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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ug 28. 2023

1812년 홍경래난

변란인가 민란인가

김선주

김범 옮김

푸른역사

2020년 9월 22일


홍경래난의 실체


“홍경래난은 1812년 1월 31일 밤 홍경래ㆍ우군칙 등이 이끈 집단이 평안도 가산 관아를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현존하는 왕조의 통치를 무너뜨리려는 반란이었다. 반란군은 거병 10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지만 곧이어 안주 북쪽에 있는 송림과 사송야에서 패배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견고하기로 유명한 정주성으로 후퇴해 넉 달 정도 버텼다. 5월 29일 관군이 땅굴을 파고 화약을 설치해 성벽을 무너뜨린 후 8천 명이 넘게 성안으로 진입해 반란군 대부분을 체포하는 것으로 반란은 막을 내렸다.”


조선시대 대중운동을 다룬 <민란의 시대> 저자들은 민란은 대체로 경제적 문제 때문에 농민이 일으킨 저항운동이고 변란은 불만을 품은 지식인이 계획한 정치적 지향을 지닌 반왕조적 운동이라고 구분했다. 그들에 따르면 홍경래난은 민란과 변란이 혼합된 모습을 보인다.


나는 홍경래난을 평안도 차별에 반발한 지역민이 일으킨 반란으로 이해했다. 반상의 차별이 엄연한 조선시대에 반상을 지역민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들은 세습되는 특권을 지녔고 교육과 과거를 독점해 권력을 누린 세력이다. 그러나 저자는 많은 양반이 중앙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다면서 중앙에 기반을 둔 경화사족으로 불린 특권층을 제외한 지역 양반을 소외된 지배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홍경래난은 그런 그들이 현존하는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으킨 반란인 것이다.


그러나 양반만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일. 저자에 따르면 평안도는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흉작으로 타격을 받았다. 1811년 말 평안도는 비가 늦은 것부터 바람ㆍ우박ㆍ해충ㆍ서리에 이르는 자연재해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100년 이래 최악의 가뭄이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 지역의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그것이 농민을 반란에 합류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홍경래난에서 농민 지도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지역 지배층인 양반이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민란의 시대> 저자들이 홍경래난을 변란과 민란이 혼합된 것으로 판단한 것은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홍경래난은 변란이고 마침 대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농민의 불만이 변란을 일으킨 양반에 의해 이용된 것이라는 게 오히려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반란군이 반란과정에서 수령들이 저지른 부패를 적발하는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조세제도에 대한 개혁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저자는 “대기근은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은 동원하는데 좋은 이유가 됐지만 농민이 반란군과 자발적이고 일관되게 결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봉기가 빈곤 자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결론짓는다.


반란의 원인이 된 평안도 차별


차별은 동등한 능력을 갖췄는데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조선 후기의 평안도 차별은 차별이 맞다. 조선 후기 과거에서 평안도 출신이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도 좋은 관직은 유명 가문 출신에게만 주어지고 평안도 출신에게는 별 볼일 없는 관직만 주어졌다. 조정이 과거에 합격한 순간부터 그들을 차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평안도 출신의 능력이 경상도를 포함한 남도 출신에 뒤처지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능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 대우하는 것이 옳으냐는 시비가 걸릴 수는 있는데, 이 책의 논지를 이해하는 것과 거리가 있어 여기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17~18세기 설립된 서원의 총수에서 평안도가 경상도에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며 학문적 깊이도 남부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몇몇 북부 출신 학자들이 남부 출신과 토론할 정도 능력을 갖추었지만 그들의 학문적 성취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며 주요한 당파와 정치적 유대를 맺는데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홍경래난 당시 정주의 사족 출신이었던 백경해는 평안도 출신을 차별하는 관행의 근거는 핑계일 뿐이므로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왕들이 이를 폐지하려고 노력했으니 신하들이 국왕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실제로 조선의 국왕들은 이 문제를 호소한 수많은 상소를 받았으며, 그런 비판에 동의했고,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고 승진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백경해가 개탄한 대로 아무도 이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19세기 후반까지 현실화되지 않았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조선 후기에는 동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았으니 차별이 분명한데, 조선 전기나 중기에 과연 같은 상황이었는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책의 저자인 김선주는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시대 사회ㆍ문화ㆍ생활사를 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재판 기록이나 일기와 같은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홍경래난을 종합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평안도가 경상도에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의 국왕이 평안도 차별에 동의해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고 승진시키라고 명령했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나 중기에 일어난 차별이 능력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인가 능력이 같은데도 차별이 자행되었다는 말인가?


