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Aug 08. 2023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거의 모든 것

이범준

궁리

2022년 3월 4일


비현실적인 대법원의 심리 건수


사회생활 하는 동안 송사를 겪은 일이 몇 번 되기는 했어도 사건이 대법원은커녕 고등법원까지 올라간 경우도 없다. 삼심제도라고는 해도 하급심에서 내려진 판결이 상급심에서 뒤바뀌는 경우가 별로 없기도 하고, 송사라는 것 자체가 끔찍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1심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학자의 필화사건을 지켜보면서 대법원이라는 곳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학자가 쓴 책과 관련해 스스로 피해자라고 여긴 이들이 학자를 명예훼손으로 형사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2심에서는 명예훼손을 인정해 벌금형을 선고했다. 결국 이 사건은 3심까지 올라갔는데, 대법원에 상고하고 6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직 판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판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나 역시도 대법원 판결이 그렇게 늦어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저자는 대법원이 한 해 동안 처리하는 사건이 무려 7만여 건에 이른다고 말한다. 대법관은 14명으로, 이 중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이 사건을 처리한다.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은 먼저 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판결하는데, 여기서 만장일치로 판결된 사건은 그것으로 심리를 종결하고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한 사건은 전원합의체로 넘어간다. 이 책의 주제인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2/3 이상이 참여하고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는다. 소부에서 만장일치로 결론나지 않은 사건은 전원합의체로 넘어간다고 하지만 실제로 전원합의체가 다루는 사건은 특별히 중요한 20~30건에 한정된다. 이는 전원합의체에서 고른 사건이 아니면 어떻게 하든 소부에서 결론을 내린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어느 학자의 명예훼손 사건은 소부에 머물러 있는지 전원합의체로 넘어간 것인지 궁금하다.


편의상 3개의 소부로 나누어 심리를 속행한다고 해도 한 해 7만 건이면 한 소부가 하루 100건 넘게 심리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런 숫자가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동안 대법원 업무가 과중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숫자를 보니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틀을 바꾸지 않고서는 해결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소부에서 결론을 내린다는 말은 소수의견을 가진 대법관이 다수의견에 승복하고 만장일치를 만든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런 흐름은 전원합의체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이 되지만 재판관의 일원으로서보다는 법의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춰 판결한다고 말한다. 국민의 일상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판결일 경우에는 다수의견이 압도적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대법원장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종래 견해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논쟁이 치열한 사건에서 아슬아슬하게 판례를 변경하면 되레 논란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찬반이 팽팽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인데도 일방적으로 판결이 나는 경우가 더러 있던데 그것이 바로 이런 경우인 모양이다.


변호사의 성공보수가 유발하는 부조리


형사소송에서 변호사가 승소하면 성공보수를 지불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과에 대한 보상이라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이라고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법정의의 측면에서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다. 형사소송이란 죄를 묻는 것인데 변호사가 어떻게 변호하느냐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다면 그 법을 어떻게 정의로운 법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2015년 대법원에서 대법관 전원일치의 판결로 형사소송의 성공보수 무효 판례를 남겼다고 소개한다. 법에 무지한 나로서는 그 판례로 인해 우리나라의 형사소송 성공보수가 실질적으로 모두 불법화되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심정적으로 이 판례를 지지한다.


“우리나라의 형사소송은 수사나 재판의 결과가 상당한 권한을 가진 법관이나 검사에게 달려있다. 이에 따라 변호사는 성공보수를 받기 위해 수사나 재판 담당자에게 영향을 행사하려 들 수 있고, 의뢰인은 변호사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성공보수 때문에 변호사가 부적절한 방법으로라도 판결을 유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국가형벌권 실현하는 수사와 재판’의 결과를 놓고 단지 의뢰인에게 유리한 결과라는 이유로 이를 성공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상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사회적으로 타당하지도 않고 변호사 직무의 공공성과 윤리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성공에 해당하는 수사와 재판 결과가 부적절한 방법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모면한 것이라면 사법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변호사는 성공보수를 위해 불법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의뢰인은 그것을 알고도 부추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성공보수 제도가 변호사 100년 역사에서 인정받은 것은 변호사가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담보로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성공보수를 받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걸 자인한 것이니 말이다.


