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
오월의봄
2021년 7월 29일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여긴다. 그것이 돈이 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돈을 절약하는 길은 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우선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치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흔들림 없이 일상을 유지하는 방편이 되는 일이며, 그러다 보니 건강을 지킬 수 있어 노후에 가장 큰 부담인 의료비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다. 게다가 견문을 넓힐 수도 있으니 책 읽기의 덕목은 든든한 재산에 비할 바 아니다.
혁명가들의 독서 편력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꼽아놓았던 책을 이제 읽었다. 독서 편력에 대한 책이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내공을 보여준 저자가 쓴 책이어서 기대가 컸다.
저자는 워낙 식민지 조선에서 유행했던 비밀독서회의 문화사를 쓰려고 했단다. “억압의 시대에 책을 통해 희망을 얻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에 나섰던 식민지 청년들이 누구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밀독서회에 더해 그가 거론한 여러 혁명가들의 독서 편력도 흥미롭고, 당장 지금까지 가져왔던 책 읽는 방식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실마리도 찾았다. 감사한 일이다.
“홍명희의 책읽기는 완독이었다. 그는 일단 책을 한번 집어 들었으면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완독을 지향했다. 중간에 필요 없는 내용이 있더라도 그 책을 다 읽기까지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재미있는 책은 재미있는 대로 재미없는 책은 다른 재미있는 책을 얼른 읽기 위해 악을 쓰고 빨리 보았다. 홍명희의 글쓰기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지식의 통합을 이루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낯선 것들과 마주하는 것을 즐겼던 다독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글을 쓸 때 자신이 어떤 자료를 참조했는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나 역시 오랫동안 완독을 지향했다. 그러다가 은퇴하고 책읽기를 직업으로 여기면서 완독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책을 사면 아까워서라도 책을 샅샅이 읽었는데 책값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그런 면에서 자유로워졌다. 한 해 독서 목표를 세운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목표를 세우니 자꾸 숫자에 연연하게 되어 지루하거나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책을 꼭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서 완독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책읽기 방식을 한 번 되돌아볼 필요는 있겠다.
글을 쓸 때 어떤 자료를 참조했는지 분명하게 밝혔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평생 보고서 쓰는 일을 하고 살아왔다. 보고서는 무엇보다 근거가 분명해야 하고 독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여지를 남겨놓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글쓰기와는 다르다. (설계보고서는 설계한 내용을 구체적인 구조물로 형상화시키는 안내서이니 해석이 달라지면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일전에 출간한 번역서에 해제를 붙일 때 편집자가 해제에 인용한 숫자가 틀린 것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몹시 놀랬던 일이 있다. 나야 항시 인용한 사실에 대한 근거를 남겨놓지만 솔직히 누군가가 그것을 확인할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인용할 때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홍명희는 러시아 시와, 체호프의 소설과 프랑스 소설을 번역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도 번역했다. 그는 일본어를 경유한 중역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41세였던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했는데 이때 조선말을 살리는데 비중을 두었다. 이를 두고 한글학자 이극로는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가 쏟아지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고 했고, 소설가 한설야는 천 권의 어학서를 읽는 것보다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밝혔다.”
요즘 우리말과 우리글이 변해가는 모습을 몹시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으로서 홍명희가 조선말을 살리는데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 새삼 반갑다. 요즘 우리말과 우리글의 맛을 잘 살려서 쓰는 작품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시도는 아무래도 문학작품에 나타날 텐데,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런 평가가 있는 작품이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임꺽정>이 그렇다니 읽어봐야겠는데 무려 열 권짜리이다.
“단재 신채호는 혁명을 꿈꾼 전형적인 독서가였다. 26년 망명생활동안 무장투쟁을 통한 조선의 혁명을 부르짖으며 역사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속독에 능했다. 당대 사람들은 신채호의 독서법을 ‘일목십행’이라고 했다. 한 번에 열 줄을 읽는다는 것이다.”
