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준
궁리
2009년 11월 25일
앞서 읽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거의 모든 것>을 통해 이범준 저자를 만났다. 경향신문 사법전문기자로 일하다가 폭 넓은 이론과 현대사 기록에 대한 열망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과정에 있는 저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헌법재판소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6개월에 걸쳐 신문ㆍ잡지ㆍ논문ㆍ영상ㆍ속기록ㆍ회의록 등 1만 장 분량을 검토했으며, 집요한 설득을 거쳐 재판관ㆍ연구관ㆍ청와대ㆍ관련자들을 100시간가량 인터뷰했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읽었던 <일본제국 vs. 자이니치>의 저자이기도 했다.
헌법재판소가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도 이전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부터는 기억이 나니 그 이전이었을 것이다. 찾아보니 헌법재판소 이전에 제헌헌법 때부터 헌법위원회가 존재했지만 단 한 번도 위헌 심판을 내린 일은 없다. 제3공화국 때는 헌법재판소가 없고 대법원에서 위헌정당 해산과 위헌 법률 심판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1987년 6.10 민주 항쟁 이후 9차 개헌으로 헌법위원회는 폐지되고 헌법재판소로 대체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위헌심판은 본래 대법원이 제청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민주화 때 재판 당사자가 법원에 위헌심판을 제청해달라고 요청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직접 헌법재판소에 요청하는 헌법소원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니 위헌심판은 재판하던 판사가 스스로 판단해 헌재에 보내거나, 재판부가 피고인 신청을 받아들여 제청하거나, 재판부가 헌재로 보내길 거부해서 당사자가 직접 헌법소원을 통해 제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때 대법원에 주어졌던 위헌심판 권한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가면서 두 기관은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엄연히 별개 기관이었지만 헌법재판소가 태어날 때 권한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하긴 대법원으로서는 가지고 있던 권한을 뺏긴 셈이니 헌법재판소가 태어날 때부터 권한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해도 이런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법률의 위헌심판을 요청하는 것은 법률이 애당초 헌법의 취지에 맞지 않게 만들어졌을 경우도 있지만 시대상황이 달라지면서 헌법을 달리 해석해야할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시대상황이 달라지면서 헌법을 달리 해석해야 할 경우는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회에서 입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헌법재판소가 태동한 단계부터 지금의 견고한 위상을 구축할 때까지의 과정을 정리하면서 그때그때 내려진 주요 위헌심판을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관심을 가지고 읽은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합헌의견은 “간통 조항이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은 맞지만 침해 정도가 공공이익을 위해 감수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국회가 해결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위를 국가가 처벌할 것인가 도덕에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대적인 상황과 사회 구성원 의식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니 국회가 결정할 일이지 사법적인 판단을 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헌의견은 간통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징역형만 정하고 있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징역형만 있으면서도 고소권자의 의사에 따라 처벌이 좌우되는 친고죄여서 이혼소송의 무기나 공갈협박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생활 은폐권’이라 불릴 만한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위헌이라고 언급한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논리이기는 한데 ‘사생활 은폐권’이라는 것이 하나의 권리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롭게 여겨졌다. 이 권리가 헌법에 명시적으로 들어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느 조항을 어떻게 해석해서 그런 논리가 구축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최근에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 사생활 보호에 대한 근거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재판관의 논리 중 부부관계를 계약관계로 해석한 것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부부는 아내가 남편의 후손을 낳고 남편은 아내에게 식량과 주거를 공급하는 계약관계인데, 간통은 계약에 따른 성적 성실의무를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이혼하고 위자료를 청구하고 끝낼 일이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부를 계약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는 둘째 치고 아내가 남편의 후손을 낳고 남편은 아내에게 식량과 주거를 공급하는 계약관계라는 말은 양성평등이 기본 가치가 된 지금 조롱의 대상이 될 만한 견해 아닌가 한다.
