 살상력이 꽤 높다. 어느 여인이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은 건 폐를 끼치는 일이었을까요?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요?’라고 묻는 말을 들으면서 도저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말한 당사자는 분명히 그 이상의 감정을 끌어안고 있었을 것이다.”


“성실하고 주위 평판도 좋은 엘리트 회사원인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출산 휴가든 육아 휴직이든 제도 자체보다는 휴가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지요.’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그는 회사 분위기를 만드는 쪽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회사 분위기 문제를 남 일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도보다 분위기’라는 발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각하지 못했다. 제도보다 분위기의 위력이 크면 사람은 분위기에 좌우되어 살아간다. 분위기를 만드는 쪽에 속한 사람은 딱히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스러울 뿐이다. 강자가 약자를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대우해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말로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부지불식간에 그런 말을 흘리거나 적당히 맞장구치다가 나오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상처를 입고, 고통스럽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자기가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설령 기억한다고해도 자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많은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을 동정하고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며 분노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보면 대략 60~70%가 상처 입힌 사람 편을 든다. 상처 입힌 사람이 할 법한 말을 한다는 것이다. 심정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에 동감하지만 완성된 말은 상처 입힌 사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 편을 들었다는 ‘의도’만 기억하고 상처 입힌 사람이 할 법한 말을 했다는 ‘결과’는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장애인이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나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대다수 역시 어디에나 있는 보통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은 ‘악의’만은 아니고 “무슨 일이 있으면 큰일 나니까, 힘든 건 여러분이지 않느냐” 같은 ‘선의’가 사람을 소외시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격려하는 것도 그렇다.


“기대한다는 말은 크든 적든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섞여있고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라는 힘의 방향성이 들어간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더욱 지치고 만다. 물론 기대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무겁다.”


앞서 “분위기의 위력이 크면 사람은 분위기에 좌우되어 살아간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문제는 분위기가 사람을 압박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위기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파괴적일 수 있다.


“일본의 일부 장애인 운동가들은 장애인의 가장 가까운 적은 부모라고 주장한다. 장애인 부모는 우리 아이가 세상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식을 혼자 책임지려고 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아이를 남겨두고 죽을 수 없다는 의무감에 빠져 장애아 살해, 또는 장애아 살해 후 부모 자살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맞기도 한다.”


“안락사나 존엄사가 논의 될 때 ‘본인 의사’나 ‘자기 결정’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본인 의사’나 ‘자기 결정’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람의 의지란 그게 누구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제대로 공평하고 공정하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책에서 언급된 ALS(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해 활동하는 운동가 한 사람은 그들을 만나면서 ‘본인 의사’나 ‘자기 결정’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죽음을 선택하도록 부추기고 꾀어냈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의미 없이 연명치료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연명치료의향서를 이미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했다. (이곳에 등록하지 않은 연명치료의향서는 임의서류로 분류되며, 이를 적용해야 할 상황이 일어났을 때 임의서류는 ‘본인 의사’로 간주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안락사나 존엄사도 택할 생각이 있다. 의미 없는 생명을 연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과연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이라는 말이 타당한 것인지 하는 의문이 일었다. 혹시 분위기에 떠밀린 것이 아닌지 돌아봤다. 물론 등록을 결정했을 때로부터 지금까지 그것이 ‘본인 의사’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일이 없다. 아내는? 전적으로 ‘본인 의사’였을까? 내가 결정한 분위기에 밀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내 결정도 ‘본인 의사’였다고 장담할 자신이 없어졌다.


이 책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연히 두 번 손에 들어왔다. 첫 번째는 선택한 것이 아니니 언젠가 읽을 생각으로 책장에 꽂아두었고, 두 번째 손에 들어오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읽기 시작해 내쳐 읽기를 마쳤다.


나는 타인의 아픔에 둔감했다. 나이 들어 그것을 깨닫고 고치려고 애썼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런데 내심은 그 정도면 평균은 넘었다는 오만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내 말에 비수가 들어있다고 느낀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을 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에 앞서 내 말 속에 들어있는 비수부터 없애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다. 아마 그런 자각이 필요해서 이 책이 내 손에 두 번이나 들어온 모양이다.


내 손에 두 번이나 들어온 이유는 알아차렸으니 이제 책을 두 권 모두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가 있었고, 그에게 건너갔다. 놀랍게도 그가 읽으려고 꼽아 놓은 책이라고 했다. 한 눈에 책을 알아본 것을 보니 빈 말은 아니지 싶다.


읽고 나서 “마음의 병은 <억압에 대한 반역>이므로 <정상>”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가? 

그럴 수 있겠다. 

아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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