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by 박인식

공론화 의제 (2017.08.01)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고 해서 그가 공약으로 제시한 모든 의제를 국민들이 받아들였다고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갈등학회가 주관한 토론회에서 박진 KDI 교수가 공론화 의제를 ‘탈원전을 전제로 한 5·6호기 중단 여부’가 아닌 ‘탈원전’ 자체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에 대해 적극 공감한다.



성경 기록 (2017.08.05)


최근 들어 성경이 온전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자주 접하고 있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충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믿음이 영향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성경은 우리 이해 너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한정된 사람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한정된 언어로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이해하겠다는 건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일일이다. 지나다 보면 이에 대해 좀 더 알아가게 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으니 성경을 읽으면서도 별 문제를 못 느꼈지만 이제부터는 여러 질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답이 찾아지면 좋은 일이고, 못 찾으면 또 어떻겠나. 내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을 따르는 데 있으니 말이다.



희년 (2017.08.0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 오십 년 되는 해를 희년으로 삼아 온 땅에 자유를 선포하고, 이스라엘 거민을 각기 자기 유산과 가족에게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기본권을 되찾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놀라운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명령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희년이 지켜질 거라고 여기고 명령하셨을까? 그랬다면 희년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을 텐데, 그런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 아침 묵상 중에 문득 희년이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죽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공평하게 같은 자리로 되돌려놓지 않나.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엉덩방아 (2017.08.09)


며칠 전 이웃집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저앉으면서 뭔가를 잡으려 했는데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소리만 요란했다. 괜찮은지 물어보는데, 묻는 사람도 나도 그저 웃고 말았다. 다음날 운동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더니 하루가 더 지나니 옆구리가 당기고 손목이 시큰거렸다. 아내가 엉덩방아 찧은 것 때문일 거란다. 설마 했다. 그런데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는 고개를 돌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엉덩방아 찧은 건 정말 별게 아니었는데, 나이 탓인가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부실해지니 뭐 섭섭할 일도 아니다. 다만 넘어지던 순간 뭔가 잡으려다가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허우적대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넘어지는 순간, 언젠가 빙판길에서 차가 미끄러지면서 핸들에서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을 때 나를 덮쳤던 당혹감, 두려움이 떠올랐었다. 위험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그저 사고가 닥치기를 기다리던 그 상황, 찰나에 불과했지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을 만큼 길게 느껴지던 그 시간, 단순하게 두려움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당혹감. 엉덩방아를 찧던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죽음을 맞을 때 이런 느낌이 들까?



이진우 (2017.08.10)


라디오에서 ‘손에 잡히는 경제’를 진행하는 이진우 기자는 프로그램 제목대로 까다로운 경제현안을 손에 잡힐 것처럼 쉽게 풀어 설명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특히 경제에 어두운 일반인들이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예를 보여주는데 아주 탁월하다.


대통령이 모든 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돈 없어서 치료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부작용을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관심을 기울일수록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오늘 이진우 기자의 글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 문제를 이보다 더 쉽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겠다.


“택시비를 개인이 내지 않고 정부가 무료택시를 운영하는 쪽으로 바뀌면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세금을 얼마나 더 내야 하느냐?’ 보다는 (택시비 대신 세금을 내는 것이니 그건 물을 필요가 없다.) ‘택시 수요가 많아질 텐데 한정된 택시로 그 수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용과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비유이다.



고정관념 (2017.08.15)


사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예상을 깨고 바둑 고수들을 연이어 격파했다. 최근에 알파고끼리 둔 기보가 공개되었는데, 알파고와 사람이 둔 기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패턴을 보이고 있어 바둑계에서는 이전에 알파고에 패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알파고와 사람이 바둑을 둘 때는 사람끼리 두어오던 것과 ‘상당히 다른’ 정도였다면, 알파고끼리 둔 바둑은 그동안 정석이라고 여겼던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양상을 보였다.


