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청색종이
2023년 6월 29일
오랜 객지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물러서고 덜어내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은퇴할 나이가 훨씬 지나도록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으니 비록 마지막 수년을 소송에 휘말려 피폐하게 지냈지만 그것마저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돌아와서는 꿈꿨던 대로 책 읽고 글 쓰며 소일하고 있다.
어젠가 누가 무슨 기준으로 책을 고르느냐고 물었다. 그럴 만큼 내가 읽는 책은 중구난방이다. 맥락도 없고 흐름도 없다. 나도 무슨 기준으로 책을 고르는지 몰라 그때그때 다르다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렇기는 해도 긴장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보니 책 한 권 읽고 정리하고 나면 피곤이 몰려온다.
생각지도 않던 기회가 생겨 많은 이들을 만나고 새롭게 인연을 맺어가고 있다. 있는 인연도 정리해야 할 나이에. 물러서고 덜어내겠다는 다짐이 무색한 일이다. 고단하기도 하고. 그렇게 고단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박일환 시인의 시집이 책상에 놓여 있다.
대충 씻고 편안하게 앉아 몸으로 시를 읽는다. 독서대에 시집을 얹고 멀찌감치 떨어져 가부좌 틀고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읽는다. 이게 무슨 뜻인지,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살필 필요가 없으니 더욱 편안하다. 그저 느껴지면 느껴지는 대로, 느낌이 없으면 없는 대로, 조바심 낼 일도 없이.
“내 안부가 궁금했다며 전화 주신 당신께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새들의 안부를 대신 물어달라 했다
ㆍㆍㆍ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를,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던 참새를 본 게 언제쯤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ㆍㆍㆍ
오늘 또 몇 마리의 새들이 사라졌을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새들의 안부’에서 시인은 잊고 살던 새들을 떠올리면서 메말라버린 삶을 돌아본다. 문득 최근에 본 새가 뭐였지 궁금해진다. 아니 뭘 보기는 했었나? 그러고 보니 주변에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곳이 ‘새가 안사는’ 도시일까, ‘새도 못사는’ 도시일까?
작년 봄, 역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도 몇 달을 그런 생각조차 없이 살았는데. 잉여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리라 마음먹었다. 한 달 남짓 부산에서 노동을 했다.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구인 광고에 나이 제한이 없다고 해서 연락해보면 나이 때문에 안 된단다. 그들이 말하는 ‘제한이 없다’는 나이는 예순 다섯이었다. 그거 넘어가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더라는 말이지. 그저 붙여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달을 보냈다.
노동판에서도 봄은 비껴가지 않았다.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 시작된 일이 꽃비가 내릴 때 끝났다. 그 사이 목련은 절정의 우아함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으로 사그라 들었다. 분명 한 시야 안에 있었는데 두 꽃을 한 눈에 담지 못했다. 화려한 것만 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늦은 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길
벚꽃이 환하다
술이 번쩍 깨는 것도 잠시
몇 발짝 옮긴 단지 한쪽에 목련이
시든 꽃잎 몇 개 달고 있는 게 보인다“
‘3월 마지막 날’에 시인은 환하게 피어난 벚꽃과 시든 꽃잎 몇 개 달고 있는 목련을 한 눈에 담는다. 시인은 시든 꽃도 잊지 않았다. 화려한 것만 꽃인 줄 알았던 나는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던 3월 마지막 날, “형님은 힘이 없으니 다음 현장에 오지 않으셔도 된다”는 소장 아우의 통고를 받았다.
잠시 시인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했다. 국어사전을 너무 사랑해 오류를 보아 넘기지 못하는 사람, 힘없는 이들의 아픔이 내 아픔인 사람, 그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이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 그도 술을 마시고 우스갯소리도 했을 것인데 그의 글에서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복음서’에서 그의 촌철살인 우스갯소리를 들으니 신기하고 낯설다. 그래도 통쾌하다. 비록 그것이 내가 평생 신념을 가지고 지켜온 종교를 비튼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소리 들어서 싼 일이 아니냐.
“낙지볶음을 낙지복음으로 읽는다
나의 오독을 모독으로 받지 마라
세상의 모든 복음서는
제 몸을 보시한 이들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느니”
모독은 무슨, 핵심을 찔렀구만. 십자가 고난이 제 몸을 보시한 것이라는 그의 통찰이 놀랍다.
시인의 집이 굴포천 근처 어디쯤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의 글에서 굴포천을 심심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굴포천’이 아니라 ‘굴포천들’을 노래한다.
“내가 사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
20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혈압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처음 가본 곳
하루 만 보 걷기를 다짐하고 찾아간 곳
ㆍㆍㆍ
이리저리 소식만 듣고 있으면서
아직 가보지 않은 굴포천들은 얼마나 많을까?”
안산자락길이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 서울을 떠나고 생긴 길이니 서울에 돌아오면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니 서대문구청 뒤편 벚꽃길은 출근 때 마주보는 길이었는데도 생기고 수년이 지나도록 한 번을 안 갔다. 돌아와 보니 안산자락길은 사람이 끊어지지 않고 벚꽃길에서는 심심치 않게 공연도 열린다.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뒷산은 헌다한 공원이 되었다. 그 공원 오두막에 앉아 사우디 국립공원보다 낫다며 감탄했다. 이 아름다운 곳이 지척에 있으니 마음껏 그 복을 누리리라 다짐했다.
그 감격과 다짐은 그래도 서너 달은 갔다. 작심삼일보다는 조금 길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격과 다짐에게 민망한 일이다. 작심삼일도 백 번만 하면 한 해가 가는데. 한 번 다시 힘을 내보자. 그런데 비는 왜 이리 내리고 덥기는 또 왜 이렇게 더운가. 힘을 조금 있다가 내볼까? 뭐 시인도 미처 가보지 못한 ‘굴포천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제대로 모르는 판에 나 하나 정도야 어떻겠나.
“책장이 책을 가득 품고 있다고 해서
책장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건 아니다
책이 문자를 가득 품고 있다고 해서
책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건 아니다
책장은 책 부자인 것처럼
책은 문자 부자지만
누군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어주지 않는다면
그냥 저 잘난 부자로 살 뿐이다
ㆍㆍㆍ
서로가 서로를 읽어주지 않으면
저 딱딱한 사물과 무엇이 다르랴”
시인은 ‘읽는 일’에서 누군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주지 않으면, 꺼낸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책은 그냥 저 잘난 부자로 살 뿐이라고 일갈한다. 사람은 어울려 살게 되어 있는데 말이다. 뜬금없이 시인에게 어울려 지내자고 말이나 건네 볼까나.
자정이 넘어가니 손가락이 제 멋대로 움직인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니 시인께서는 그저 별 사람 다 보겠네 그러고 넘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