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준
푸른역사
2016년 9월 23일
며칠 전 이주노동자 이야기가 담긴 <곁을 만드는 사람들> 리뷰 올려놓은 것에 한겨레 조일준 기자가 리뷰에서 언급한 내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의외였다. 지금까지 오천 자가 넘는 내 리뷰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별로 없고, 더군다나 리뷰에서 밝힌 내 생각에 대해 반응을 보인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조일준 기자를 만나고 그의 서명이 담긴 저서를 받는 호사를 누렸다. 그가 보내준 이 책을 읽다가 내 리뷰에 달아놓은 그의 반응이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 이주민 서사의 연장선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인 ‘이주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호모 미그란스>는 ‘유목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호모 노마드>의 후속 개념인 셈인데 그것은 ‘이주’라는 것이 ‘주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호모 노마드>를 기동전(機動戰), <호모 미그란스>는 진지전(陣地戰) 성격이 강하다고 말한다.
인류의 이주사(移住史)로 책을 시작한 저자는 사냥에서 목축을 거쳐 농경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한다. 먹을 것이 떨어질 때마다 짐승을 사냥하러 나가는 대신 짐승을 키우면서 새끼를 낳게 하고, 농사를 시작해 식량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생존의 불확실성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집단정착생활로 이어져 문명이 생기고, 사적 소유 개념이 생기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나뉘었으며, 국가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인류사’를 ‘이주의 역사’로 풀어낼 생각으로 이 책을 쓴 줄 알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저자의 시선은 ‘당면한 이주민 문제’를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비로소 내 리뷰에 달아놓은 댓글의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세계는 난민을 포함한 이주민 문제로 심각한 갈등에 처해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이주를 원하는데 이주하고자 하는 나라에서는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그 나라에 들어온 이주민은 원주민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갖은 차별에 시달리고 급기야는 생존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이주를 원하는 이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지, 이주민에게 원주민과 동등하게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지, 이주민의 집단 정체성을 허용해야 하는지 묻는다.
저자는 오늘날 이주와 관련된 국제법이나 협약에서 합의된 것으로 간주되는 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개별 국가는 외국인 입국 허용, 거주 관리, 국경 보호, 국적을 부여하거나 거부, 국가 안보, 불법입국 통제와 같은 권리를 갖는다. 또한 국제법규 준수, 국제인권규범 존중과 같은 책임이 있다. 이주자 역시 기본권을 모두 보장받아야 하며, 체류국의 시민권이나 국적이 없는 이주자들도 해당 국가의 국민과 마찬가지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이후 펼쳐지는 저자의 서술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틀이 되었다. 이주민에 대한 내 생각이 여기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앞선 <곁을 만드는 사람들>의 리뷰에서 우리나라가 직면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을 인구문제라고 꼽고 있으며, 이민정책이 유일한 해법이 될 것이고, 그것은 당사국의 국익에 따라 결정할 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저자는 독일과 미국의 폭발적인 성장이 이주민의 풍부한 노동력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민문호를 좁히라는 요구가 나온다고 말한다.
“2015년 독일 베텔스만 재단은 인구 구조 전망 보고서에서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는 이주민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노동력 수요를 충당하려면 매년 50만 명의 새로운 이주노동자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 당시 뜨거운 이슈였던 시리아 난민 수용문제 때문에 이주민이 매우 필요하다는데 동의하면서도 사회통합이 가능할지 의문을 표하는 독일인들도 적지 않았다. 미국도 다르지 않았다. 2004년 이민 정책이 후퇴하는 것을 우려한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2백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온 이주민 때문에 미국이 엄청난 이익을 얻었고 그로 인해 미국이 젊고 역동적이고 혁신적일 수 있었지만 이제 그 시스템이 망가졌다’면서 이민정책 개혁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미국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주민들이 주류 사회에 동화되어야 한다’던가 (2008년 미국 이민국) ‘미국이 이주민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애국적 동화가 필요하다’며 (2016년 헤리티지 재단) 이민정책의 축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면 이주민의 혜택을 누린 그들이 이주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이주민 때문에 내국인 노동시장이 위축된다던가, 이주민 때문에 사회 안정성이 위협을 받는다던가, 장기적으로 이런 영향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사회통합을 저해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그런 우려를 열거하며 과연 그것이 합당한 우려인지, 아니면 기우인지 하나씩 판단하고 있다.
