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Sep 11. 2023

정조평전, 성군의 길 (하)

한영우

지식산업사

2017년 9월 20일


<정조평전> 상권에서는 정조가 보위에 오르기까지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고, 그것이 그가 재위하는 동안 내린 모든 결정과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정조는 조선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 평가되는데, 그가 갖춘 자질과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영조의 후원과 조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효도사업


저자는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추진한 모든 계획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저자는 정조가 추진한 계획을 효도사업으로 명명하고 있다. 아버지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건설해 서울과 동등한 왕도를 건설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회갑을 기념해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행차를 다녀오고, 아들 순조가 15세 되는 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으로 은퇴하려 했던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에 행차하는 규범을 담은 <원행정례> 편찬을 명했다. 경비를 줄이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정례를 삼도록 한 것이다. 당시 강을 건너려면 배가 1천 척이나 필요했는데, 정조는 그 대신 1백 척 이하로도 가능한 배다리를 만들기로 하고 신하들에게 이의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주교절목>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만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자 자신이 직접 <어제주교지남>을 만들었다. 신하들이 만든 것은 배를 연결하는데 소요되는 소나무 수효를 과도하게 계산했고, 한강물이 조수에 따라 수위가 오르내리는 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소나무가 5천 주 필요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정조는 750주면 충분할 것으로 봤다. 실제로 정조가 계산한 수치가 맞았다. 정조는 배다리 설계를 직접 할 만큼 과학적 재주가 뛰어났던 것이다.”


이에 덧붙여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배다리를 만드는 데 동원한 경강상인의 배는 세곡을 운반하는 혜택을 주어 자발적으로 오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은 수원성곽을 건설할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조는 수원성곽 건설 총책임을 맡은 체제공이 백성과 승군을 며칠만이라도 부역시키자는 건의를 거절했다. 부역과 같은 무상노동이 아닌 임금노동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성역에 참여한 석수와 목수 등 노동자 수천 명에게 모두 근무한 날짜를 계산해 후한 임금을 지급해 성역이 빠른 시일에 끝날 수 있었다. 승려 목수들에게도 역시 임금을 주었다. 정조는 모든 백성과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 성역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부역을 없애겠다는 정조의 의지를 애민정신으로 평가했지만, 나는 오히려 정조가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국가적인 대역사를 무상노동이 아닌 임금노동을 기조로 추진했다면 다른 일도 부역으로 추진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국가경영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큰 진보가 아닐 수 없는데, 이후에도 그런 정책기조가 유지되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정조의 이런 의지는 농업과 상업을 생업의 두 축으로 삼아 농민과 상인을 다 같이 보호 육성하는 정책을 썼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정조는 정초마다 권농 윤음을 내리고 그 다음날에는 종로에 가서 시전상인들과 공인들을 만나 불편함이 없는지를 묻는 것을 정례화 했다. 또한 재위 15년인 1791년을 기점으로 통제정책에서 시장경제적 자유 상업으로 바꾸어 갔는데, 저자는 이런 정책이 정조가 재화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북학파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국가경영에 시장경제를 적용한 첫 번째 임금이 되는 셈인가?


“정조는 새로운 도시로 건설한 화성부를 가장 현대적이고 모범적인 농업도시, 상업도시, 군사도시로 가꾸어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평화롭게 즐기는 낙원도시를 만들고, 나아가 화성부를 서울과 동등한 위상을 지닌 국왕 직할의 자급자족 도시로 격상하고자 했다. 화성은 활과 칼을 가지고 싸우는 종전의 성곽이 아닌 총과 대포를 가지고 싸우는 새로운 전쟁에 알맞은 성곽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회갑잔치를 위한 화성 행차가 정해지자 정조는 모든 행사와 비용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도록 했다. 수행원이 수천 명에 이르며 수원부에서 치를 행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향교 문묘 참배, 현륭원 참배, 화성 행궁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 혜경궁 회갑잔치, 문무과 실시, 수원과 인근 지역의 가난한 백성을 위한 쌀 지급,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1795년 화성 행차는 워낙 규모가 크고 뜻 깊은 행사였기 때문에 행가 끝난 후 보고서를 정리해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만들었고, 화성 건설 전말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도 함께 만들었다. 이 두 기록은 실록보다 월등하고 자세하다.”


