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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by 박인식

마르틴 루터

최주훈 번역 및 해제

2019년 10월 22일


<95개 논제>에 대한 오해


역자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는 ‘가장 유명한 문서, 그러나 가장 안 알려진 문서’이고, 그것은 내게도 다르지 않았다. 읽고 나서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것도 대부분 사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로마의 베드로대성당 건축을 위해 발행한 교황의 사면증(면죄부)[1] 때문에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하고 이것이 교회사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는 전체 틀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루터가 처음부터 작심하고 교황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지 논의하기 위한 ‘토론 주제’로 정리한 것이었으며, 이것이 문제가 되자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면죄부에 대한 토론 필요성을 역설하며 자기 선한 양심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혁명적인 개혁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하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맞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면권과 면죄부의 한계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선 교황에게 주어진 ‘사면권’이라는 것부터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루터는 <논제> 5조에서 “교황은 자신의 판결 또는 교회법의 판결에 따라 부과한 형벌 외에 어떤 죄도 사면할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따라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이며, 용서할 의지와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루터는 이런 내용을 이후 20조와 (역자의 해제에 따르면) 38조에서도 되풀이 한다. 그러나 36조에서 “참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황이 사면하지 않더라도’ 죄와 형벌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누린다”고 말하는 걸 보면 교황의 사면이 교회가 부과한 징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황이 사면하지 않더라도’라는 설명은 ‘교황이 (사면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이지만) 사면하지 않더라도’라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자는 해제에서 면죄부가 처음 등장한 11세기에는 일시적으로 부과한 형벌을 사면하기 위한 용도였지만, 루터 당시에 이르러서는 연옥에 있는 자들의 죄책감뿐만 아니라 연옥에서 받을 미래의 형벌까지도 지워버리는 전무후무한 사면의 효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루터는 <논제> 45조[2], 46조[3], 47조[4], 48조[5]에서 면죄부의 오남용을 문제 삼고 있다. 나는 그동안 루터가 ‘면죄부’ 자체를 부인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이에 따르면 단지 ‘면죄부의 오남용’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루터는 71조에서 사면권을 반대하는 사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역자 또한 해제에서 루터가 <논제>를 통해 ‘면죄부의 효력과 한계’를 다루려했다고 하는 걸 보면 ‘교황의 사면권은 원칙적으로 유효’하지만 교황청이 수많은 전쟁비용을 충당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압박이 심해진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의 사면권’을 ‘임의로 확대’한 오남용만을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루터가 교황의 사면권과 면죄부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교황에게 사면권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있다면 그 한계가 어디까지라는 것인지, 면죄부 자체가 문제인 건지 면죄부의 오남용이 문제인 건지, 오남용이 문제라면 면죄부의 효력이 어디까지 미친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는 말이다. 물론 루터는 학문적 토론을 원해 이 글을 썼고, 그래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고는 한다. 아쉽게도 해제에서도 이런 질문의 답이 될 만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사죄의 조건


루터는 12조에서 참회에 부과되는 보속(책임)은 사죄선언의 조건이기 때문에 사죄선언 이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로서 <논제> 발표 당시 보속은 사죄선언에 뒤따르는 조치로 변질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죄(잘못)에 대한 책임’을 대하는 자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나는 피해를 보상하지 않은 참회는 참회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도한 것이든 과실에 의한 것이든 피해를 입혔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분쟁의 대다수는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가톨릭에서는 회개를 성찰에서 출발해 통회, 정개, 고백, 사죄, 보속(補贖)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가르치지만, 나는 이것도 적절한 과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대로 제대로 회개하자면 그 시작은 ‘성찰과 보속’이 되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국민이 해상에서 북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태워졌는데 북한이 유감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어디 그것뿐인가? 죄의 인정은 고사하고 사과도 아닌 유감 표명으로 잘못을 덮으려 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


피해자는 ‘대체로 약자’이다. 그러나 피해를 입고도 피해에 대한 보상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약자’이다. 그러니 보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종교개혁의 동력


몇 년 전,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 되는 해를 기념하는 많은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념행사는 루터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루터가 발표한 ‘95개 논제’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폭제였을 뿐 종교개혁의 유일무이한 동력은 아니었다. 당시 상황은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폭발 임계점에 다다를 만큼 종교적 비리가 횡행하고 있었고, 그래서 누가 언제든 불을 붙이면 끊임없이 타오를 동력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주교는 면죄부를 효과적으로 팔기 위해 능숙한 설교자를 고용하고, 요약지침서라는 가이드북을 배포하기에 이른다. 요약지침서에서 사면에 대한 신학적 배경과 베드로성당 건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핵심은 가격이었을 것이다. 지위에 따라 가격을 차등 적용하는 기준이나 수입을 최대로 늘리기 위한 할인 기준도 마련했다고 한다. 그들은 요약지침서에서 사면을 통한 영혼구원을 설명했으면서도, 정작 이전에 발행한 면죄부의 효력을 중지시켜 그들의 목적이 영혼구원이 아니라 돈에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죽은 자를 위해 돈을 받고 위령미사와 기도를 대신 드려주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교회 부흥에 목매고 세습을 망설이지 않는 것이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니 말이다. 세습을 도모하는 세력이 그를 반대하는 이들을 고까워하는 게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를 통해 지키고자 했던 돈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교황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보다 오히려 실질적인 수입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주장 때문에 핍박의 수위를 높인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교회의 폐습을 허물고 교회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활동하는 여러 개혁기구가 있다.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했던 해는 1512년에 5년 계획으로 시작한 ‘교회개혁을 위한 라테란공회’가 폐회되던 해였다는 점이다. 개혁기구가 없어서 개혁이 안 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루터가 <논제>를 발표한 당시와 지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은 다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돈으로 연결되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 다르지 않고, 지금은 거기에 약자에 대한 혐오까지 더해졌다. 종교개혁을 이어갈 동력은 차고도 넘친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종교개혁이라는 은혜가 허락될 것인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한다.


<미주>


[1] 루터의 95개 논제가 다루는 교황의 사면증(indulgentia)을 다양한 용어로 번역한다. 개신교에서는 ‘죄를 면제시켜주는 증서’라는 뜻으로 ‘면죄부’라 불렀지만, 최근 신학계에서 ‘죄 자체를 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부과된 형벌만 면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면벌부’로 바꾸어 부른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통 큰 용서’라는 뜻으로 ‘대사(大赦)’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면죄부’로 쓴다.

[2] 45조; “궁핍한 자를 지나치면서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진노를 살 것이다.”

[3] 46조; “풍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면죄부 사는데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4] 47조; “면죄부 사는 건 선택에 맡길 일이지 강제할 일이 아니다.”

[5] 48조; “면죄부를 사기 위해 쓰는 돈보다 경건한 기도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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