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ㆍ박희정ㆍ홍세미
오월의봄
2023년 4월 3일
이주노동자를 홀대하기로 말하자면 사우디도 빠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십 수 년을 살면서 남의 땅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절감했다. 그나마 나는 그 중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도 그곳을 떠나오고 나서 다시는 그쪽을 향해 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비자 받고 입국하기가 까다로운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내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데도 출국 비자를 받아야 하는 곳이니 말이다.
사우디는 입국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스폰서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입국해 거주비자를 받으면 여권을 스폰서에게 맡겨야 하던 때도 있었다. 스폰서의 동의가 없으면 계좌를 만들 수도 없고, 가족을 초청할 수도 없고, 출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직장을 옮길 수도 없고, 스폰서가 출국을 결정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 가사노동자는 물론 이주노동자 절대 다수가 저임금에 시달린다. 메디나에서 만난 청소부들은 120달러 월급을 받고 축사만도 못한 곳에서 살았다. 임금체불은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폭력과 학대도 별난 일이 아니다.
한 나라에서 이주노동자에게 문호를 통제하는 걸 다른 나라가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들이 정할 일이다. 하지만 필요해서 그들을 받아들였으면 적어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고 최소한의 보상은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지적은 사우디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절대다수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사우디는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민주국가라는 우리는 그보다는 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남의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십 수 년을 살게 되고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했는지 실상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최근 수 년 사이에 제도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평가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이주노동자를 도구로만 인식하고 있다. 수십 년을 정착하고 살아도 그들은 뿌리 없는 이방인일 뿐이다.”
미등록 이주자(불법체류자)는 일단 제쳐두고 절차를 밟아 입국해 곳곳에서 부족한 인력을 대신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나 이주노동자 출신의 귀화인들은 그들에게 부여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마스크도 재난지원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정해진 의료보험료를 꼬박 내면서도 젊어서 병원에 갈 일 없고 바빠서도 가지 못하면서도 건강보험을 좀먹는 먹튀 대접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같은 일을 하면서, 아니 힘들고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낮은 임금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겨야 했다. 임금은 그들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 우리가 필요해서 고용했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적법하게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이럴진대 미등록 이주자들의 삶은 더 말해 무엇 할까. 그들은 불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니 돌려보내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정을 모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미등록 이주자가 그렇게 많은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 정부에 귀결된다.
우리나라가 이주노동자를 받기 시작한 것은 산업연수생 제도가 도입된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이 제도는 해외에 직접 투자했거나 기술이나 산업설비를 수출한 우리 기업이 현지에서 채용한 직원들을 한국에 데려와 연수시킬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최장 연수기간이 2년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는 다시 현지 기업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노동자가 아니라 연수받으러 온 직원이니 연수 수당만 지급하면 되었다. 대우가 말도 되지 않을 만큼 낮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이 제도가 당초 의도와 달리 이주노동자를 저임금으로 부려먹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허울만 산업연수이고 애당초부터 이를 이주노동자를 저임금으로 부려먹겠다는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제도가 폐지된 2000년대 후반까지 노동력 착취가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그들이 근무지를 이탈해 미등록 이주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이주노동자들은 무력한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자행한 인권침해와 노동착취에 저항했고, 오랜 투쟁 끝에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합법화시켰다. 이 책은 합당한 대우를 받는데 필요한 합법적인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 수십 년 노동활동가로 살아온 이주노동자들의 구술을 우리 활동가들이 정리해 펴낸 것으로, 이 책의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차별에 맞서 삶을 일궈내는 이주활동가들의 이야기>이다.
마산ㆍ창원ㆍ거제 지역의 이주활동가 여섯 명의 구술을 이 지역 산재추방운동연합의 이은주ㆍ박희정ㆍ홍세미 활동가가 정리하고, 책 말미에 이주와인권연구소 이한숙 소장이 이주노동자들 투쟁의 발자취와 현황을 정리해 해제로 실었다.
