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승 엮음
한울엠플러스
2017년 6월 1일
이웃과 불편하게 지내는 것은 몹시 고단한 일이다. 국가라고 다르겠는가. 더구나 우리와 적으로 지내야하는 국가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국가마저 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랬을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심리적, 물리적, 경제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럴 마음이 사그리 없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과 독일은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오래 전에 폴 레버의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에 언급된 과거사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그 인식이 현재 어떤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는데 그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모습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그저 전쟁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 책임도 다르게 느끼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우연한 기회에 <제2차 세계대전과 집단기억>이라는 제목을 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2015년 12월 한양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의 책임을 외면하고 더 나아가 책임조차 부정하는 생각의 뿌리가 무엇인지, 일본과 독일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가 어떻게 지금의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이 책에서는 전범국가인 일본과 독일 뿐 아니라 승전국이자 피해국인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전쟁에 대한 집단기억을 다루고 있다. 나는 평소에 관심이 있던 일본과 독일의 전쟁인식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전쟁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결국 전쟁을 ‘기억’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 리뷰에서는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겠다.)
일본의 집단기억은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가 집필한 1장(총론)과 미국 켄터키대학 역사학과 아키코 다케나카 교수가 집필한 2장(각론)에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1995년에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평가였다. 아키코 교수는 역사가 요시다 유타카를 인용해 무라야마 담화가 상황에 밀려서 내린 전략적인 판단이었다고 평가한다.
“고이즈미 담화에서 언급한 사죄는 전시 역사에 대해 명확한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 일본에게 필수적이었던 대외정책 때문에 행해진 것이었다. 역사의식이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적 비난에 대한 정치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범법행위를 완전히 인정한 것이 아니고 중국과 한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것은 그 담화의 정신을 대중에게 교육하지 않았고 담화 내용을 홍보하지도 않은 것으로 입증된다.”
이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주류 인식인지 일부 진보학자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지는 모르겠다. 그동안 이런저런 계기가 있어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한 것을 여러 차례 읽었고, 그러면서 대중과 다른 목소리를 낸 그의 결단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필자에 따르면 상황을 보니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인데, 그의 글에서는 그럴만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면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고, 지금 일본 진보학자들이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런 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그 진보학자 74인은 이 학술대회가 있기 몇 달 전 <전후 70년 총리담화에 대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무라야마 담화를 ‘전체로서 계승한다’는 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명확히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1931년부터 1945년 사이의 전쟁은 ‘일본이 행한 위법적인 침략전쟁’이었나는 것은 국제법과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국제적인 평가가 정착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각지의 시민단체들도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런 진보학자들의 전쟁인식은 일본 정부와 국민 대다수의 인식과 현저하게 다르다.
“아베 담화에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침략전쟁이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의 뜻만 밝혔다. 전쟁에서 300만 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도쿄를 비롯한 도시 폭격, 오키나와 지상전으로 많은 이가 비참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일본인과 전쟁 상대국의 희생은 언급했지만 징병이나 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한국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피해와 고통을 준 가해의 책임을 짧게 언급했지만 그 가해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과거 전쟁에서 벌인 일에 대해 반복해서 통절하게 반성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표현해왔다’면서 ‘그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 없을 것’이라는 문장에서 유일하게 반성과 사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논리이니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인식은 절망스럽다.
“전쟁 이후 태어난 이들이 전쟁 문제로 계속해서 사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세계 평화와 번영과 인권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 평화주의’를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적극적 평화주의’는 실은 군사력 강화, 집단 자위권 확보, 대외 영향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반된 인식은 일본 보수 우파와 진보파를 대변하는 언론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일본 국민 중 진보파의 인식에 동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물론 소수이기는 할 것인데, 그것이 의미 있는 소수인지 의미도 존재도 없는 소수인지 모르겠다.
“일본 보수 우파를 대변하는 <산케이신문>은 사설에서 아베 담화가 세계대전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느낌을 표명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또한 무라야마 담화는 과거 역사를 일방적으로 단죄해서 거듭되는 사죄와 끝나지 않는 보상 청구의 요인이 되어 국익을 손상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진보파를 대변하는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이 담화는 나올 필요가 없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침략 책임이나 사죄 의사가 애매한 담화로서 무라야마 담화에서 분명하게 후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베 담화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인식도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중국 신화통신과 인민일보는 불순한 사과, 성의 부족, 애매한 태도, 공공연한 국제법 멸시, 자국민 오도라며 비난했다. 대만 총통은 역사를 직시하고 진정성을 갖출 것,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과거의 행동을 반성할 것을 요구하며 유감을 표명했다. 반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정부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국 백악관 대변인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미국 언론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며 비판했다. 영국 <가디언> 역시 이웃 나라들을 분노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동아시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긍정 평가에 대해 이해라도 하겠다. 그런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역시 전쟁 피해국인데 왜 아베 담화에 대해 긍정 평가를 내린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학술대회에 참석한 학자들에게는 이런 배경 설명이 필요 없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대중서로 출간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중국과 함께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모두를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간주한다. 일본 역사학계의 다수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역사학계 주류의 견해가 후소사에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발간한 2001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후소사 역사교과서에서는 이 모든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볼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오히려 일본의 안전보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며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일본 ‘자유주의사관’ 또는 ‘역사수정주의’ 학자들은 태평양전쟁이 아시아 해방전쟁 성격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이미 상당수의 보수 우익 정치가와 관료와 지식인과 문화인이 동조하고 있다. 과거 일본 국민 가운데 이를 침략전쟁으로 보는 이들이 60~70% 정도였지만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침략전쟁이 아니라는 응답이 33%, 침략전쟁이라는 응답이 45%로 비슷해졌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평가는 그와 같은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배경으로 여길만하다.
