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by 박인식

여성운전 (2017.10.02)


사우디 정부가 여성운전을 허용하기로 했다. 왕세자가 개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으니 언젠가 여성운전을 허용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이번 결정은 작게는 여성인권의 문제이지만 크게는 정치가 종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커다란 변화의 일단이라고 생각한다.


사우디는 왕정국가인 동시에 국왕을 ‘이슬람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라고 부르는 종교중심의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종교계의 반발 때문에 개방정책이 좌초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운전 허용이 결정된 것이다. 신문마다 하나같이 종교지도자들이 이에 동의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반대가 극심했으나 결국은 모두 받아들였다”는 설명으로 이해했다. 왕실과 종교계의 샅바 싸움에서 왕실이 생각보다 빨리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왕세자는 여성운전 허용을 발표하기 이전에 국가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홍해에 대규모 리조트를 건설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들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최근에 국영항공사가 옷차림이 정숙하지 않다고 탑승을 거부해 국제적으로 조롱받은 걸 감안한다면 홍해 리조트 계획은 경천동지할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둑이 터졌으니 이제부터 개방 욕구가 물밀 듯 터져 나오지 않겠나. 종교지도자에게는 세상이 망해가는 징조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지내는 지난 수년간 일어난 변화가 그 이전 30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더 컸는데, 앞으로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일어날지 모르겠다.



식사기도 (2017.10.04)


윌리엄 맥레이븐 미 해군대장이 졸업식 축하연설에서 아침에 침대를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라고 권하는 영상을 보았다. 아침에 침대를 정리하는 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 작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더 큰 임무를 완수하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청년부에서 지낼 때 식사기도를 충실히 할 것을 꽤 여러 번 권했다. 식사기도는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시인하는 일이며, 또한 남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하고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개방 (2017.10.04)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세탁기를 든다. 세탁기로 인해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풀려나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것이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사우디에 지하철이 건설되는 걸 보면서 개방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사우디에서는 여성운전을 금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땅한 대중교통도 없어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이동이 어렵다. 이동이 어려우니 교류도 어렵고, 교류가 어려우니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나 집약된 의견을 표출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다. 언제든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면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이 엄청나게 달라지지 않을까. 그래서 지하철이 개방의 촉진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 지하철 개통으로 교통상황을 개선하고 나서 여성운전을 허용할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지하철보다 여성운전을 먼저 허용했다.


지하철이 건설되면서 ‘가능성’으로 떠올랐던 ‘개방’이 여성운전 허용으로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관광입국의 기치를 내건 홍해 리조트 개발은 ‘개방’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너무 조급하다 싶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는 없는 일인데, 속도를 좀 늦추는 건 어떨까? 개방은 이제 대세가 되었는데,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이런 속도를 종교계가 그대로 감내하겠나.



인공지능 (2017.10.04)


인공지능의 발달로 언어장벽이 무너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한다. 굳이 외국어를 익히느라 머리 싸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언어가 의사소통의 전부라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이심전심처럼 말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은 예전에도 있었고, 말로서도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의사소통 수단으로 문자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 내외이고 음성언어조차도 30%를 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니 인공지능 번역이 언어장벽을 해소하는데 크게 도움은 되겠지만 결국 궁극적인 의사소통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어렵지 않을까.


며칠 전, 구글 번역 최고 담당자인 마이크 슈스터가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해도 인간의 통역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대하소설 (2017.10.06)


생각해보니 대하소설을 읽어본 일이 없다. 읽어본 장편소설도 몇 되지 않는다. 굳이 긴 시간을 들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수많은 사람이 등장해 수많은 사연을 엮어가는 걸 쫓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읽다 보니 굳이 사람과 사연을 기억해가며 쫓아갈 필요 없이 그저 물 흐르듯 따라가면 되는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아내와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고 있다. 나는 절반에도 못 미쳤는데 아내는 스무 권을 거의 다 읽어간다. 저녁 먹고 차 한 잔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게 일과가 되었다. 사람이나 사연이 워낙 다양하니 그에 대한 느낌도 다른 게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아내가 느끼는 것이나 내가 느끼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다. 함께 살다 보니 생각이 많이 닮아갔던 모양이다. 등장인물 가운데 부부가 뜻이 맞지 않아 평생 덜컹대며 살아간 이들이 적지 않더라마는. 내친 김에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도 읽어보기로 했다.


