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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어떤 양형 이유

사람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법 이야기

by 박인식

박주영

김영사

2019년 7월 26일


법과 사람


최근에 이런저런 이유로 법과 법의 적용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법이 생각보다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도 들고, 법이 적용되는 구조로 보아 법학이라는 것이 오히려 이과로 분류되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유무죄 여부와 양형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법의 논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어서 문과적인 접근방식이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자는 7년간 변호사로 일하다 경력법관제도로 판사가 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누군가를 변호하는 일로 법조인의 삶을 시작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판결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의 삶이 빠져 있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그는 사법연수원에서 사건기록을 바탕으로 시험 쳤을 때 그다지 어려움 없이 풀었던 문제들을 실제 재판에서 마주쳤을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했던 것을 기억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실제 재판은 판단이 훨씬 어렵다.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시험용 기록은 구체적 인간이 빠져있어 법적 정합성만 문제되지만, 실존하는 사람이 기록에 중첩되어 보이면 정답이 흔들린다.”


저자의 말대로 “소년 재판을 할 때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 법정 구속되어 유치감으로 들어가는 피고인의 눈빛, 전 재산을 사기당한 피해자의 눈빛, 성폭행 피해여성의 분노와 수치심에 가득한 눈빛, 꽃 같은 딸이 살해된 부모의 눈빛, 빚에 쫓겨 떠도는 파산자의 눈빛”을 눈앞에 두고 판결 내리는 일이 어디 온기 없는 사건기록으로만 판단하는 일과 같을 수 있을까. 법은 냉정한 것이지만, 그 법이 사람에게 적용되는 한 결국 재판 역시 사람 이야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적 영역일 수 없는 가정폭력


당연해야 할 일이지만 자라면서, 그리고 자식이 가정을 꾸린 오늘까지 가정폭력을 겪지도 않았고 주변에서 보지도 못했다. 겪지도 보지도 않은 일이니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짐작할 수 없었고, 관심을 둘 이유 또한 없었다. 그래서 폭력이 있으면 어떤 상황이건 간에 법에서 정한 대로 처벌하면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가정폭력 사건을 다루는 일에 냉정해지지 못한다.


“많은 사건을 처리했지만 가정폭력에 얽힌 사연은 늘 새롭고 힘겹다. 가정폭력이 유독 견디기 힘든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폭력과 상처의 내력 때문이다. 무덤덤해지다가도 피해자들 내면의 깊은 고통이 기습적으로 전이되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다.”


소아마비에 가벼운 지적장애를 가진 채 가족과 세상에서 소외돼 힘겹게 살아온 여인이 있었다. 그런 중에 남편은 자기에게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사람이었다. 이 여인은 남편에게 매 맞는 것이 일상이었고 급기야는 남편이 찌른 칼에 중상을 입는다. 당연히 실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범죄에 대해 저자는 크게 갈등한다. 남편을 무겁게 벌하는 것이 과연 피해자에게 최선이 될지 고민한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겪을지 모르는 신체적 위협보다 남편의 부재로 지금 당장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소외와 외로움이 피해자에게는 더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신산스러운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피해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가정폭력으로부터 구호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성숙했는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피해가 이렇게 커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사적영역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면서 가정폭력이 더 이상 사적영역에 머물러서 안 될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가정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겪었거나 여전히 시달리고 있을 악몽의 편린을 기록과 재판으로 마주했는데도 그 상흔에 놀랄 지경이라면, 피해자들이 겪었을 그 고통의 심연이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가정폭력에 대한 불개입 풍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가정은 사적 영역이므로 가급적 자제되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 가정이 가정으로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폭력으로 고통만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중학교 때 문제아로 살았다. 그렇게 살았으니 아니라고는 못했지만, 그것이 모두 내 탓이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상황이 문제였는데 누구도 그것을 보려하지 않았고 오직 드러난 결과만으로 내게 손가락질 했다. 소년 재판에서는 보호자가 소년과 함께 법정에 출석해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나를 대변해주는 건 고사하고 내 말을 들어줄 보호자가 곁에 없었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억울한 일인지도 몰랐다.


저자는 소년부 부임 초기 순진무구한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성인들과 달리 얼마든지 교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판결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에 인간으로 직접 개입한다는 사실에 책임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걱정하고 선처해 준 아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죄를 짓고 돌아와 갖은 변명과 순진무구한 표정을 반복하는 걸 보면서 배신감을 느꼈고, 말할 수 없이 무력했고, 아이들에 대한 처분이 자연스레 엄해졌다. 재판을 준비하는 시간도 줄어서 무력감은 순식간에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재판이 거듭될수록 쌓여가는 공허함과 찜찜함은 채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세월을 간과한 걸 깨달았다. 존재 자체가 불행이라 여기는 아이들을 두어 달에 한 번 만나 고작 10분 재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상처가 큰 만큼 치유 시간 역시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몰랐다. 그 후로 저자는 위로와 독려의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암담하고 변화가 미미해도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호자는 물론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포기하는 순간이 아이들의 미래와 희망이 정지하는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모두 엄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이들을 유기하고 방치하고 학대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부모와 가족, 같은 마을 사람인 우리도 함께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법 개정을 이끌어내 소수자를 보호한 하급심의 반란


