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
지식산업사
2017년 9월 20일
십여 년도 넘은 일이다. 한동안 역사서만 집중적으로 읽은 일이 있다. 재야 사학자를 자처하는 어느 인사가 쓴 역사서인데, 읽을 때 가슴이 웅장해지고 애국심이 솟아날 뿐 아니라 읽고 나서 다른 이들은 미처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한 권 읽을 때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쩍부쩍 느는 느낌마저 들었다.
몇 년이 지나고 그의 주장이 역사학계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도 그런 고충을 어디선가 이야기 한 일이 있어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의 주장이 귀 기울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열 권 넘는 그의 책을 모두 내다 버렸다. 그러고 나서부터 역사서를 읽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요즘은서 읽기 전에 저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신뢰할만한 분께 견해를 물어보곤 한다.
작년부터 읽겠다고 벼르던 한영우 선생의 <정조평전>을 이제야 읽었다. 저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중에 “고인은 실증주의적 역사가였다. 문헌과 사실을 중요시한 그는 기존 학설과 부딪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눈에 띄었다. 혹시 이 분도 주류학계와 거리 있는 주장을 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역사학자 한 분에게 견해를 물었다. 괜찮을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와 관련한 다른 책도 추천받았다.
그동안 책을 읽고 리뷰를 써오고 있다. 주로 내 관점에서 느낀 바를 정리한 것인데, 이 책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아서 읽고 느낀 바가 아니라 읽고 이해한 것을 요약하기로 했다. 저자는 <정조평전-성군의 길> 상권에서는 정조가 즉위하기 이전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고 하권에서 정조의 치세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리뷰도 상권에서는 정조 즉위 이전의 상황에 대한 저자의 평가와 특정 시점의 상황을, 하권에서는 정조 치세의 상황에 대한 평가와 특정 시점의 상황을 ‘발췌ㆍ요약’했다.
사도세자를 제외해 버리면 영조와 정조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세자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영조와 정조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사람을 함께 엮어서 이 시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사도세자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28년의 생애를 <영조실록>과 <한중록>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친정 집안사람들의 정치행적을 변호하고자 쓴 책이므로 이 점을 반드시 감안하고 읽어야 하지만, 정사에 보이지 않는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영조와 정조 때 정치통합과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당론이었다. 당론은 정치를 활성화하고 상대방의 비방을 피하기 위해 부정과 부패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었고, 그로 인해 노론이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크게 부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론이 점차 극성스러워져 수많은 선비들이 정치적 변동이 일어날 때마다 떼죽음을 당하면서 서로 원수처럼 되어버렸다. 영조는 바로 그런 역사적 과제를 제대로 보고 탕평의 총대를 메고 나선 첫 번째 임금이었다.
영조는 왕실생활을 검소하게 바꾸고, 진상을 없애거나 줄였으며, 군역 부담을 완화하고, 여론을 듣고, 백성과 소통을 강화하고, 소외된 지역의 선비들과 무인들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서얼에 대한 벼슬길도 크게 강화하는 성군의 모습을 보였다. 그뿐 아니라 탕평의 실효를 상당 부분 거두었다. 또한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성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매우 엄격하게 교육했다. 자신의 후계자가 성군이 되어야 한다는 영조의 절박한 기대가 근본 원인이 되어 세자의 질병이 생기고, 그것이 비행으로 진전되었으며, 비행이 저항으로 발전한 가운데 노론 벽파의 고발사건이 불을 지르고, 막다른 골목에 빠진 세자가 마침내 역모를 도모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손자 정조가 태어나 그의 영특함이 드러나면서 영조의 기대는 급작스럽게 손자에게 쏠렸다. 정조는 이런 영조의 영향으로 내실 있는 성군으로 성장했다.
정조는 위대한 임금이었지만 세 가지 크나 큰 멍에를 안고 즉위했다. 첫째, 아버지 사도세자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이었다. 둘째,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자기를 후계자로 세우고 성군으로 키워준 할아버지 영조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셋째,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왕위계승을 반대한 혈족의 존재였다. 정조는 이러한 난관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자기의 목표인 성군의 길, 탕평의 길, 개혁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로 인한 지나친 부담이 건강을 해쳐 4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어찌 보면 정조처럼 자신을 불사르다 죽은 임금도 없을 듯하다. 독살설이 떠돌기는 했지만 45세를 전후하여 정조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게다가 정조가 생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어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이 죽음을 앞당겼을 것이다.
