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저토록 펄펄 뛰는 걸 보면 한미 FTA 때문에 미국이 손해가 많았다는 거 아니냐. 그러면 그만큼 우리가 덕 봤다는 것이겠고. 현 정부에 몸담고 있는 이들 중에 한미 FTA가 나라 망치는 길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이들이 적지 않은데, 이럴 때 뭐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정부의 탈원전 선언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신문기사에 이런 반론이 달렸다.
“원전으로 값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 에너지가 과소비되고 있다. 에너지 과소비는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원의 과소비로 이어져 기후 변화 또한 심화시킨다. 그리고 그 모든 피해는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원전은 이런 악순환을 조장할 뿐이니 폐기되는 게 마땅하다.”
에너지 과소비의 책임이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손쉽게 공급하도록 만든 쪽에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게 된 책임이 차를 발명해낸 쪽에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 댓글에 이런 답글이 달렸다.
“원전이 에너지 과소비의 원인인데, 에너지 과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원전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건 궤변이다.”
이젠 나까지 헷갈린다.
청년부에서 함께 지내던 이들 중에 목회자의 길을 걷는 이들이 몇 있다. 젊은 사람들이니 여러 면에서 생각하는 게 나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글을 읽다보면 내 주장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고 생각의 폭도 넓어져 도움이 된다. 간혹 그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뭔가 비판적인 글을 쓸 때가 있다. 물론 목회자라고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이 교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실 확인은 기본일 것이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세상에 의미 없이 지어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의미 없이 태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연 또한 그렇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연 파괴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도 그렇고.
소명이라고 여겼던 것이 내 욕심이라는 걸 깨닫고 더 이상 그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든 이 자리를 떠나라고 하시면 그것이 나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길인 줄 믿고 미련을 두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그날 할 수 있는 일을 잘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다.
집착을 버리고 나니 더 할 수 없이 홀가분하기는 한데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막연하고 막막하다. 삶의 투지를 잃어버렸다. 세월을 낭비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마치 키 잃은 배에 오른 사람처럼 불안하기까지 하다. 돌아보니 집착이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집착을 버린 것은 옳은 일이었으니 이제 비운 것을 채울 궁리를 해야겠다.
대통령이 입시 전형료를 낮추라고 지시하는 게 적절한 일인가?
모든 생명체 중 영장류만 표정을 지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람의 표정이 가장 풍부하다고 한다.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발달했기 때문이란다. 나이가 들어가면 표정 지을 일이 늘어나고, 표정 짓는 근육이 점점 발달하고, 그 중 자주 쓰는 근육이 더 발달할 것이니, 결국 얼굴 모습도 그렇게 변해가지 않을까.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이런 까닭인 모양이다.
부부는 닮는단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면 짓는 표정이 같을 것이고, 그것이 수십 년 쌓이면 결국 얼굴 모습도 닮아가지 않겠나. 아내 얼굴이 내 얼굴과 닮아 가는지 살펴봐야겠다. 닮은 구석이 없다면 아내와 공감하는 구석이 없다는 것이니 아내와 더 많은 것을 공감하며 살도록 애써야 하지 않겠나.
살다보니 연륜보다 앞서는 게 없더라. 나이 그 자체가 벼슬이라는 말이 아니라 나이 먹으면서 체득한 지혜만한 게 없더라는 말이다. 다행히 이런 이치를 일찍 깨달아서 오래 전부터 인터뷰 프로그램이나 인터뷰 기사를 빼놓지 않고 챙겨본다. 인터뷰 대상이 된다는 건 나름 일가를 이룬 경우가 대부분이니 비록 나이가 들지 않았다 해도 하나씩은 건질만한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탈원전 정책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본사 매출의 상당부분을 원전사업에서 올리고 있어 발등의 불이기도 하고, 국민으로서 국가 백년대계에 관계된 일이기도 하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평생 원전사업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경험이 건설 분야에 국한되어서 다른 측면의 보도와 주장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그런데 같은 자료가 상반된 주장의 근거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혼란스럽다. 살펴보니 자기주장에 유리한 것만 인용하고 불리한 것은 인용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비교하고 꿰맞춰 보기는 하는데 그럴수록 더 혼란스럽다.