반란에 대한 지배층의 태도


저자는 홍경래난에서 농민 지도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지역 지배층인 양반이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의아한 것은 동시에 그들이 정부 진압작전에도 앞장섰다는 것이다.


“백경해를 비롯한 문과 급제자들은 반란에서 뚜렷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반란군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 문과 급제자의 친척들이 있었지만 문과 급제자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반란에 뚜렷하게 반대하지도 않았다.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고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부류는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지역 양반이었지만 그들의 배경과 지위는 문과 급제자들보다 그리 처지지 않았다. 이밖에도 많은 무과 급제자들이 반란군 지휘부에 참여했다. 홍경래가 이끈 새 조정에서 더 나은 대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를 단순화 시키자면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과 무과 급제자들이 반란에 참여했고, 문과에 급제한 양반은 반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란에 뚜렷하게 반대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백경해는 평안도 차별의 시정을 부르짖었지만 정작 반란을 진압하는 쪽에 섰다가 반란군 손에 죽는다. 이것을 보면 참여도 반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정의 진압에 동조하고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역 양반을 반란 참여와 반대로 나눈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반란군의 초기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지역의 지배층을 대표했다. 평안도의 지역 양반은 지역차별로 쓰라린 좌절을 겪었으며 새 왕조의 조정에서 고위직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반란에 가담하는 쪽으로 대거 이동했다. 그들은 국정에서 소외되었으며 국가의 제도적 간섭 때문에 지역 공동체에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계속 위협 받았다. 그들은 반란군이 유망한 미래를 제시하자 망설이지 않고 현재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했다. 실제로 각 군현을 장악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 사람들은 즉시 관직을 받았으며, 반란이 성공하면 조정의 높은 관직을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반란과 정부의 진압작전 모두에 지역 양반이 참여한 것은 지역사회의 특권층 내부에 극도의 분화와 긴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반란군을 돕지 않고 정부를 돕기로 한 것은 지역 지배층의 합리적 정치행위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태도를 드러낸다. 기존 지배구조 안에서 이미 명성과 특권을 얻은 문과 급제자와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확보한 것 이상의 추가 혜택이 없거나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군과 의병의 반격이 반란군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면서 그것은 더욱 분명해졌다.”


결국 평안도 차별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양반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익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어느 쪽에 서야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망설였고, 그래서 당장 이익을 누리고 있는 문과 급제자들은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란에 동조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반란군에 들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별로 없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반란에 동조한 이들마저 돌아섰고, 진압군의 승리가 확실해 보이자 그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익 앞에는 명분도 정체성도 힘을 잃는다. 이것이 비단 평안도 양반에 국한된 현상일까? 그러고 보면 양반이 조선시대를 이끌었다는 말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다.


반란의 의도와 목적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나 우군칙은 모두 풍수를 다루는 지관이었다. 홍경래는 아버지 묘를 선정하면서 그 자리가 큰 음덕을 베풀 길지라고 자부했고, 그것을 자신이 국왕이 될 운명이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으로 그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1812년이 임신년이라는 점을 근거로 정감록에 언급된 임신년 무장반란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고 해석했다. 그들은 반란의 10년 넘게 계획했다.”


홍경래난을 평가하는 책에서 정작 홍경래에 대한 서술은 이것 말고 찾아보기 어렵다. 지관이라면 중인이 아닌가 모르겠다. 검색해보니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고 전해지지만 거의 평민 수준으로 곤궁하게 살았다고 한다. 유교ㆍ병법ㆍ풍수지리를 익히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으며, 1797년 평양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1798년 사마시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방랑하면서 거사를 꿈꾸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으로 다른 양반에 비해 누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무엇인가 누리기 위해서는 반란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격문에서 자연재해와 천문변화가 일어난 것이 조선왕조가 끝났다는 징조로 주장해 반란을 정당화했으며, 왕조 교체를 요구하고, 각 지방의 수령과 관원을 임명해 관료체계를 수립했다. 홍경래는 협력자들에게 비밀편지를 보내면서 봉투에 왕이라고 썼으며, 지역 관료를 영변부사에 임명하고 영의정까지 승진시킬 것을 약속했으며, 지역 무관을 훈련대장과 이조판서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아닌가.