놀랍기는 해도 그럴 수 있겠다. 사람들이 두어온 바둑은 서로가 정석으로 여기는 틀을 바탕으로 공방을 펼치는 것이니 비록 변주를 보인다고 해도 그 범위가 정석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지만, 알파고끼리 둔 바둑은 애당초 기존 틀에 얽매어 있지 않으니 행마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틀에 얽매인 사람과 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경쟁하면 승부는 뻔한 것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해진 절차를 따르는 설계와 수없는 미지수와 변수를 해결하고 경쟁자를 물리쳐야 하는 영업이 같을 수 없다. 설계는 입증된 기술과 절차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요구하지만, 영업은 생각이 틀에 묶여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설계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이제는 영업이 주 업무가 되었다. 그러니 ‘thinking from the out of the box’를 입에 달고 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옹졸함 (2017.08.16)


탈원전에 비판적인 인사가 풍력발전기가 엉뚱한 곳에 설치되어 전혀 기능을 못한다는 기사를 공유했다. 문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을 초청해 위로하는 자리에서 전임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을 비난했다. 서로 다른 두 기사를 보면서 사회가 왜 이렇게 너그럽지 못할까, 세월이 흐르면서 왜 오히려 옹졸해져 가는 것일까 싶어 마음이 편치 않다.


풍력발전기를 엉뚱한 곳에 세워서 제대로 기능을 못했다면 바로 잡고 다음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면 된다. 그게 풍력발전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 않나. 원전에서 일어난 비리는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 그것이 탈원전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고통을 겪어온 유가족을 만나 마음을 다해 위로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러고 나서 다시는 이런 일로 국민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그쳤으면 더욱 아름다웠을 텐데, 굳이 전임 정부를 비난해 뭘 얻겠다는 것이냐.



지지율에 담긴 뜻 (2017.08.17)


나는 지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 출범 이후 새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 중에 의아한 것도 많고 못마땅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대로 논의 한 번 해보지 않고 탈원전 정책을 결정하고, 건설 중인 원전마저 중단할지 여부를 공론화라는 얄궂은 절차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해서 몹시 실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 대통령을 지지한다. 그것은 잘해야 하고, 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잘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대선에서 받은 지지율의 두 배가 넘는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착각 (2017.08.20)


하나님께서 이미 열어주신 홍해 바닷길로 들어가는 일과 하나님께서 흐르는 물을 멈춰주실 것으로 믿고 요단강에 발을 내딛어야 하는 일이 결코 같을 수 없다. 살아오면서 열어주신 길에 들어선 일보다는 멈춰주실 줄 믿고 발을 내딛은 일이 더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혹시 어쩔 수 없이 밀려서 발을 내딛고 나서는 멈춰주시기를 구한 건 아니었을까? 그러고 나서 멈춰주실 줄 믿고 발을 내딛었다고 착각한 것은, 합리화한 것은 아닐까? 아, 이젠 스스로 속이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권한과 책임 (2017.08.21)


교회의 직분을 기업의 임원처럼 여겨 권한을 휘두르려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그런 까닭으로 자신도 비난을 받고 교회의 덕을 해치기도 한다. 기업에서 임원에게 많은 권한을 준다. 임원은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니 책임지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권한을 주는 것이다. 어느 기업도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한만 누리려 하는 임원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교회의 직분을 기업의 임원처럼 여겨 권한만 휘두르려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직장에서 책임을 맡아본 경험이 없거나 본분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여럿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사업개발 (2017.08.21)


사업과 사기는 한 글자 차이지만 실제로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는다. 성공하면 사업이고 실패하면 사기인 것이니 말이다. 오늘도 그 경계를 넘나들었다. 내일이라고 다르겠나.



질서라는 이름의 폭력 (2017.08.29)


모든 폭력은 질서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폭력이란 물리적 제재 뿐 아니라 감정적 억압도 포함한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누구도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고쳐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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