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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ug 03. 2023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모로

2021년 11월 5일


글은 자꾸 쓰면 늘지만 평생 한 우물만 파는 판사들이 쓰는 판결문은 정말 알아먹기 힘들다. 무엇보다 일반 문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다. 1948년에서 1994년 사이에 대법원 판례집에 실린 판결문 한 문장의 평균 글자 수가 394자였다고 한다. 원고지 두 장이 넘어가야 문장이 끝난다는 말이다. 어느 판결문은 한 문장이 1,394자에 달했다고 한다. 무려 원고지 일곱 장. 문장이 길다 보니 중문과 복문이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고, 그러니 읽기가 부자연스러운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런 판사 중 한 사람이 글을 썼다고 해서 반쯤은 호기심으로 박주영 판사가 쓴 <어떤 양형 이유>를 읽었다. 문장이 매끄럽고 가독성이 뛰어난 글일 뿐 아니라 담긴 의미나 내용에서 오는 감동도 적지 않았다. 그가 쓴 두 번째 책을 오늘 읽었다.


“판결문은 두 번 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졌던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은 법도 문학적이어야 한다고 했단다. 두 번 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어디 법뿐이겠는가. 평생 설계보고서 쓰는 걸 업으로 삼고 살아온 나도 설계보고서를 두 번 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흔들렸던 적이 없고, 가급적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려고 했다. 설계보고서라는 것이 워낙 딱딱한 글이니 그렇게 해서라도 독자가 좀 덜 고단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름의 친절을 베푼 것이지. 그렇다면 난삽하기 이를 데 없는 판결문은 매우 불친절한 글인 것이고.


저자의 글은 읽기가 편하다. 읽기가 편하니 이해도 쉽다. 읽기 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아름다운 글이라면 저자의 글 역시 아름답다. 그런 그가 후배들의 글을 보면 주술관계를 잘 살피고, 동어반복을 피하고, 어지간하면 접속사를 빼고, 적절히 자르고, 그렇다고 단문만 지나치게 나열하는 것은 피하라고 권한다. 내 경험으로도 그것만 잘 지키면 문장이 한결 읽기 쉬워진다.


이번에 내가 번역한 책은 문장이 길어서 번역을 해놓고 나면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되질 않아 문장을 여러 개로 잘라 번역했다. 편집자가 떨떠름해 했는데 그냥 모른척했다. 독자 읽으라는 책인데 독자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게 쓰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읽기 편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누구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책 읽어주는 것처럼 편안했다고도 하고, 누구는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고도 했다. (누가 머리맡에 골치 아픈 책을 두겠나.)


저자는 문장에 대한 견해를 피력해나가는 글 말미에서 “저자는 언어와 생각을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계속해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바른 생각을 할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하도 좋은 글 솜씨를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인사들이 사방에 널렸으니 당연한 말을 듣고도 배알이 꼴린다.


가해자와 피해자


형사법정의 원고는 국가를 대리한 검사이지만 궁극적으로 피해자를 대리한 셈이니 결국 형사법정의 주인공은 가해자와 피해자이다. 그런데 모든 사안이 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가해와 피해 어느 쪽에 있는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바로 가해자의 가족들이다. 엄밀하게 보면 이들도 피해자다. 우리 사회가 가해자의 가족에게 가해자와 같은 책임과 비난을 가한다면 이는 연좌제와 다를 바 없다. 가해자의 가족은 위기 가정이다. 사랑하는 이가 가해자가 된 것 자체가 큰 위기인데, 더 나아가 생계가 어려워지고 주변의 시선이 차가워지며 여러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가해자의 가정이 파탄 나고 불안정해지면 수용자의 사회 복귀는 어려워지며 당연히 재범률이 높아지고 수용자의 자녀는 대물림하여 죄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해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당방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정당방위 말고도 피해자가 도발해서 피치 못하게 위해를 가했다고 변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 주장을 다음의 논리로 일거에 무력화시킨다.


“범행 동기와 양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좋은 사람을 죽이든 나쁜 사람을 죽이든 살인은 똑같이 비난 받아야 한다. 피해자의 윤리성에 따라 형벌에 차이가 있을 수는 없다. 가해의 원인을 밝히는데 피해자의 서사가 필요하지만, 피해자의 서사는 가해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그 어떤 이유로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가 해를 입힐 수밖에 없거나 ‘가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필연적 가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해를 용이하게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협조한 피해자는 없다. 피해자가 어떻든 가해자가 결의하지 않으면 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형제 폐지 찬반


한동안 재심이 화제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오판의 결과로 무기수나 장기수가 되었던 사람들이 재심의 기회를 얻어 사실을 밝히고 억울한 옥살이를 벗어났다. 무기수는 살아있으니 그럴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사형수는 설령 누명을 벗는다 해도 사형이 집행되고 나면 바로 잡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오판 가능성은 사형제 폐지 논리가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논리가 “오판을 없애거나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면 사형제를 유지한다는 의미”라며 이 주장은 오히려 사형제 옹호 논리라고 말한다.