책읽기를 직업으로 여기는 나도 아직 한 해에 백 권을 읽어보지 못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더 부지런히 읽었으니 한 번 기대해볼 만도 하다. 그런데 어지간한 책은 세 시간이면 읽는 사람도 있고 한 해에 팔백 권을 읽었다는 이유로 명사가 된 사람도 있다. ‘일목십행’이라면 가능한 일이겠다.
나는 영어로 된 기사를 읽을 때 인터넷 번역기를 애용한다. 전체를 번역한 것을 읽으면서 내가 알아야 할 부분을 확인하고, 그 부분을 영어로 다시 읽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책도 필요한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일목십행’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요한 부분을 확인하는 작업을 책을 읽은 것으로 여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신채호는 집필에 앞서 번역을 선택했다. 이탈리아 독립에 기여한 마치니, 가리발디, 카보우르를 다루는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했다. 그는 중국어를 경유한 중역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이탈리아 세 영웅에 비견할만한 한국사의 영웅을 발견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을지문덕과 최영과 이순신을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했다. 신채호의 영웅전을 독자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출판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민족을 핵심으로 삼지 않는 모든 형태의 역사 서술을 거부했다. 그에게 민족을 도외시하는 역사 서술은 그저 영혼 없는 역사일 뿐이었다. 이는 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를 대신할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민족을 주목한 결과였다.”
의도 없이 책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채호는 영웅을 발견해 독자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글을 썼다. 그런데 역사는 이와 달라야 하는 게 아닐까? 의도를 가지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요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국뽕’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글도 그렇지만 특히 역사에서 ‘의식의 과잉’은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물론 신채호의 글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상해 한 여관에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은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역사적인 문서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창조파와 기존의 임시정부를 뼈대로 삼아 개조해야 한다는 개조파가 팽팽히 맞섰다. 그는 무장투쟁론을 독립운동 노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외교활동에 치중한 임시정부를 타협주의자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학자 대부분은 신채호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사상적 지점이 아나키즘이라고 이야기한다.”
위키백과에서는 신채호를 민족주의 사학자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의 견해대로라면 그는 사학자가 아니라 사상가라는 게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한다.
“김구도 감옥에서 첫째가는 생활로 독서를 꼽았다. 1899년 1월 이승만이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 있을 때 미국인 선교사들이 넣어준 책들을 바탕으로 감옥도서관이 생겼다. 김구가 서대문감옥에 갇혀있을 때도 이 책들이 있었다. 후일 서대문감옥에 갇힌 김구는 이를 ‘역대의 진귀한 보물’로 여겼다. 감옥도서관은 265권으로 시작해서 523권으로 증가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기증으로 시작된 곳이라 기독교 관련서적이 적지 않았으나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서적도 상당했다. 그래서 김구는 이승만의 손때가 묻은 책을 읽었다고 회고했다. <태서신사>에 감화를 받은 김구는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에 전념했다. 기독교 신자가 된 1903년(28세)부터 중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떠난 1919년(44세)까지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30대 대부분과 40대 초반을 교육운동에 헌신했는데 이로서 감옥에서 읽은 책 한 권이 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알 수 있다.”
이승만과 김구의 인연도 흥미롭고 그때 읽은 책 한 권으로 위인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위인의 삶을 바꿔놓은 <태서신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태서신사>는 1890년 동아시아 독서계를 뒤흔든 책이다. 이는 유럽근대사라고 할 수 있는 1880년 로버트 맥켄지의 <The 19th Century>이다. 이 책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871년 보불전쟁까지 19세기 유럽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김구는 이 책을 읽고 위정척사 사상과 결별했다. 그동안 오랑캐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서양인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조선이 옛 사상과 옛 지식으로 위정척사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배외사상으로 똘똘 뭉쳤던 김구의 인생이 또 한 번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목할 점은 <태서신사>가 부국강병의 방법으로 교육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김구는 탈옥 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육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를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로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서신사>는 당대 교육개혁에 관한 필독서였다.”