저자는 변호사의 성공보수 계약은 일본과 한국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는 해도 일본에서도 형사사건에 성공보수 약정이 있기는 하지만 복잡한 사건에서 무죄를 받아도 성공보수는 100만 엔 정도인데 이는 형사재판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은 연방변호사법에서 성공보수 약정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금지였다. 변호사라는 직업과 지위에서 있을 수 없는 계약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에서는 민사사건에서만 성공보수 약정이 가능하고 형사사건과 가사사건에서는 금지되어 있다. 가사사건에서 금지하는 것은 이혼이나 별거를 부당하게 조장하고 당사자 사이의 화해를 방해하거나 배우자와 자녀 생활비로 쓰여야 할 자금이 변호사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법과 현실의 괴리


시간이 지나면서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법의 취지는 알겠으나 그 취지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경우로 이혼소송을 들 수 있다. 아직까지는 유책 배우자가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법이 만들어진 때가 유책 배우자가 대부분 남성인 시절이었으니, 남편의 잘못으로 고통 받는 부인들이 이혼을 당해 실질적으로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운 상황에 몰리지 않게 하기 위한 처사였을 것이다.


이혼에 대해서는 유책 배우자가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유책주의와 실질적으로 가정이 파탄되었다면 이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파탄주의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유책주의는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것이 현실인 만큼 만일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널리 허용한다면 파탄에 책임이 없는 여성 배우자가 이혼 후의 생계나 자녀 부양 등에 어려움을 겪는 등 일방적인 불이익을 입게 될 위험이 크므로 유책인 남성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불허함으로써 여성 배우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파탄주의는 혼인생활이 회복 불가능한 파탄 상태라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니 이혼을 시켜주고 대신 혼인이라는 계약을 파기한 책임을 따로 묻자는 것이다. 유책 배우자라는 이유로 이혼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부부가 서로 승소하기 위해 상대방의 귀책사유를 부각시킬 수밖에 없고, 이혼소송 과정에서 서로가 갈등과 대립을 들추어내어 그에 관한 책임 공방을 벌이게 되고, 아울러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악감정을 쏟아내므로 부부관계는 더욱 적대적으로 되어 이혼 과정에서 갈등 해소, 이혼 후의 생활이나 자녀의 복지 양육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을 모색하는데 소홀하게 된다. 법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파탄된 혼인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법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파탄된 혼인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옳다. 앞서 언급한 대로 유책주의가 고통을 당한 측에서 이중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라면 파탄주의에서 주장하는 대로 이혼을 허락하고 혼인을 파기한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면 굳이 유책주의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하지만 이 경우 별도의 소송을 벌여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피해자가 얼마나 될까. 힘없는 피해자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혼을 허락하고 책임을 별도로 묻자는 주장은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노동조합 설립목적과 조합원의 자격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다. 모든 조직은 조직 설립의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조직이 목적에 부합하는 일만 해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럴 경우 조직에 관련된 법의 보호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의 활동범위에 대한 내 인식이다. 문제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에 해가 되는 정책을 펼친다면 이에 반대하는 건 정당한 활동범위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에 해가 되는 정책을 펼치는 정권이라는 이유로 퇴진을 요구하는 것을 정당한 활동범위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경계가 생각만큼 선명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 경우는 활동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노동조합의 정권퇴진운동이 못마땅하다.