“행사의 총비용은 10만 냥으로 계획했다. 이는 백성들이 직접 낸 세금이 아니라 주로 돈과 곡식의 이자를 모아 만들은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10만 냥을 다 쓴 것이 아니고 남긴 2만 냥을 재원으로 ‘을묘년정리곡’을 조성해 기민을 구제하는 구휼곡이나 화성에 둔전을 만드는 비용으로 썼다. 화성의 가난한 백성에게 내려주는 쌀과 돈은 혜경궁이 베푸는 것으로 하여 내탕금에서 5천 냥을 충당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화성을 짓고, 혜경궁 환갑잔치를 위해 화성 행차에 나선 것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 모든 계획을 궁극적으로 정조가 ‘조기 은퇴한 후 화성에 칩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아들 순조를 지켜서 자신부터 시작해 성군 2대를 이어나가도록 만들려 했던 원대한 꿈이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모든 계획에는 아들 순조가 임금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15세가 되는 1804년을 기하여 은퇴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현륭원을 지키면서 만년을 보낸다는 원대한 꿈이 서려 있었다. 정조는 아들로서 효자가 되려는 꿈도 있었지만 임금으로서 성군이 되려는 꿈도 있었다. 그렇다면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한 상왕으로 있으면서 순조를 적극 후원하여 성군 2대가 지배하는 탕평국가로서의 민국을 완성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불행하게도 정조가 1800년에 세상을 떠나 그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영조가 지나치게 장기 집권한 것이 결과적으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뜻도 있지 않았나 여겨진다.”


애민정신


“정조는 무더위로 병을 얻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염려해 열병 치료제인 척서단 4천 정을 수원부에 내렸다. 척서단만으로 노동자들이 무더위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해 돌을 뜨고 기와를 굽는 장인들은 더위가 가실 때까지 공사를 중단시켰다. 한 가지라도 백성을 병들게 한다면 설사 공사가 며칠 안에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더라도 본뜻이 아니며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하는 것이 본뜻이라고 했다.”


정조의 개혁은 ‘백성의 나라’를 뜻하는 ‘민국(民國)’ 건설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종전의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民本)’보다 한층 진보한 개념이다. ‘민본’은 사농공상의 위계질서 속에서 사의 우위를 전제로 하여 농공상으로 보호한다는 뜻이지만 ‘민국’은 사농공상의 평등을 지향한다는 뜻이 강하다.


“정조는 왕실에서 비단을 추방하고 자신도 면포 옷과 베옷을 입었으며 겨울에야 명주옷을 입었다. 그것도 자주 빨아 해어질 때까지 입었다. 음식은 보통 하루 두 끼를 먹고 반찬은 서너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진귀한 진상품은 거절했다.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은 비가 샐 때도 많았지만 수리하지 않았다. 임금의 아들딸에게 지급되어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던 수만 결의 궁방전을 혁파하여 호조에서 세금을 받도록 했다.”


정조가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민국’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국’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심환지


2009년에 정조가 심환지에게 3백 통 넘는 어찰을 보낸 것이 발견되어 크게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정조 20년 5월에 보내기 시작해 승하하기 두 달 전인 정조 24년 4월까지 보낸 것이다. 정조는 보낸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읽은 후 폐기하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심환지는 이것을 고이 보관했다. 학계에서는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졌을 때 공개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평전> 상권에서 저자는 정조가 신하를 다룰 때 강온전술을 구사했고 필요하다면 술수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모습이 성군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은 면이 있지만 이로서 정치력 또한 범상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비판해 온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를 내심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흔이 가깝도록 정승 자리를 내주지 않고 겉돌게 만들었던 그를 정승으로 발탁한 것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그를 길들여 벽파의 저항을 무마하려던 속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환지는 겉으로는 정조의 정책을 칭송하면서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면으로는 다른 길을 갔던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심환지는 경종 때 소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인 신임사화를 겪으면서 소론이나 남인과는 협조할 수 없다는 당론을 고집해 정조의 마음을 애타게 했다. 그러나 처신이 청렴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정조는 새로운 탕평책의 중심인물로 활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조판서와 규장각 제학과 같은 중책을 맡기고 뒤에는 의정부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맡기면서 길들였다. 당시에는 시파 세력이 매우 강하고 벽파 세력이 미약했지만 당론을 일으키는 것은 주로 벽파였기 때문에 벽파의 지도자인 심환지가 탕평으로 돌아선다면 벽파 잔당을 제압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심환지가 정조의 말을 잘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심환지를 버리지 않고 계속 등용한 것은 그를 비롯한 노론 벽파를 어떻게든 길들여 복종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심환지는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정조로서는 쓰기도 어렵고 버리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노론 벽파를 기피한 이유


앞서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정조는 노론 벽파를 기피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소론이나 남인을 가까이 두게 되었다. 그것은 소론이나 남인이 임금과 신하 관계를 부자관계로 여기는 반면에 노론은 대등한 관계로 여겼기 때문이다. 정조가 성군이기는 하지만 신하를 대등한 관계까지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삼대가 한결같은 길을 걸어간 것은 당론을 주장하는 강경파 노론을 억제하고 소론과 남인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원래 노론의 뿌리인 서인은 정치적으로 재상이 중심이 되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선호하고 예송논쟁에서 보듯이 상복을 입는 경우에도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동등하게 보았다. 그래서 서인은 임금을 낮추어 보고 임금을 비판할 때에도 강경한 어투로 임금을 공격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런 서인의 전통은 노론으로 이어졌다. 노론은 명분을 존중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성향이 강했다. 노론과 달리 남인은 예송논쟁에서 상복을 입을 때 임금과 신하를 엄격히 구별했으며 임금과 신하관계를 부자관계로 보아 임금을 부모처럼 섬기고 충성을 바쳤다. 그러다 보니 탕평정책에서 가장 견제 당하는 것은 노론 강경파인 벽파들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 소론이나 남인들은 조선 초기 이래 명문가가 많아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 사회통합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소론은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실용학을 받아들이고 민족주의 성향이 컸고 18세기 통틀어 가장 급진적인 개혁사상가의 모습을 보였다.”