저자는 2008년 미국과 유럽에서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침체가 길어지면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졌다고 말한다. 이주 수용국의 시민, 특히 경제적 하위계층이 이주노동자에게 느끼는 이런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생활임금의 하락이나 일자리 상실의 불안감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적 공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주노동자가 원주민 노동자의 삶을 위협하는 게 사실인지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미국 노동시장을 계량 분석한 두 경제학자의 결론은 일관되게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쿠바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조지 보하스는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이주자 유입이 미국 노동자 전체 임금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 5-10% 임금 저하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데이비드 카드는 이주자 유입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저자는 서로 상반된 두 이론을 소개할 뿐 그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있다. 그만큼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사안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경제학자의 이론이 이에 대해 정확히 반대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내가 나름의 판단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다만 머리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데 기울어져 있을 뿐. 이에 대한 견해를 다시 살펴봐야겠다.
이주민 때문에 사회 안정성이 위협 받는다는 예로 2015년 일어난 파리 테러를 드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한참 혈기왕성할 나이의 이주민 2-3세들이 사회적 기회를 충분히 그리고 공정하게 얻지 못하거나 해당 사회에 편입되지 못할 때 매우 위험한 안보위협의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낮은 범죄율을 열거하며 범죄율이 그렇게 낮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그 우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법을 어긴 이주민들은 형사처분과 별개로 단지 이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강한 정서적 거부감이 개입된 여론재판의 도마에 오르기 십상이다. 여기에는 이주민들이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더 클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2008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거주자 가운데 이주민은 성인 인구의 35%를 차지했지만 감옥에 수감된 성인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7%로 이보다 훨씬 적었다. 2007년 미국 전역에 대한 연구에서도 수감된 인원이 가장 낮은 집단은 이주자들이었다. 불법체류자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18-39세 히스패닉 남성만 놓고 봤을 때도 원주민의 수감율은 3.5%였지만 이주민들은 0.7%로 원주민의 1/5에 불과했다. 이주민들은 스스로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이어서 성취와 성공에 대한 야망이 높은 만큼 범죄를 저지르려는 경향이 적다. 미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다고 해도 1년 이상 징역형을 받는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추방당할 수 있다. 불법체류자는 사소한 위법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사법당국과 접촉하게 되므로 범죄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2014년 한 해 동안 전 국민 100명 가운데 크고 작은 범법행위로 최소한 형사입건 된 사람은 3.5명에 이르렀다. 반면 이주민 범죄율은 1.58%로 내국인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논리로나 수치로나 이주민의 범죄율이 높아서 사회 안정성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원주민이 이주민으로 인해 혜택을 입었으면서도 이주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까닭 중 다른 하나는 이주민이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주민을 받아들인 집단에서 사회통합 정책의 일차적 목표는 동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회통합은 절대불변의 진리인가? 그래서 사회통합에 저해되면 이질적 집단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사람이 소속돼 살아가는 집단이 바뀌었다고 해서 자신의 주관적 정체성도 한 순간에 싹 바뀌는 건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이주민 정책에서 동화 방식으로는 집단 구성의 다양성과 각 집단의 정체성이 존립할 근거를 잃는다는 말이다. 아울러 통합이라는 표현이 아주지 집단의 고유한 특성과 전통을 무시하고 기성 사회의 맞춤형 구성원으로 획일화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회통합의 방식으로 동화냐 다문화주의냐를 논하기에 앞서 통합이라는 표현 자체가 갖는 함의부터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통합이 필요한지 여부를 묻지는 않는다. 나 역시 사회통합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통합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물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는 국가가 이주민의 귀화를 유도하는 것은 그들의 다름과 본디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국 사회 안으로 흡수 동화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래서 귀화는 경우에 따라 가장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사회통합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귀화를 드러내놓고 유도하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귀화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받게 하는 것 역시 강제적인 사회통합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이 사는 독일의 경우 영주권자나 독일 국적자나 독일 안에서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금도 독같이 내고 연금도 똑같이 받는다. 그러나 독일을 벗어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독일을 제외한 유럽연합 국가에서는 독일 국적자는 자국민으로 대우하지만 독일 영주권자는 단지 외국인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행하는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업을 영위하거나 직업을 가질 때 비로소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까지 영주권자를 시민권자와 동등하게 대우해달라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
시민권자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새머스는 시민권의 개념을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법률적 시민권ㆍ권리로서의 시민권ㆍ소속으로서의 시민권ㆍ정치적 참여로서의 시민권이 그것이다. 저자는 같은 시민권을 가졌으나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례로 알제리 무슬림들을 들고 있다.