이와 같은 수십 년에 걸친 활동가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7년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었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비자를 받고 입국한 이주노동자는 최대 4년 10개월까지 노동이 가능하며, 재신청 하면 다시 4년 10개월간 노동을 할 수 있다. 결격사유가 없다면 대략 10년 정도 한국에 거주하며 노동 할 수 있다. 싼값에 부려먹겠다는 산업연수생제도에 비해 이주노동자를 정당한 노동자로 대우하겠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제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의 한국 정착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어서 가족 동반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이직이 제도상으로는 허용되지만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고 노동조합을 비롯한 정치적 활동도 어렵다. 한국어 어학시험을 통과해야하는 조건도 있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나 인권단체에서는 이 제도가 불합리하다면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나는 노동법이나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제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분개했던 부당한 대우와, 그때 생각했던 바람직한 이주노동자 정책,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우리 실상, 그리고 독일에서 역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고 자식의 경험까지를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직면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을 인구문제라고 꼽는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이십 년도 넘었다. 그 해법 중 하나가 이민정책이고 그것은 이주노동자 정책과 맞닿아있다. 이민이나 이주노동자 정책, 즉 문호를 열 것인지, 연다면 얼마나 활짝 열 것인지는 당사국의 국익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제삼자가 시비 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자식이 독일에서 공부하고 그곳에 정착한지 이십 년이 되어간다. 처음 유학 갔을 때만 해도 조금은 융통성 있던 언어 정책이 매우 강화되어 이제는 언어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시 자격조차 얻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이민 문호가 좁아졌다기보다는 언어의 중요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우리 법무장관은 용접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우리말을 잘하는 사람을 더 우대하겠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도 아니고 거주이전자유의 문제도 아니다. 남의 나라 정부에 대고 나는 거기 가서 살아야겠는데 너희가 왜 안 받아주느냐고 시비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민 자격도 국익에 최적화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민을 받아온 국가들의 경험에 따르면 이민자가 가진 기능이나 기술보다는 언어능력이 사회발전을 이루기 위한 사회통합에 더 결정적이더라는 것이다.
자식을 유학 보내면서 만약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한다면 국적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기를 권했다. 먼저 그곳의 좋은 시민으로 그 사회에 기여하면서 살기를, 그러면서 기른 역량을 조국을 위해서도 쓸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권자가 돈을 벌어 언젠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보다는 그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그 사회에 기여할 사람을 선택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냐.
정리하자면 이민을 어떤 사람을 얼마나 어떤 조건으로 받을지는 해당 국가가 정할 일이다. 그렇게 정해서 이민을 받았다면 그 사람을 자국민과 동등하게 대접하는 것이 옳다.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고 동일한 의무를 요구하면 된다. 우리나라라면 최저임금과 휴일 및 연장 근로수당과 복지를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라는 것도 명심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자국민보다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사회통합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이 하나씩 입증되고 있으니 그들이 빠르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문화에 관한 것은 나도 혼란스럽다. 자기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까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집단적으로 발현되어 사회통합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물론 순수성보다는 다양성이 사회를 더욱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주민 고유의 문화를 허용하는 것이 원리적으로는 맞을 것이다.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같은 전염병으로 가축이 몰살하는 것은 축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품종을 극단적으로 일원화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양성을 포기한 결과라는 것이지. 다양성을 잃지 않으면서 집단문화가 사회통합을 저해하지 않는 선을 찾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니 적절한 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책에서 언급된 요청 사항 중 이주노동자 자녀에게 자국의 언어를 교육하는 것이 들어 있던데, 이런 관점이라면 오히려 장려해야할 일이 아닌가한다.
이런 조건이 지켜진다면 이직 허용 정도는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겠다. 사우디에서도 이주노동자를 선발해 데려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데, 데려오고 나면 근무지를 이탈해 난감한 경우를 당하는 게 비일비재하다. 물론 채용조건과 다르게 대접한다면 그런 결과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자국민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조건이라면 이주노동자를 초청한 기업과 맺은 고용계약기간 동안 이직은 허용하지 않되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유롭게 이직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이 눌러앉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걱정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눌러앉는 걸 왜 걱정하나. 오히려 갈까봐 걱정해야 하는 일이 아니냐. 우리 고유의 민족전통과 문화가 순수성을 잃을까 걱정하는 이도 있겠다. 그런 이들이 있다면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이 허상이라는 것을, 우리 문화라고 생각하는 북촌의 한옥과 전래음식이라는 한정식이 모두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꿈 깨라는 말이다.
이주노동자의 고단한 실상을 고발하는 책을 읽고 정리한다는 것이 엉뚱하게 이민 정책을 논하는 글이 되었다.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뭐 어떠랴, 내가 책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데. 보태준 것도 없는 사람들이 시비 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