조합원의 자격도 그렇다. 몇 년 전에 더 이상 교원이 아닌 사람도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전교조 규약 부칙이 교원노조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된 일이 있다. 교원노조법에 따르면 교원 신분을 상실한 경우 중앙노동위 재심판정이 나오기 전까지만 조합원이고 여기서 해고가 인정된다면 이 절차 다음으로 간다고 해도 조합원이 아니다. 하지만 전교조 규약 부칙은 부당 해고된 교원은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헌법재판소는 “해직자를 노조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원노조법은 자주성과 주체성을 확보하여 교원의 실질적 근로조건 향상에 기여한다는데 노동조합법의 입법 목적이 있기 때문에 교원노조의 조합원을 재직 중인 교원으로 한정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부당해고는 대체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러니 그런 경우에 닥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노동조합에서 그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재심판정에서 해고가 인정된다면 더 이상 조합원이 아니라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부당해고 여부를 다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합원의 자격을 유지하는 게 타당할 것이고. 물론 정당한 해고를 부당해고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틈이야 어느 법률에도 있는 것이니 그것을 이유로 재심판정을 기점으로 조합원 자격을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때로는 노동조합을 지원할 목적으로 그 사업장의 노동자가 아닌 사람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던데, 그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노동조합의 선택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경우까지 노동조합의 활동영역으로 인정받겠다는 건 지나쳐 보인다.


불법체류 노동자의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조합원의 인정 범위라는 측면에서는 이와 맥락이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한 논의에서는 비록 불법체류자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을 제공하고 있으니 조합원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선다. 심정적으로는 인도적 차원에서 조합원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법 집행의 측면을 쉽게 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출입국관리법은 취업자격 없는 외국인의 고용이라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지 취업자격 없는 외국인이 사실상 근로를 제공하고 있는 경우 그것을 이유로 고용계약을 당연히 무효라고 할 수 없으며 근로자단체를 결성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규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불법체류 노동자도 노동조합 활동을 허용한다면 취업자격 없는 외국인의 고용을 제한하고 강제퇴거 등의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다른 한편으로는 취업자격 없는 외국인의 노조 설립 및 활동을 보장해주어야 하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노동조합법이 출입국관리법보다 우위에 있는 상위법이 아니다.”


선거 후보자의 거짓말


나는 법이 논리적이어서, 하지만 꼭 논리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법에 매력을 느낀다. 엔지니어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법률 관련 서적을 자주 읽는다. 물론 그것이 직업이 되면 몹시 고달프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던 차에 이범준 저자가 관련 서적을 냈다고 해서 목록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가 쓴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모든 것>과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두 권을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다. 법조 기자를 하다가 법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프로 의식으로 무장된 저자가 권순일 퇴임 대법관의 자문을 얻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이 책을 마저 읽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이 책에서도 언급한 선거 후보자의 거짓말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하는 항목이 바로 지금 권순일 전 대법관이 재판거래 당사자로 지목된 이유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권순일 전 대법관의 판단이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재판거래 의혹이 생각나면 그가 내린 판단이 혹시 재판거래와 관계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말과 논리는 그저 허울에 지나지 않고 속내는 그저 여느 속물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끝까지 읽기는 했다. 문제가 되는 선거 후보자의 거짓말이 중요 관심사 중 하나이니 그 부분을 건너 뛸 수도 없는 일이라 나름 객관적인 입장에서 읽어보려고 애는 썼는데, 끝내 그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발언한 거짓말을 문제 삼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제소한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올라왔고 권순일 전 대법관은 무죄의견에 참여했다. 무죄의견은 다음과 같다.  


“후보자가 부분적으로 잘못되거나 일부 거짓말을 하더라도 토론과정에서 경쟁과 사후검증을 통해 도태되도록 하는 것이 민주적이고 국민이 그 토론과 후속 검증과정을 지켜보면서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재명 지사 KBS 토론 발언은 상대 후보자의 공격적인 질문에 대해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취지의 답변, 또는 일부 부정확하거나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표현을 넘어서 반대사실을 공표하였다거나 전체 진술을 허위라고 평가할 수 없으며 허위의 반대 사실을 적극적이고 일방적으로 공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경우에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본질적 내용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의견이 “선거에서 당선되면 후보의 거짓말도 유권자가 용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로 여겨진다. 과연 권순일 대법관의 의견이 크게 반영된 이 책을 신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법정의 얼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