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맺은 인연 (30)

by 박인식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아내와 저녁을 먹으면서 은혼식 때는 유럽여행을 가자고 했다. 아내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집에 들어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커다란 유럽 지도를 하나 샀다. 집에 들어와 방바닥에 펴놓고 배 깔고 엎드려 어디를 갈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시간 날 때마다 유럽여행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어쩌면 유럽여행보다 그 시간이 더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유럽여행이라면 일주일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적어도 보름은 되어야 하는데, 직장에 매인 몸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면 은퇴나 해야 가능할 것 같아 일단 가기로 마음먹고 은혼식 한 해를 앞두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내년 가을에 보름 휴가를 갈 것이니 시비 걸지 말라고 회사와 동료들과 발주처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시작했다. 몇 달 앞두고는 휴가 가는 동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을 앞당겨 처리하거나 다녀와서 처리하는 것으로 미뤄두었다.


오슬로 출장 갔을 때 주말을 이용해 베르겐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곳은 언젠가 꼭 아내와 다시 찾으리라 마음먹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니 유럽여행 계획 세울 때 베르겐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름 여행에 노르웨이 베르겐을 끼워 넣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결국 유럽을 종단하는 꼴이 되는데, 그러자니 매일 같이 짐 싸들고 이동해야 하지 않은가. 아내와 처음 가는 유럽여행, 그것도 은혼식 여행을 그렇게 다녀올 수는 없는 일이고.


숙제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즐겁자고 가는 여행이니 한 곳에 사흘은 묵어야 할 것 같았다. 자연히 갈 곳은 다섯 곳으로 정해졌다. 유럽 허브 공항이라면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로마. 그중 런던으로 가서 로마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출장 다니면서 마일리지를 꽤 쌓아놓아서 아내와 비즈니스석으로 다녀올 수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마일리지 좌석이 워낙 적어 일찌감치 예약을 마쳤다. 몇 달도 아니고 무려 일 년을 앞둔 스물네 번째 결혼기념일 무렵이었다.


음악 애호가인 나로서는 유럽여행에서 음악의 중심인 빈을 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수십 번 볼만큼 좋아했으니 잘츠부르크도 뺄 수도 없고. 자식을 성악의 길로 인도해준 왕광렬 선생께서 밀라노를 들렀다가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런던-빈-잘츠부르크-밀라노-로마 일정을 결정했다. 베르겐은 후일로 돌리고.


그때부터 묵을 곳이며 볼 것이며 먹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상세한 여행 가이드북이 여러 종류 나와 있었는데 그 중 시공사에서 나온 <저스트 고, 유럽>은 다른 가이드북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탁월했다. 교통편은 물론 음식점 메뉴와 가격, 심지어는 드레스 코드까지 설명하고 있었다.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옛날인데 당시에 이미 B&B 같은 숙소가 있어 오스트리아에서는 그곳을 이용하기로 했다.


설계가 직업이다 보니 계획과 함께 계획이 틀어질 때 대처할 방안까지 세웠다. 숙소는 당연하고 식사할 곳까지 모두 정했다. 그러고 나서 음악가의 흔적을 쫓고 현지에서 유럽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회가 닿는다면 오페라를, 사정이 되지 않으면 작은 음악회라도 가볼 생각이었다.


런던에서는 코번트가든과 로열앨버트홀과 세인트마틴인더필드 교회를 가보고 싶었다. 빈에서는 베토벤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빈 오페라극장과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뮤직페라인홀 연주를 볼 수 있으면 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의 흔적과 축제극장을 중심으로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현장을 돌아보고 싶었다. 밀라노에서는 두오모에서 혹시 열릴지도 모를 음악회나 라스칼라 오페라극장의 공연을 기대했다.


숙도도 음식점도 예약했는데 정작 오페라극장은 예약을 하지 못했다. 그때도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게 가능하기는 했는데 일정에 맞는 공연도 별로 없었고 취소 절차가 까다로워 현지에서 표를 사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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