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갈등의 출발점
이웃한 나라끼리 사이좋은 경우가 없다고는 해도 우리만큼 적대적인 경우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한일 갈등은 유별나다. 나는 그 갈등의 뿌리가 ‘사과’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 주한일본대사는 최근 발간한 그의 저서*에서 “사과한 것을 뒤집어버리고 다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정의가 털끝만큼도 없는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이 사과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몇 차례 공식 비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한 일은 있지만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표현이 적반하장으로 밖에 들릴 수 없고, 따라서 양국의 갈등 해소는 요원해 보인다.
이 책에서 심리학자인 게리 체프먼과 제니퍼 토머스 부부는 “상담을 하다 보면 한 사람은 분명히 사과했다고 주장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개선책을 제시하지 않으며 책임감조차 없이 유감만 표현하는 사과는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미안하다’는 사과의 필수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며, 상대가 사과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사과의 충분한 조건을 마저 채워야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사과’는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관계를 망가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업을 도산하게 만들기도 하고 정치인을 파멸로 몰아넣기도 한다. 반면에 ‘올바른 사과’는 문제의 수습책일 뿐 아니라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이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세를 뒤엎는 매우 공격적인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올바른 사과’는 단순히 처세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치철학이요 경영전략인 셈이다.
저자는 사과를 ‘리더의 언어’로 잘 구사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오바마 대통령을 들고 있다. 그도 사람인지라 후보자 시절부터 여러 구설수에 올랐지만, 그때마다 매우 빠르고 효과적으로, 무엇보다 진심을 담아 사과했고,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감추거나 축소하지 않고 ‘투명하고 신뢰를 주는 리더십’을 실현해왔다. 그는 사과를 하는 사람이 패자가 아니라 사과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패자라는 진실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사과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라면 사과의 방법을 무시해도 괜찮겠다. 저자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잘못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적절하게 사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훨씬 현명한 적약(適藥)일 것”이라고 조언한다.
사과하면 문제를 수습하거나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수 있는데 왜 많은 사람들은 사과하는 걸 망설일까? 아마 사과하기 위해 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관련한 통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며 미국 대학병원의 의료사고 사례를 들고 있다.
일리노이 주립대학 병원에서 수년간 조사한 결과, 병원 측이 의료사고에서 자기 실수나 잘못을 환자에게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사례가 37건이었는데, 그 중 환자가 소송을 진행한 것은 딱 한 건이었다. 하버드, 스탠포드, 미시간, 버지니아 등 미국 주요 대학병원들은 의료사고가 일어났을 때 잘못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환자에게 유감의 뜻을 전하는 것은 물론,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책까지 제시하는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미시간 대학병원의 경우, 이 프로그램을 처음 실시한 2002년에 262건에 달했던 의료사고 소송이 2007년에는 83건으로 대폭 감소했다. 소송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소송까지 가더라도 피해자 측과 합의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존스홉킨스 병원에서는 의료사고가 일어났을 때 더 이상 ‘부인과 방어’의 패러다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환자 가족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의료사고를 완전히 없애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계속 ‘부인과 방어, 그리고 소송’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송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환자와 의사의 고통도 덜고, 의료사고로 인한 불필요한 병원지출도 줄일 수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을 담아 사과하면 이와 같은 실질적인 유익을 거둘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실수나 잘못을 계속 은폐하거나 방어하면 실수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한 건의 의료사고가 향후 열 건, 백 건의 의료사고를 예방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고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사과는 문제의 예방책이요 해결책일 뿐 아니라 당사자의 심리적 고통과 금전적 손실을 줄이고 평판을 향상시키는 매우 실질적인 전략이요 전술이다. 물론 사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하는 게 대체로 낫기는 하다. 사과도 마찬가지일까? 그럴 수 있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당신이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고 치자. 혹은 카페에서 누군가의 옷에 커피를 쏟았다고 치자. 이때는 재빨리 사과하는 게 최선이다. 아론 라자르는 “우연히 발생한, 개인적이지 않은 사건이나 심각하지 않은 사건에서는 빨리 사과를 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늘 그렇지는 않다. 저자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미처 화를 내기도 전에 먼저 사과를 하는 건 그저 사건을 빨리 정리하고 끝내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화를 식힐 시간, 즉 일종의 ‘분노 숙성 단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상대방에게 “내가 왜 화가 났으며, 얼마나 화났는지” 드러내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한 다음에야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제가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사과를 받아들일 마음의 상태가 만들어진다.
저자가 말한 ‘상황에 따른 사과의 시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 내가 잘못을 저지른 시점부터 이를 깨달은 시점까지 시간이 짧을 경우에는 빨리 사과하는 것이 좋고(남의 발을 밟은 경우), 긴 경우에는 먼저 상대방의 감정을 듣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 뒤 사과하는 것이 적절하다(약속을 잊어버렸다가 나중에 깨달은 경우). 대중을 향한 공개적인 사과는 빠른 것이 낫고, 개인적인 사과는 적절히 늦춰진 상태에서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 ‘빠른 사과’를 ‘성급한 사과’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과란 가해자가 자기 잘못을 제대로 인식했을 때 가능한 것이지, 단지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밝혀지기도 전에 서두를 일이 아니다. ‘늦은 사과’는 단순히 사과 시점을 늦추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받은 상처를 충분히 경청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쳤는가 하는 점이다.
사과란 자기 잘못이나 약점을 상대방에게 스스로 노출하는 것이다. 자기 약점을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사과는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노출을 하느냐 마느냐, 한다면 얼마나 할 것이냐에 따라 축소 은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다시 신뢰를 회복하기도 한다. 저자는 노출 기술의 핵심은 “자기 약점이나 불편할 수 있는 진실은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공개했을 때 효과적”인 것을 깨닫는 데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과에도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사과의 기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 “미안하다”는 말은 유감(regret)의 표현이지 완전한 사과는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 뒤에 ‘하지만’, ‘다만’ 같은 말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미안해, 하지만 네가 약속을 너무 촉박하게 잡았잖아”라는 표현은 사과라기보다는 비난에 가까우며, 당연히 역효과를 부른다.
○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구체적인 사과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분 나쁘게 했다면 미안해”라는 표현은 ‘자신이 뭘 잘못했느냐’는 얘기이므로 이 또한 상황을 악화시킨다.
○ 자기 책임을 인정한다는 뜻을 명확히 표현해야 한다. 한 쪽은 사과했다고 하는데 상대방은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같은 차이는 주로 사과에 ‘책임 인정’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나 보상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기업이 사과문을 내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놓고 이후에 동일한 실수를 반복했을 때 이런 표현은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
○ 용서를 청해야 한다. 물론 용서를 청하면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수 있거나, 자신이 ‘실패한 인간’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사과는 성립하지 않으며, 당연히 상대에게 사과로 인정받지 못한다.
어렵게 사과를 했는데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면 사과한 사람은 얼마나 허망할까? 이런 역효과는 사과가 순수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단지 순간을 모면하거나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 하는 사과가 그렇다.
사과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그로 인한 쓴맛을 기꺼이 보겠으며, 다시는 그런 잘못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서 피해자가 사과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이런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않고서 어떻게 상대방이 받아들이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는 중에 앞서 언급한 전 주한일본대사의 비난 발언을 접했다. “사과한 것을 뒤집어버리고 다시 사과를 요구한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무엇이 ‘사과’인지 살펴봤으면 좋았겠다 싶다. 물론 과한 기대인 줄은 안다.
* <문재인, 한국에 재앙> 무토 마사토시, 비봉출판사 20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