국가 백년대계에 관한 일이니 공론조사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겠다고 한다. 민의를 모은다는 원칙에는 이의가 없는데, 과연 일반인이 설명만 듣고 의사를 결정하는 게 가능할까? 당사자인 나도 들여다볼수록 혼란스러운데 말이다. 전문가에 맡겨놓는다고 한들 어차피 어느 쪽엔가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것이니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런 전문적인 판단을 내리라고 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에 권한을 위임한 게 아닌가?
고교 동창 하나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언젠가 한 번 삶을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것이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난여름, 친구 하나가 그 길을 가려고 스페인어 강좌에 등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막연하던 생각이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다. 그리고 서영은 선생이 그 길에서 성령의 만지심을 네 번이나 경험했다는 글을 읽고 계획이 열망이 되었다.
연말 어느 날, 한 해를 뒤돌아보다 이미 사라져버린 그 열망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순례길 800km를 몇 번은 걷고 나서 그 길에 나서리라 마음먹고 한 달에 보름, 하루 10km를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오늘 한 번 걷기를 마쳤다. 걸어보니 내겐 과한 목표였고 결국 생각보다 한 달 이상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을 온전히 끝냈다. 걷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고, 두어 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매번 중간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온전히 한 번 걷기를 마쳤으니 오늘 하루쯤은 스스로를 칭찬해도 좋지 않을까.
단체사진 찍을 때 대체로 윗분을 중심으로 둘러선다. 남들이 권해서 가운데 서는 건 그러려니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가운데 서는 건 꼴사나워 보인다. 가운데 서려고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는 건 더 못 봐주겠다. 윗분이 한쪽으로 물러선 사진은 보기도 좋고, 찍을 때 분위기는 또 얼마나 훈훈했을까.
오래 전부터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구하고 있다. 부르시면 망설이지 않고 따라 나설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영원한 삶을 꿈꾸고 있으니 미련 둘 일이 뭐 있겠나 싶고, 지금 마음으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마지막 날까지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을 지킬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애를 쓰고는 있지만, 그게 사람 뜻대로 되는 일인가. 그저 하나님 은혜로 떠나는 순간까지 가족에게 짐이 안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돌아보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도 갚을 길 없는 은혜로 지금껏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구하는 건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어제 아내와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봤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실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려가 빠진 복지정책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병과 싸우며 기각된 복지급여를 되살리기 위해 항고를 준비했지만 항고일 지정을 앞두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가 어려운 중에도 도왔던 이웃이 그가 준비했던 항고사유서를 읽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왔으며, 자선을 구걸하지도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으로서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으로서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질병과 가난으로 죽음에 몰린 그가 요구한 것은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래서 편법을 써서라도 최소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제안을 뿌리친다. 삶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그는 생존보다 존엄을 선택했다. 극한 상황조차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으려 했던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지키고 싶은 존엄은 이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기는 해도 가족에게, 혹은 남겨진 누군가에게 짐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존엄을 잃고 싶지 않다는 그 절박함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겠나. 어차피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니 자비를 구할 뿐이다.
덤을 누리고 산다. 감사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 덤을 낭비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니 알뜰하게, 의미 있게 쓰리라.
틀린 줄 알면서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기는 해도 자기주장을 거두어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틀린 줄 알고 자기주장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은 격려해야지 비난할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하겠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잘못된 주장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날 테니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나.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도 대통령이 예정대로 휴가 떠난 것에 대해 야당 일각에서 적절치 못하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휴가를 간 사람은 간 사람대로 그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출근하니 여느 때처럼 미국인 동료가 한국 정세를 걱정하는 척 깐족대기에 대통령이 휴가 갔더라고 쏘아줬다. 속이 다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