“식민지 초기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알제리 무슬림들은 프랑스 국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지 프랑스 시민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외국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밀한 의미에서 시민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후 엄밀한 의미의 시민권을 허용하는 것으로 개선되기는 했으나 무슬림들이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무슬림이기를 포기해야 했다. 다음에는 무슬림이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시민권을 얻을 수는 있었으나 선거에서는 차별을 받았다. 그것이 내란으로 이어진 중요한 원인이었고 결국은 알제리 독립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최근 들어 이주자 사회통합이 기존의 동화 방식이 아니라 다문화주의와 공존의 이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 더욱 분명해졌으며, 더 나아가 이주자 고유의 정체성도 함께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다행한 일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은 이와 동시에 서구 보수 우파 진영을 중심으로 자국 정체성 유지와 사회적 안정성, 국가안보 등의 이유로 이주노동자 뿐 아니라 난민에 대해서까지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국민들의 이주민 피로증도 커지고 있다. 경제 선진국 24개국 17,5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인 이주자들이 자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사람은 21%에 그쳤고, 이주민 때문에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워졌다는 자국민은 45%에 달했다. 염려스러운 일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적대적 타자에게도 복수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말하지만, 그 스스로도 이런 무조건적인 환대가 현실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은 데리다에게서 빌려온 환대의 개념을 적극적이고 당위적인 공공의 윤리로 연결시키면서 이주민을 받아들이는데 동화나 적응 같은 조건을 내걸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실 우리는 그런 의논을 할 처지가 못 된다. 우리 실상은 거기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2016년 3월까지 우리가 22년 동안 난민을 받아들인 것은 588명에 그쳤다. 신청자와 비교했을 때 난민 인정율은 3.8%에 지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행정소송을 통하거나 가족결합이나 재정착 사유로 난민 인정받은 경우를 제외하고 법무부가 자발적으로 인정한 난민은 1.9%에 그친다. 더욱이 난민 신청자는 점점 늘어나는데 인정율은 점점 더 떨어진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주민의 인권을 이야기하는데 이주민을 인구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각하자는 말은 매우 이기적이라고 비난을 받아도 마땅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염려해 덮고 넘어가기엔 인구문제의 심각성이 너무 크고 이주민 말고는 달리 해결방도를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정부가 이주민에게 좀 더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들어오는 것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 떠나는 것을 걱정할 처지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이주민을 받으면 그들을 우리 국민과 동등하게 대접해야 한다.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고 동일한 의무를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주민 유입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그것은 앞에서 저자가 논리와 데이터로 그것이 기우였음을 증명했다. 이제는 사회통합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논쟁할 때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에 이르기는커녕 거론조차 되지 않은 일이니 우선은 입증된 사실과 논리를 바탕으로 이주민 정책을 세우고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이주민의 인권은 새삼 따질 것이 없겠다.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것이 결국은 이주민의 인권 신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