“김구의 독서는 독행일치의 독서였다. 그의 독서에서 책과 삶은 분리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독서와 실천이 어우러지는 삶을 살았다.”
독행일치의 삶, 언행일치의 삶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김구는 위인의 반열에 들 만하다. 그렇기는 해도 누구라도 독행일치의 삶은 꿈꾸는 것이 마땅하다. 나 역시 독행일치의 삶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이전보다 바르게 되었고 따뜻해졌다는 것은 느낀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아지기를 꿈꾼다.
“김산의 독서는 단테적 심리를 졸업하고 톨스토이즘과 아나키즘으로 나아갔고 곧 사회주의의 현대철학인 마르크시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중요한 점은 톨스토이를 읽었던 독서 체험이 그를 폐쇄적이며 경직된 혁명가로 만들지 않는 내적인 힘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는 독자들로 하여금 고통 받고 있는 타자에 대한 공감을 눈뜨게 해주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톨스토이에 심취한 독서가들의 다수가 혁명가가 된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읽고 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책은 대체로 ‘인간에 대한 예의, 타인에 대한 공감’을 표한 책들이 아닌가 싶다. 아마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인도주의일 것이다. 나는 톨스토이의 책을 읽어본 일이 없다. 일단 분량으로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고 만연체로 쓰여서 읽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한 책도 문장이 매우 길어서 번역해 놓고 나니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문장 하나를 몇 문장으로 끊어서 번역했다. 하지만 문학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가능한 저자의 문체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을 것인데. 아무튼 저자가 언급한 대로 톨스토이의 작품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공감’을 눈뜨게 했다니, 그 공감이 독자를 혁명가로 이끌었다니 더 이상 읽기를 미뤄두지 말아야겠다.
저자는 당초 책의 주제로 생각했던 비밀독서회와 관련해 “식민지 조선의 혁명가들은 토론회와 강연회를 통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지만 독서회에서 이루어지는 책읽기 모임이야말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효과적인 창구였음을 잘 알았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비밀독서회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 만큼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하나의 책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는 공동체적 독서인 회독(會讀)’의 영향인 것으로 진단한다. 그리고 회독의 강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질문의 힘이다. 기본적으로 회독은 책을 미리 읽고 와야 하는 묵독과 참가자 간의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책을 읽으며 갖게 된 생각과 의문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던져보는 건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비밀독서회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질문의 힘을 키움으로써 체제에 물음표를 던지도록 해주었다. 비밀독서회가 주도한 동맹휴학이 식민지 교육에 저항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질문의 힘은 학생들에게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를 가져다주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어떤 모순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 무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단과 대안은 무엇인지를 비밀독서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회독의 대등성이다. 토론은 참가자 간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문화에서 토론이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의 공유를 들 수 있다. 회독은 참가자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토론한다.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이들의 토론이 텍스트에 대한 토론으로 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표가 끝나면 반드시 현실과 결부시켜 비판과 토론을 벌였다. 단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살아있는 지식으로 비판적 재구성을 했다.”
귀국하고 나서 젊은이들의 독서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그 모임에 아주 적절한 조언이 될 것이다.
비밀독서회에 대한 언급 중 아래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민족 쇠퇴의 원인을 타락한 민족성에서 찾고 그 대안으로 민족성의 도덕적 개조와 정신적 개조를 제시하는 일제의 지배논리’와 맞닿아 있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비밀독서회의 하나인 상록회의 모든 회원은 이를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책’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1937년 3월 9일 이를 바탕으로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독자가 해석하는 건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드러내고 보여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록회 회원인 이병주는 이를 읽고 ‘조선 민족에게 갱생의 길이 있다고 확신’했고 남익환은 ‘조선 청년에게 민족을 구제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최기수는 ‘조선 자체를 구하는 것은 현 청년의 두 어깨에 있다’고 역설함으로써 청년의 분기를 촉구하는 책으로 독해했다.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제할 수 있겠다는 신념을 이광수를 통해 갖게 된 것이다.”
책은 읽기 나름이라는 말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