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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1. 2023

음악과 맺은 인연 (48)

사우디에 부임해서 제일 먼저 법인을 설립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법인을 설립해야 거주허가가 나오고 거주허가가 나와야 가족을 초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라고는 셋뿐인데 나는 리야드에 아들은 베를린에 아내는 서울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했다. 아내가 이사 오는 것이야 애초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각오한 일이었지만 거주허가가 없어서 비자 갱신을 위해 보름마다 입출국을 되풀이 하는 일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근 국가로 출장 가는 날짜를 비자 갱신 날짜에 맞춰 살얼음판 걷듯 일정을 조정해나갔다. 한 번은 출장 날짜가 바뀌었는데 그 이후 일정을 조정하지 않아 졸지에 불법 체류자가 될 뻔 했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두바이로 무스카트로 출장을 다니다가 어느 날엔가는 출장 갈 일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가는 항공편을 확인해보니 글쎄 두바이 가는 항공요금보다 싼 특별 할인프로그램이 보이는 게 아닌가. 당장 티켓을 예약했다. 아마 삼십만 원이 안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 가는 국내선 요금이 더 비싼 것이었다. 그래도 이왕 예약했으니 그냥 가기로 했다.


당시 아들은 미술 공부하는 친구와 함께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었다. 이미 두 학기 끝내고 세 학기 째 들어선 때였을 것이다. 마침 바쁜 일이 없어서 아들과 사나흘 같이 지냈다. 아들과 친구의 안내로 베를린 시내를 두루 돌아다녔다. 지난번에 왔을 때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회에 가기는 했지만 밤 시간이 되어 외관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곳을 다시 찾았다. 연주장은 겉모습이 마치 서커스단 천막처럼 보인다고 해서 ‘카라얀의 서커스’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내부는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둘러싸여 있어 1963년 건축 당시로는 혁신적인 형태로 관심을 끌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에도 그런 연주장이 몇 곳 생겼다. 롯데 콘서트홀도 전체적으로는 그와 같은 형태가 아닌가 싶다.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아들 친구의 작품이 베를린 장벽 헐어낸 자리에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자랑스럽기는 했는데 사실 그림을 볼 줄 몰라 그냥 좋다는 말만 남발하다 돌아왔다. 지금 아들 집 거실에도 그의 작품이 한 점 걸려 있다. 그곳에서 함께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하며 노천카페에서 여유를 만끽하기도 했다. 한 사람은 밀라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였고 또 한 사람은 KBS 콩쿠르에 함께 입상한 동기였다. 지금 모두 중견 소프라노로 서울과 유럽에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돌아오기 전날인가 아들이 운동하러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학교 근처라니 시내 구경도 할 겸 따라 나섰다. 운동 마치고 사우나를 하는데 여성이 불쑥 들어왔다. 물론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처음 겪는 일이어서 몹시 당황했다. 그런데 그 여성이 먼저 나가더니 사우나 앞에서 그 수건마저 벗어버리고 샤워를 하는 게 아닌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사우나에 있던 사람 모두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들네가 비스바덴으로 이사 오고 난 후에는 남녀 혼욕하는 사우나를 제집 드나들 듯 다녔지만,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운동 마치고 나와 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아들이 지나가는 여학생 하나를 가리키며 다짜고짜 어떠냐고 물었다. 자그마한 한국 여학생이었는데, 어깨에는 뭔가 잔뜩 든 가방을 메고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키가 너무 작지 않느냐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반응이었다.



<베를린 콘서트하우스 앞 광장에서 망중한>
<아들 친구가 그린 작품이 철거한 베를린 장벽 위치에 전시되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유럽과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소프라노 가수들과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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