“전후 일본인들은 전쟁 도발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일본 군부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지목된 이들이 전쟁 도발의 책임을 지고 세상을 떠났고 일반 국민은 전쟁 책임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반 국민은 자신들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가졌다. 매년 열리는 히로시마 희생자 추모식에 총리도 참석하는데 이로서 일본인은 피해자라는 의식이 더욱 확산되었다. 또한 전범으로 지목되었다가 풀려난 이들이 공직에 속속 복귀하면서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은 거의 사라져갔다. ... 일본 사회는 전쟁 책임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수의 사람은 그와 같은 의식에서 거리가 멀다.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은 일본인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하고 가해자라는 의식이 약하다. 더욱이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 중국과 한국의 비난은 전후 세대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후 세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일본이 모든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도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무리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그것이 나라고 해도 다르지 않겠다.
그렇다면 그와 동일한 여건에 있는 독일의 현 세대가 과거사에 책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사학과 피터 프리체 교수가 설명하고 있는 독일의 집단 기억은 놀랍게도 일본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독일인들은 전쟁을 기억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에 나섰다. 그들은 전시 과거를 선택적으로 미화하고 심지어 그것에 매료되기까지 했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독일인의 전쟁 비극, 드레스덴과 같은 도시 폭격, 1200만 명 정도 독일인들이 전통적으로 독일의 영토였던 동유럽으로부터 축출을 강조했다. 1950년대 전쟁 서사에서는 독일인의 수난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독일이 피해자의 나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상실과 실향의 경험으로 특징 지워지는 공동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동유럽에서 독일인이 당한 수난을 다룬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주제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도 지속적으로 미화되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듯 그들 역시 끔찍한 고통과 엄청난 파괴를 겪었다. 나치즘은 그저 국가를 배신한 광적인 지도자들의 문제로 축소되었다. 유대인에 관한 토론은 거의 없었다. 독일인은 히틀러가 시작했고 나머지 모두가 패배한 전쟁의 피해자로 여겼다. 올리버 히르슈비겔은 논쟁의 여지가 있던 그의 2004년 영화 <몰락>에서 광적인 나치와 좋은 독일인을 구분했다. 유대인의 범죄는 독일인의 범죄가 아닌 나치의 범죄로 묘사되었다.”
일본의 집단기억의 판박이 같다. 하지만 저자는 1980년대 초에 열린 역사경연대회가 기폭제가 되어 전쟁에 대한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의 인식이 극적으로 달라졌다고 서술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아이들과 그 손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대는 달랐다. 이들은 나치와 그들이 시작한 전쟁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전쟁 세대들의 행위를 비난하기보다 그 정체를 알려고 했다. 1980년에서 1893년 사이에 연방 대통령인 바이츠제거의 후원을 받아 열린 역사경연대회가 기폭제가 되었다. 히틀러 집권 50주년에 맞춰 기획된 이 대회에서 십대들은 부모와 조부모의 기억과 역사를 검토했다. 여러 지역에서 관련한 수 백 편의 연구보고서를 전시했다. 이 경연대회는 전후 독일 역사에서 기억을 전화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결과 사죄를 이끌어 냈고, 연구를 촉진시켰고, 대안적이거나 추가적인 서사를 형성했다.”
그러면서 전쟁에 대한 독일의 집단기억은 ‘여전히 감상적이고 편파적이며 독단적이고 자기변명적’인 모습과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고 자기비판적’인 모습이 공존한다고 서술한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국가별 집단기억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정리한 것이다. 집단기억의 차이가 어떻게 행동의 차이로 연결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궁금했던 것이어서 몹시 아쉽다. 다만 전쟁 끝난 직후부터 독일의 전쟁인식이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는 않았고 1980년대 초에 열린 역사경연대회가 계기가 되어 지금과 같은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은 소득이다.
참고로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에 실린 독일의 전쟁인식과 그에서 출발한 차이가 현재에 어떤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서술을 인용한다.
“‘홀로코스트 추모’는 단지 모든 정당의 지도자들이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정신은 현대 독일의 모든 문화와 담론에 스며들어 있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우고, 강제수용소를 방문한다. 역사가와 사회학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국가’로 인식할 국가규모의 공공 행사도 없고, 통일기념일조차도 지역 차원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내보이는 일을 지나치리만큼 두려워하며, 혹시라도 그것이 나치가 선동을 목적으로 개최했던 연례행사인 ‘뉘른베르크 랠리’를 떠오르게 하지나 않을까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세계 최고의 전투부대였다. 만슈타인, 롬멜, 구데리안의 전술은 아직도 군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영웅으로 칭송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영국과 미국 관리 대부분은 독일 연방군의 역량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규모나 능력을 내세우지도 않고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병영 밖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한다. 복무 중 순직할 경우 시신은 눈에 띄지 않게 돌아오며, 그 시신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독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유럽 어떤 나라도 독일을 군사적 위협요소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일 정부가 군사력 사용을 꺼린다는 점을 걱정할 정도이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던 독일이 책임을 인정하게 된 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서술된 책을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독일에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반면에 일본에서는 그런 전환이 일어나지 않은 원인을 분석한 책이 있는지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