정조가 신하를 부자관계로 여긴 것은 단순히 신분 차이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경연을 기피해 신하들로부터 비판을 적지 않게 받았다. 물론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경연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조의 학문이 워낙 높아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신하들이 바라보는 정조의 단점 가운데 하나는 경연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간혹 경연을 하더라도 여기서 토의된 내용을 대부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이 점은 영조와 정반대였다. 경연은 본래 신하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기회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워낙 학문이 높아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고, 국정을 논의하는 것은 경연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경연을 기피한 또 다른 이유로는 경연이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경연에 나가지 않던 영조가 재위 36년에 갑자기 매일 경연에 참석했는데, 이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2년 후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죽자 이를 지켜본 정조가 경연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된 것이다. 정조 스스로 영조 때의 일을 말하면서 경연이라는 말만 들어도 정신이 날아가 안정을 찾지 못한다고 신하에게 고백한 일도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홍문관 교리 이청이 상소를 통해 “신하를 낮게 보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신하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천기와 지기가 서로 통해 위아래가 서로 사귈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진언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조는 그런 단점을 인정하면서도 신하들이 하는 일도 없고 좋은 정책을 내놓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도를 크게 바꾸지 않았다. 신하들의 수준이 그 정도였는데 노론 벽파에서는 군신관계를 대응하게 여겼으니 정조로서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조의 마지막 순간


“정조는 49세 되는,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로 접어든 1800년 6월 승하했다. 1월에는 원자를 비로소 세자로 책봉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너무 일찍 세자로 책봉되어 고립된 공간에서 살다가 불행한 결과를 맞은 걸 익히 아는 정조는 자신의 원자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자가 왕위에 순탄하게 오를 수 있었다. 또한 1월에 현륭원에 행차해 제사를 올리고 처음으로 그곳 재실에서 묵었다.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던 셈이다. 2월에는 세자 가례 준비에 들어가 초간택에서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김조순은 김상헌, 김창집으로 이어지는 명문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다. 이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는 후일 순원왕후가 되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기록만으로는 정조의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위중해 보이지는 않는다. 승하하는 날 점심 무렵까지 심환지를 만나고 오후 1시 무렵에는 어의가 진찰하겠다고 하자 이를 허락한다. 그리고 승하를 발표한 오후 6시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저자는 정조가 승하한 것은 그 이전이고 정순왕후가 세자에게 옥새를 전달하고 나서 승하한 사실을 발표한 것으로 판단한다.


“정조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의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확증은 없고 단지 그들이 당시 최고의 실세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던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은 이런 의심을 살만하지만 정조가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간 것은 사실이다. 다혈질 성품에 체질적으로 태양증에 속해 몸에 열기가 많았다. 원래 가슴이 갑자기 막히고 음식을 토하는 격기가 있었고, 과로와 당쟁으로 인한 화병이 겹쳐 기력이 쇠해졌다. 마지막 병증인 목과 등 뒤에 생긴 심한 종기를 치료하다가 사망했다.”


정순왕후와 심환지에 대한 의심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정조의 사인이 화병이라고 판단한다.


“정조는 승하하기 3년 전부터 가슴에 기가 치밀어 오르는 격기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이 병은 감정조절이 잘 안되어서 일어나는 증상으로, 평소에도 있었지만 화성 행차 이후로 더욱 나빠졌다. 한 해 전에도 정승이나 중신들에게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하여 신하들의 항의를 받고 자신도 후회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감정 조절이 잘 안되어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아마 화성 행차 뒤로 탕평책을 따르지 않는 근신들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허탈감에 빠지고 과로가 겹친 데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정조 사후 권력은 급속하게 노론 벽파의 손으로 넘어간다. 평소에 정조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데다가 권력까지 그 손으로 넘어갔으니 정조 독살설이 나고 그 배후로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지목되는 것도 심정적으로는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래도 저자는 독살설을 기각하고 있다.


“정조가 승하하자 아들 순조가 11세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나이가 15세가 되지 못했으므로 증조할머니로서 대왕대비에 오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고, 심환지가 실권을 장악했다.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실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정조를 적극 따르던 노론 시파와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 등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정순왕후집안과 사이가 나빴던 풍산 홍씨 세력도 핍박을 받아 혜경궁 홍씨가 자살할 생각을 할 정도로 고립되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정조의 시대는 이렇게 저문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