정조의 학문은 당대 어느 학자도 그와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경연을 매우 소홀히 했다. 간혹 경연을 열었지만 그것은 배우는 기회가 아니라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였다. 정조는 당파와 신분을 초월해 좋은 학자들을 모두 포용했으며, 노론의 주자학과 기호남인의 실학과 북학을 모두 수용해 사상 탕평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이렇게 학식이 높은 임금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정조는 당론을 일삼는 신하들을 길들이고자 관직에서 내쫓았다가 다시 등용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칭찬도 하고, 때로 욕설도 하고 협박도 하는 등 강온전술을 구사했다. 좋은 일을 위해서라면 임기응변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극도로 경계했으며, 당색이 강한 사람이라도 몸가짐이 청렴한 사람은 버리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정조 이후로 그와 같은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임금이 나오지 못했고, 탐욕스러운 노론 세력이 외척으로 정치를 주도하면서 정치동합과 사회통합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42세 늘그막에 귀한 아들을 얻은 영조는 생모인 후궁 영빈 이씨에게 양육을 맡길 수 없어 후사가 없는 정성왕후 서씨에게 입적시켜 기르게 했으나 왕후와 이씨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두 살 때 세자로 책봉하고 세자궁에 보내 궁녀들에게 양육을 맡겼다. 궁녀들 사이에서 자라다 보니 버릇없고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 아이로 자랐다. 무인 기질을 타고나 전쟁놀이를 좋아했다. 이미 버릇이 몸에 배어 소년기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고 여전히 놀이에 열중해 임금과 신하의 눈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임금의 눈에 벗어난 것은 세자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치를 선호하는 임금과 무치를 선호하는 세자의 체질이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어긋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부드러운 정치를 통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임금과 칼을 가지고 적대세력을 단박에 제압하려는 기질을 가진 세자의 노선이 타협점을 찾지 못한 것이다.
세자는 18세에 세손을 얻었다. 처음에는 한없이 기뻐했으나 세손의 영특함이 드러나면서 임금의 사랑과 관심이 점차 그리 쏠리게 되었다. 세손이 가정을 이루게 되자 임금은 자신의 후계자를 세자가 아닌 세손으로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를 신하들 앞에서 수시로 언명했다. 이를 알게 된 세자는 이성을 잃고 난폭한 행동으로 임금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폭력적인 언행 때문에 임금은 말할 것도 없고 혜경궁과 세손에게까지 위해가 가해질 것을 알고 있던 혜경궁과 생모 이씨 등이 더 이상 세자를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해 세자를 버리고 세손을 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영조가 83세까지 장수한 것도 세자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영조가 죽고 나서 세자가 임금이 되었다고 가정하면 세자는 42세가 된다. 왕조국가에서 권력의 2인자가 42년 동안 생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세자는 무능해서 죽었지만 영특했다면 임금과 세자 사이의 권력투쟁은 더욱 치열해졌을 것이고 둘 가운데 하나가 희생되었을 것이다. 사실 세자는 죽어도 좋을 만큼 수많은 비행을 저질렀고 잘못도 없이 세자에게 죽은 사람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역사가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평가한다면 영조가 세자를 버리고 세손을 택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매우 잘한 선택이다. 영조는 세자를 성군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세손을 성군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가 성군이 된 것은 영조의 가르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세자의 불행을 반면교사로 삼아 기어코 아들을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혜경궁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어린 정조 자신도 사랑이 담긴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불행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키운 것이 성공의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세자가 내시와 나인들을 죽인 것을 듣고 임금은 세자를 만나 사실을 추궁했다. 세자는 숨기지 않고 “마음속에 울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왜 울화가 나는지 다시 묻자 세자는 “마마가 사랑해주지 아니하기에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서 그리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임금은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내가 이제 그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임금이 세자와 단둘이 만나 조용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후에 임금은 혜경궁을 찾아와 세자의 말이 옳으냐고 물었다. 혜경궁은 그렇다고 대답한 뒤 “은혜와 사랑을 주시면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라”라며 슬피 울었다. 그러자 임금은 얼굴빛을 좋게 하고 “그러면 내가 그리 한다고 말하고, 잠은 어찌 자고 밥은 어찌 먹는지 묻는다고 해라”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혜경궁이 세자에게 임금과 있었던 일을 말하고 “앞으로 부자 사이가 나아지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화를 벌컥 내며 “어찌 그 말씀을 곧이듣는가. 일부러 그리 하신 말씀이니 믿을 것이 없네. 필경 내가 죽고 말 것이네”라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세자가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66세, 세자가 25세, 원손이 8세가 되는 해에 세손을 책봉하자 임금의 후계자가 두 사람으로 늘어났다. 세자의 처지에서는 심각한 경쟁자가 생긴 것이다. 조선 왕조 역사에서 세자와 세손이 동시에 책봉된 일은 처음이다. 영조가 장수해서 생긴 일이다. 세손의 위상이 높아지고 임금의 관심이 세손에게 쏠리자 세자는 신하들을 만나 학문과 정사를 펴는 횟수가 한층 많아졌다. 횟수는 많아졌으나 실제로 처리한 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아마 세손 때문에 위협을 느껴 형식적으로라도 정사를 늘인 것으로 보인다.