반란에 참여한 농민층


“대부분의 반란군은 정부의 군적에 기재된 일반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가뭄과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을 겪었고 반란군은 강력하고 너그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처음에 반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농민의 삶을 직접 개선하는 조세행정, 토지소유, 신분제도의 개혁을 약속해 농민의 자발적인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평안도에 대한 중앙 조정의 정치적 차별을 없애고 왕조 교체를 이루겠다는 약속은 농민들이 목숨을 걸도록 만드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 결과 농민들은 관군과 의병이 좌우에서 공격해 오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달아났다.”


농민은 반란군이 자신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반란군에 합류했으나 반란군의 지도층인 양반들이 그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에게는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 중앙의 정치적 차별을 없애겠다는 주장만 내세웠으니 이탈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농민에게는 반란군의 지도층인 양반이나 그들이 물리치려는 중앙 조정의 양반이 하등 다를 바 없는 지배계급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반란에 대한 지역과 조정의 대응


“조정은 반란의 주요 원인을 질병과 가뭄으로 고통 받는 농민에게 관원이 부정을 저지르고 자의적으로 조세를 부과한데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국왕은 풍년이 들 때까지 세금을 보류하고 환자에 쌓인 이자를 탕감하며 반란이 일어난 기간과 그 이후의 군포를 줄여주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농민이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구휼곡을 나눠주라고 명령했다. 반란의 원인을 날카롭게 통찰했던 오위 부호군 오연상은 1812년 3월 24일에 올린 상소에서 서북 지역 학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예비시험을 치르지 않고 서울에서 열리는 최종시험에 나아갈 수 있는 도과를 치르자고 제안했다. 도과는 호란을 겪고 난 직후인 1643년에 처음 열렸으며 그 뒤 10년 마다 도과를 시행하는 것이 제도화 되었으나 오랫동안 도과를 치르지 않았고 지역 사대부들이 그것을 개탄했다. 오연상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도과는 3년 뒤인 1815년까지 실시되지 않았는데 이 문제에 대한 조정의 둔감함을 보여준다. 평안도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20세기 초까지 분명히 지속됐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반란은 소외된 양반이 계획했고 대기근으로 불만이 고조되었던 농민을 동원해 일으킨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평안도 양반에 대한 차별대우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연상의 진단과 대책은 적절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농민에 초점을 맞춰 그에 필요한 대책을 집행했을 뿐 양반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하기 위한 도과를 치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것을 조정이 둔감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조정이 반란의 실체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반란의 동력인 농민을 이탈시키는 정책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생각한다. 중앙 조정으로서는 평안도 양반에게 권력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그렇다고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않고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니, 병력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농민을 분리시킴으로서 반란의 여지를 없앴다는 것이다.


“반란 소식은 봉기 이틀 뒤에 평양에 알려졌다. 관찰사는 안주에 1개 부대를 파견했고 그 뒤에 평양에 주둔했던 5개 부대를 더 보냈다. 아울러 의병을 조직해 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중앙 조정은 반란이 일어나고 나흘 뒤에 알게 되었다. 이틀 뒤 선전관을 파견해 상황을 조사하고 백성에 대한 국왕의 배려를 전달했다. 순무영을 설치해 반란 진압에 관련한 모든 군사행동을 감독했다. 10일 뒤에 군사 800명이 반란 지역으로 출발해 10일 만에 도착했다. ... 의주의 군관들은 제 고장을 지키기로 맹세했다. 앞선 전투에서 반란군이 승리했지만 의주 군관들이 이끈 의병이 정주 북부의 반란군을 무찌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 2월 8일 현인복과 백경해가 그 지역 양반들에게 의병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한 통문이 호응을 얻어 양반과 농민 500명으로 의병이 구성되었다. 현인복은 군수품과 군량도 제공했다. 백경한은 반란군에 사로잡혀 고문으로 죽었다.”


지역 지배층인 양반이 처지에 따라 반란에 가담하거나 이를 진압하는 쪽에 섰다는 것은 이해하겠다. 농민이 대기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군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도 이해하겠다. 그런데 반란군을 진압하는 의병으로 참가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농민이 의병으로 참가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었을까? 이익에 관계없이 종묘사직을 지켜야한다는 백성의 도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주성에서 있었던 마지막 전투에서 무수한 사람이 죽고 사로잡힌 3천여 명 가운데 2천여 명이 참수되었다. 홍경래는 총탄을 맞고 사망했으며 그의 머리는 베어져 도성으로 보내졌다.”


홍경래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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