“사형제 존폐의 핵심 화두는 국가권력이 생명권을 침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사형제 옹호론은 피해자의 생명은 회복될 수 없고 생명권에는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살인범을 죽인다고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살려둔다고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극악한 범죄자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논리를 반박하기는 어렵다. 피해자 유족의 극심한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까지는 나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저자는 사형제 존폐 논의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하나 있다면서 ‘형벌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묻는다. ‘교도소’는 ‘범죄자를 교화해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시설’이다. 형벌을 가하는 장소가 범죄자를 교화하는 시설이라면 형벌은 결국 교화에 목적을 둔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 교화할 수는 없으니 사형은 형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형은 교화라는 형벌의 목적이 전무한 잔혹한 형벌인 셈이다. 저자는 “사람이 참으로 선하게 되었을 때 죽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는 사형수 전담 교도관의 술회를 전한다.


이와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형제 존폐 논의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범죄자 거의 대다수가 폭력과 집단 따돌림, 빈곤 등에 집중적으로 노출돼왔다는 점이다. 사형은 이들을 없앰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완벽히 은폐하는 형벌이다. 모든 일을 사회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그러면서 “사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피고인을 교수대로 보내는 것인지, 피고인이 목숨을 내놓기만 하면 정의는 실현되고 남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구원되는지, 어떤 피해자들은 사형이 아니라 입법이나 사회적 통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과 같은 불행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사형제 옹호론에 마음이 기울어 있는 나로서도 저자가 지적한 문제점 어느 것 하나 반박하기가 어렵다.


자살방조미수


세상에 별 범죄가 다 있지만 ‘자살방조미수’라는 죄목은 처음 들어봤다. 죄목이 낯설다고 해도 대충 어떤 범죄인지 그려지지만 ‘자살방조미수’라는 죄목은 범죄인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자살미수라면 자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범죄가 되나 싶고, 자살방조라면 자살하는 걸 알면서도 두고 봤다는 것이 아니냐.


자살을 선택할 정도의 상황에 몰린 전혀 초면의 남성 셋이 모여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고 그 중 정신을 잃었던 남성 하나가 병원에 실려 갔다가 의식을 찾고 사라져버리자 나머지 둘이 자살방조미수 죄목으로 붙잡힌 것이다.


사정을 알아본 저자는 그들의 사연을 듣고 고민에 빠진다. 정신을 잃었던 이가 죽지 않고 사라졌으니 집행유예를 내리는데 문제가 없지만, 그들을 풀어줬다가는 다시 자살을 시도할 이유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다행히 붙잡힌 두 사람에 대한 탄원서가 줄을 잇자 본인들도 삶의 의지를 불태워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다. 그러면서 선고를 마치고 별도로 준비한 ‘피고인들께 드리는 당부’를 읽어 내려간다.


“저희는 기록을 통해 여러분들의 삶이 대단히 고단하고 힘겨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고 마음먹게 한 깊은 고뇌와 참담한 심정을 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삶이 비루하고 세상이 엉망이어도 그것이 생명을 버릴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보다 존귀하며, 여러분은 자신에게 만큼이나 여러분이 관계 맺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들 때마다 여러분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남겨지게 될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읽을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도 찔끔 흘렸다.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던 ‘남은 자의 고통’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 읽었기 때문인지 지금은 덤덤한데 저자가 인용한 마지막 말 한 마디가 가슴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가난이 가장 잔인한 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다움을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깨달음


“재판은 오직 해당 사건에만 효력을 미친다. 어떤 범죄도 미리 막을 수 없다. 형사 재판이 단죄하는 건 국가나 사회가 아니다. 이미 발생한 오직 한 사건, 한 개인 뿐이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데 그 사이에 법 감정에 변화가 있고 재판부도 사안의 중대성을 새롭게 인식했다고 해서 갑자기 형량을 올려 선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독 내가 속한 재판부만 특별히 높은 형량을 선고할 수 없고, 법적 안정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급심에서 과감한 양형을 해도 상급심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많다. 그 결과 대개 범죄의 양형이 대체로 낮은 쪽에 근접,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의 고문이 문제된 사건에서 판사는 민주주의는 테러리즘에 대항하면서 한 손을 뒤로 묶고 싸울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경우에만 테러리즘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에 오래 있으면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트일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다. 처음에는 선명하게 보였던 경계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졌다. 그것이 실재였기 때문에 그렇다.”


“악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수단화하고 사물화한다는 것이다. 온갖 궤변과 요설로 치장해도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 앞에 다른 기치를 내세우는 것은 악일 가능성이 높다. 형사 법정에서 악인을 계속 보다 보면 인간은 과연 바뀔 수 있는 존재인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나아가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참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지 못할 범죄가 있는가, 어떤 태도를 진정한 사과라고 봐야 하는가, 어떤 경우에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는 피해자의 온전한 권리인가, 가해를 용서한다는 게 애당초 가능한가, 피해자의 용서가 형을 낮추는 결정적인 요인인지도 잘 모르겠다.”


“용서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사죄를 할 수는 있지만 용서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용서는 용서하는 자의 몫일뿐이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이제 됐다고 웃으면서 말할 때까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사죄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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