정성왕후 삼년상을 마친 임금은 계비 맞을 준비를 했다. 66세 임금이 새장가 드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왕비는 국정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공인이었다. 후궁을 비롯한 모든 여관(女官)을 임면하고 통솔하는 책임이 왕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계비 정순왕후는 법적 아들인 세자와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 아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실의 어른으로서 점차 권력에 눈뜨게 되었고, 친정인 경주 김씨 집안과 세자빈의 친정인 풍산 홍씨 두 외척 집안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특히 2년 후 세자가 죽은 뒤로 두 외척 사이의 권력투쟁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임금이 27세 아들과 10세 손자 가운데서 한 사람을 후계자로 결정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미 임금의 속마음은 손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를 알고 있는 세자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죽음을 각오한 어떤 결단을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혜경궁의 마음도 임금과 비슷했다. 남편과 아들이 함께 살 수 없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바라보면서 남편을 포기하고 아들을 따르고 보호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홍씨 집안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 칼을 들고 경희궁으로 올라가다가 실패했다. <영조실록>에는 세자가 자신을 헐뜯는 영의정을 죽이러 갔다고 기록했지만 그 기록은 거짓이다. 차마 세자가 임금을 해치러 갔다고 쓸 수 없어 짐짓 거짓말로 둘러댄 것으로 보인다.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임금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지려면 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읍소했다. 다만 세손 모자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영빈 이씨도 혜경궁과 마찬가지로 세자의 행동이 본심이 아닌 병증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게 말해야 임금 체면도 서고 세자의 처지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자가 임금을 해하려고 야밤에 칼을 들고 경희궁으로 달려가다가 실패한 것은 사실인데 이것이 혼자서 한 일인지 부하들을 데리고 도모한 일인지 불분명하다. 앞서 있었던 사건으로 보아 부하들과 함께 거사하려다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처지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포자기 심정에서 부하들과 함께 거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스스로 죽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죽음에 임해서는 임금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을 보면 생명에 대한 애착도 결코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1년 앞둔 영조는 24세가 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게 15세였던 것에 비하면 너무 늦은 것이다. 하지만 영조의 판단은 현명했다. 어린 세자를 권력의 2인자로 만들어 14년 동안 거센 태풍을 맞고 쓰러지게 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는 세손이 정치 현실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을 때 대리청정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세손은 11세 이후로 13년 동안 임금 곁에서 시좌하면서 정치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대리청정 과정에서 세손이 과연 자신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세손의 등극을 방해하는 정적들을 노출시켜 세손이 스스로 그들을 제거할 수 있는 권한과 시간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윤음으로 정사를 시작한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영조의 정치적 처분을 문제 삼지 않았으며, 더욱이 탕평정책을 충실히 계승했다. 또한 탕평정책을 따르는 세력을 양성할 목적으로 규장각을 설치했다. 정조는 즉위하고 불과 9개월 만에 통치방향과 통치기반을 다져 놓았다. 이렇게 민첩하게 일을 추진한 것은 세손 시절에 이미 미래에 대한 구상을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