동성동본 금혼은 헌법재판소가 1997년 7월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해결했다. 이는 전효숙 재판관이 밝힌 대로 “여자는 가정의 주체가 되면 안 되는 호주제, 자녀는 남자인 아버지 성을 따라야 하는 부성주의, 이런 생각은 달라진 세상에 잘 안 맞는다. 개념이 너무 좁아 다양한 가정을 끌어안을 수 없다. 외국인과 함께 하는 가정이나 아이들을 여럿 입양한 가족이 우리나라에도 많다. 혼자 사는 사람이나 동성끼리 사는 커플과 같은 특별한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지금의 호주제나 부성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금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동성동본 금혼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져왔다. 출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에 평민들이 성을 가진 것은 조선시대 말기라고 알고 있다. 그때까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 10%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양반제가 무너지면서 너도 나도 족보를 만들었다니 뿌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동성동본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동성동본 금혼은 얼마나 우스운 규정인가.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는 상식일 텐데 동성동본 금혼 반대 논리 중에서 그런 언급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졌다. 건들고 싶지 않은 치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던지 최소한 그들에게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매도하는데 기독교인들이 앞장선 것은 그들이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여기는 ‘여호와의 증인’ 교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 교리를 이유 삼아 정작 하나님의 뜻인 이웃 사랑, 생명 존중 가치를 저버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 교파가 기독교의 이단이라는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양심에 따른 결정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있는지 깨닫는다면 차마 부끄러워서 내세울 수 없는 주장일 것이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만 그것이 병역 기피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요구하는 것 정도까지는 사회에서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다른 일에 종사하도록 허락하는 대신 그 강도나 기간이 병역보다는 좀 더 불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선택한다면 적어도 병역거부가 기피의 수단이 아닌 것은 확인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징벌적 대체복무제이기 때문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다행히 2018년 헌법재판소에서 이를 헌법불합치로 판단하여 대체복무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위헌심판은 2002년 서울남부지법이 제청했다. 양심과 공익의 승부에서 공익이 앞선다는 게 합헌의견의 주된 이유였다. 위헌의견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헌법 가치들이 갈등한다면 하나의 가치만 실현하려 할 것이 아니라 충돌과 갈등을 피해 대안을 모색하고 대안이 없더라도 기본권 제한을 가능한 줄여야 하는데, 입법자가 충돌과 갈등을 피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단한다. 양심과 공익의 조화가 입법의 기본인데 한쪽의 희생만 강요하고 있으니 위헌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가 논박할 여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명쾌하다.
서울형사지법은 영화 사전심의가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에 대한 검열을 금지한다는 헌법에 어긋난다며 위헌심판을 제청하자 헌법재판소는 우선 영화가 언론출판인지 가리고 다음 사전심의가 검열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로 한다. 그 결과 영화는 언론출판의 자유 가운데 의사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며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는 검열제도 이므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위헌 판단이 내려지자 정부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상영등급제도를 실시한다. 영화를 18세 관람가, 15세 관람가, 등급보류로 나누어 등급보류는 특정한 조건으로 특정한 영화관에서만 상영하도록 규정한다. 등급보류란 상업적인 상영이 현실적으로 불가한 등급이다. 결국 새로운 등급보류는 사라진 사전심의와 똑같은 효과를 낸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등급보류가 검열이라고 판단한다. 사전등급 자체는 위헌이 아니지만 등급보류는 무한정 반복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검열이고 위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출판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하기 위해 “영화 뿐 아니라 담화, 연설, 토론, 연극, 방송, 음악, 가요, 문서, 소설, 시가, 도화, 사진, 조각, 서화 등 모든 의사표현은 언론출판의 자유를 누린다”고 선언한다.
노무현 정부의 수도이전에 대해 위헌심판이 내려졌는데도 정부는 이를 따르지 않고 수도분할법을 추진했다. 수도이전이 위헌이면 수도분할도 위헌인데도 당초 위헌심사를 요청했던 쪽에서 이에 대한 위헌심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법리상 같은 논거로 명백한 위헌이지만, 이것까지 위헌으로 결정하면 참여정부는 존립근거를 잃어버리므로 위헌 결정이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이 꼭 법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매우 정치적인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정치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결국 국회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를 헌법재판소에 떠넘겨서 일어난 일인 셈이다. 요즘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인 분쟁조차 툭하면 소송으로 끌고 가는데, 이것은 사법권의 낭비일 뿐 아니라 정치인들의 직무태만이나 직무유기가 아니냐.
“재산권 소송에서 승소하면 대부분 가집행이 가능하도록 판결한다. 물론 상급심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법원이 가집행을 허가하는 것은 모든 재판은 효력이 있다는 점에 따른 것이다. 민사재판보다 엄격한 형사재판에서도 1심에서 징역형이면 대부분 구치소에 갇힌다. 2심에서 무죄가 날 수도 있지만 법정 구속된다. 민사이건 형사이건 1심도 재판이기 때문이다.”
“모든 재판은 효력이 있다”는 말은 생경하면서도 그동안 궁금했던 것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이에 따르면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되었다면 법정 구속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런 경우에도 유력 정치인이 당사자일 경우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법정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 괴이한 일이다. 힘과 재력이 있으면 법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는 법치국가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문제가 아닌가?
“국가를 상대로 공탁금 반환소송을 하더라도 소송 촉진에 관한 특례법 때문에 최종심이 끝나기 전에 공탁금을 받아낼 수 없게 되자 서울민사지법 재판부가 헌재에 위헌 제청한다. 이에 대해 법무부가 합헌을 주장하는 사유 중 하나는 가집행제도의 취지는 집행 불능을 방지하려는 것인데 국가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재는 상급심에서 판결이 번복돼 생기는 문제는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므로 국가만 예외여야 하는 근거가 못 된다. 비록 국가라 할지라도 권력 작용이 아닌 민사소송의 대상이 되는 국고 작용으로 인한 법률관계에 있어서는 사인과 동등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에 있어서 국가와 사인이 동등하게 다뤄져야 한단다. 이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성공한 내란이나 반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한스 벨첼(Hans Welzel)의 말은 성공한 내란이라 반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처벌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는 탄식이다. 내란에 성공한 자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도저히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은 오독의 결과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