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 이주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넉넉하게 살아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잠깐 반짝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당시 어떤 형편이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일이다. 어머니는 맏자식인 나를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할까 노심초사하셨다. 다행이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서 고등학교 갈 때는 꼭 그만큼 대학교 갈 때도 꼭 그만큼 감당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하면 남학생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도 2학년까지 다니고 군대 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학 마치고 군대 가라고 하셨다. 등록금 낼 형편 될 때 얼른 학교를 마치라는 말씀이었다.
자식이 대학 들어가고 나서 보니 성악을 계속하려면 유학을 다녀와야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나 역시 직장을 언제까지 다닐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자식이 하루라도 빨리 대학을 마쳤으면 했고, 유학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느 날 자식이 징병검사에서 공익요원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고도근시여서 현역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징병검사 나왔다는 이야기도 없었던 터라 조금 괘씸하기는 했다. 얼른 의무를 마치고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뜻으로 여겨 별말 하지 않았다. 자식은 두 학기를 마치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공익근무 덕분에 훈련 받은 한 달과 근무 시작한 첫 달을 빼고는 계속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식이 성악을 시작한 96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27년 동안 노래를 쉰 것이 그때 딱 두 달 뿐이다.
어차피 삼 년을 생각하고 휴학했던 터라 공익근무 마치고 나서 한 학기 넘게 남은 시간 동안 밀라노에서 레슨도 받고 경험도 쌓기로 했다. 월급쟁이 형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성악 시작해서 대학 갈 때까지 지도해주신 왕광렬 선생께서 밀라노에서 유학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왕 선생의 주선으로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테너 움베르토 그릴리 선생을 사사하게 되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자식이 밀라노에서 공부하는 것이나 내로라하는 성악가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것이 모두 꿈만 같았다. 그곳에 가는 것도 그렇고 그곳에서 음반으로만 만나던 대가에게 배운다는 게 어디 상상하니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아마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자식도 그렇고 나 역시 어쩌면 유럽 무대가 그렇게 멀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실 그곳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만 삼천 명에 이른다는 걸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꿈이었는데, 모르면 용감한 것이니까.
자식이 나름 게으르지는 않았으니 배운 것이 적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그곳에서 많은 음악인들과 교분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자식이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 더욱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 번은 자식이 그곳 오페라 단원으로 활동하던 선배 한 분에게 초대를 받아 공연에 다녀왔다고 했다. 오페라의 본 고장에서 오페라를 본 것도 뜻 깊었겠지만 그보다 선배가 자기 분장실을 보여준 것이 크게 도전이 되었던 것 같았다. 분장실 사진을 보내면서 보낸 글의 행간에서 그것이 진하게 느껴졌거든. 참 고마웠는데 지금까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 선배는 지금 모교 교수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분들과 나누었던 교분이 그로부터 7년 후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식이 돌아온 두 해 뒤 아내와 함께 밀라노를 찾아 자식과 교분을 나누었던 선배들도 만나고 자식이 출석했던 밀라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황홀한 찬양을 경험했다. 당시 함께 예배드린 교인이 삼백 명은 되었는데 대부분이 성악을 하는 분들이었다. 유학생으로부터 오페라 가수까지. 성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찬양팀도, 회중석에 앉은 교인 대다수도 성악가여서 찬양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는 모른다. 그 중에 끼어 앉아서 예배를 드렸으니.
자식이 돌아올 때 목사님께서 송별 인사를 안 시키시더란다. 이 친구는 다시 공부하러 올 것이니 송별을 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 목사님의 말씀이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유학은 갔으나 밀라노가 아니라 베를린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