뒤늦게 철이 들어 성소수자가 겪는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차별금지법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런데도 얼마 전까지 성전환자는 ‘부녀’가 아니어서 강간을 당해도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성장기부터 남성에 대한 불일치감과 여성으로서 귀속감을 나타냈고, 성인이 된 후 상당기간 여성으로 살았고, 전문의 진단을 거쳐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여성의 성기와 외관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 50대 여성으로 성정체성이 확고하고, 남성으로 재전환 가능성이 없고, 과거 30여년에 걸친 삶을 통해 여성으로서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자타 모두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강간당했을 때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당시 대법원 판례에서는 성전환자를 ‘부녀’로 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을 부정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사건이 진행될 당시까지 성전환자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본 적이 없었고, 불편한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으며, 그 삶에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성전환자도 없었고 그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밥벌이가 힘겨운 고단한 인생들이 있을 뿐인 것을 깨달았다며 이렇게 말한다.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서 비롯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속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 혐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그들에게 발생한 성정체성의 혼란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며, 그들이 새로운 성으로 살겠다는 주장이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건은 재판부가 “공적 문서에서 성별을 정정하는 것은 피해자가 엄연한 한 사람의 여성임을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조처에 불과할 뿐, 그 결정으로 비로소 여성으로 변경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유로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판단을 내렸다. 다행히 대법원에서 이 판단이 받아들여졌고, 이후 형법 제297조는 ‘부녀를 강간한 자’에서 ‘사람을 강간한 자’로 개정되었다. 성소수자 보호에 기념비적인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얇디얇은 사회적 약자의 사건기록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법이 없어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없어도 누구에게도 해코지 당하지 않을 사람’으로 바뀌었다. 법의 영역 내에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안전하다. 강자와 주류는 아무리 떠밀어도 법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설령 법 밖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생존 가능하다. 하지만 경계에 선 소수자는 조금이라도 밀려나는 순간 위험에 처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대부분 사건기록이 얇다. 이들은 약식 벌금 몇 십만 원을 깎으려고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 말을 지껄여대는 판사의 눈치를 보고, 온갖 타박을 받으며 나홀로 소송을 이어간다. 그렇게 힘들게 이어간 소송에서 진다해도 이유조차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민사 소액사건은 판결 이유를 기재하지 않아도 되고, 실제 이유가 없는 판결도 허다하다.


판사로서 저자는 “약식 벌금을 다투는 형사 정식재판이나 민사 소액사건은 워낙 많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 안에 처리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법이 특별한 절차를 규정한 것이니 판사한데 너무 뭐라 하시지 말라. 여러분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얼마나 가난하며,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왜 이런 처지에 빠졌고 왜 이런 범행을 반복하는지 이해하기에는 당신에 대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당신이 우리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듯 당신이 써낸 서면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나 여러분이나 설명이 부족하기는 피차 마찬가지”라고 동료 판사들의 항변을 전한다.


그러면서 “소수자라고 특별히 보호되는 게 아니다. 법이 보호하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다. 다수가 합의해 만든 법이 그들도 보호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다. 소수자들이 권리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떼를 써서 받아가는 것도 아니다”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아무리 정당한 권리가 있어도 실현은 별개 문제다. 힘없는 자들에게 법률이 정한 권리는 그림의 떡”이라고 공평하지 않은 실상을 전한다.


저자는 “나뭇잎은 흔하고 별 볼일 없고 언제 나무에서 떨어져버릴지 몰라 늘 파들거리며 불안에 떠는 연약한 존재지만, 나무는 이파리의 광합성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냐고?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잎이 없으면 유기체가 살 수 없듯, 다수자가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가 그들을 보호한다. 아니, 그저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무고한 범인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언은 언제나 유효하지만, 판사는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를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 어려운 판결문


판결문은 어렵다. 일상에서 들을 수 없는 말투성이고,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고, 그러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판결문을 읽다보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지, 판결문 써놓고 검토는 하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한 마디로 판결문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소송 당사자 읽으라는 글일 텐데, 정작 소송 당사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돈 싸들고 변호사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해야 한다.


물론 저자 말대로 “판결문은 냉혹한 글이다. 마지막 물기 한 방울까지 짜내고 짜낸 메마른 문장이다. 글의 강력한 힘 때문에 오독은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오독을 피하려면 문장은 명확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가 중요하다. 부사에게 배역은 없고 형용사도 단역에 불과하다. 주역은 명사와 동사”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불친절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도 않고, 어쩔 수 없다고 눙치고 넘어갈 일도 아니다. 저자는 판결문이 “일본식 한자어 투성인 법률용어, 읽다가 숨넘어가는 문장의 난삽함은 그나마 노력하면 고칠 수 있지만, 판결문이라는 형식 자체는 판사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어서 사고의 과정과 결론에 이르는 감정적 고뇌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항변한다. 그렇다면 우선 노력해서 고칠 수 있다는 법률용어나 문장의 난삽함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다양성과 안정성


여성 대법관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50대 이상의 남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판결이 지극히 보수적이고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매번 지적을 받는다.


저자는 “보도마다 줄지어 서 같은 날 핀 꽃은 기이하게 보인다. 꽃은 시도 때도 없이 산천에 흐드러져야 한다. 같은 꽃만 피워서도 안 된다”면서 “다양성이 참된 민주주의의 토양이듯 법원도 다르지 않아야 하며, 법원이기에 꽃은 더욱 더 혼자 제 각각 피워야 하고, 그래서 대한민국 법관이 같은 생각으로 단일대오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불온하고 끔찍한 환상”이라고 말한다. 또한 “법은 제정 당시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지만, 일단 제정된 이후에는 그 해석을 통해 실질적인 규범력을 가지며 생명력을 유지하므로 법이 사문화되지 않도록 하려면 법의 해석 역시 당면한 시대 상황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법의 해석이 법관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면 시민은 어느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현행법으로는 합법적인 행동이 어느 날 위법이 될 수 있다면 과연 그 법을 믿고 의사를 결정하고 사업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이 그저 법을 알지 못하는 시민에게 문득 떠오른 질문에 지나지 않으니 법관들이 괘념할 일은 아니다. 그럴만하니까, 그래도 문제가 없으니까 ‘법관과 법 해석의 다양성’을 부르짖는 게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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