아내와 공통의 관심사, 공통의 화제를 하나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둘이 지낸 시간이 많아 은퇴 후에 어떻게 보낼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지만, 이로서 삶이 좀 더 풍성해질 것 같아 다행스럽다. 은퇴해야 할 나이라는 사실이 몹시 당황스럽기는 하다. 가보지 않은 길이니 걱정도 되고. 이렇게 하나씩 은퇴를 기다릴 이유를 쌓아나가다 보면 정말 은퇴 후의 삶이 기대가 되고 기다려지지 않겠나.



황혼 (2017.10.06)


이맘때쯤, 강변북로를 따라 한강 하류 쪽으로 퇴근하다 보면 정면으로 해가 넘어간다. 창문을 열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마음껏 황혼을 즐기는 일은 일상의 고단함조차 잊을 만큼 아름답고, 때로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멈추지 말고 그 길을 하염없이 따라 내려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맏자식으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해 송구스러운 마음을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달랜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면 늘 이맘때쯤 퇴근길에 보았던 황혼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여생이 그렇게 아름답게 타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요즘은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시간이 멀지 않은 것을 실감하고 내 스스로,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도 같은 기도를 드린다. 기도는 하는데 어떻게 하면 황혼과 같이 아름답게 삶을 마감할 수 있을지 아직은 막연하다. 지혜를 주시지 않겠나.



신유의 은사 (2017.10.07)


나는 기도로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믿기는 하지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특별히 허락하시는 선물이지 내가 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유의 은사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이를 경험했다거나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을 백안시해왔다.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앞둔 밤에 아이가 자다가 갑자기 이가 아프다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응급실을 갈 수밖에 없었는데, 병원을 가면 치료야 되겠지만 밤새 난리를 겪고 아침에 제대로 시험을 보겠나 싶어 이도 저도 못하고 아이만 붙들고 있었다. 아이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다. 뭘 기도했는지, 얼마나 기도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거짓말처럼 아이가 잠들었다.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일어나 시험을 잘 마쳤고, 그날 저녁 오디션을 보는 것으로 성악에 첫발을 내딛었다.


20년도 넘은 일이다. 그 후로 그런 일을 다시 겪어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도 신유의 능력을 주장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신유집회 광고를 보면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신유의 역사는 그렇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그런 급한 상황이 되면 신유의 은사를 구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 경험은 완고한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푸신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2017.10.12)


최근에 몇 가지 마음 쓰이는 일이 있다. 평생 생업으로 일해 온 원자력산업이 탈원전이라는 기치 아래 공공의 적으로 매도되는 일이 그러하고, 과학의 근간을 흔드는 창조과학이 그러하며, 환갑이 넘어서야 비로소 눈뜨게 된 소수자의 어려움이 또한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문제가 내게는 일반으로 여겨진다.


이학을 공부했고 공학으로 생업을 삼다 보니 생각이며 삶의 폭이 넓지도 못하고 다양하지도 못했다. 경제에서는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결과를 추구한다지만 언제나 뿌린 만큼 거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하면 안 되는 것으로 믿었다. 융통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삶이었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면 목표가 타당한지, 이를 이루기 위해 세운 계획이 합리적인지, 계획을 이루는데 필요한 지식이 증명된 사실 위에 서있는지 살피고 나서야 비로소 목표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했어도 실수며 실패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에서 살펴보건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논란은 결국 ‘증명되지 않은 사실에서 출발해 불거진 뿌리가 동일한 문제’이다. 탈원전 논란의 중심에는 ‘사실이 바탕이 되지 않은 마타도어’가 자리 잡고 있고, 창조과학 논란의 중심에는 수천 년 동안 논의되고 입증된 과학을 ‘오독한 성경의 기록’으로 부정하는 몰지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동성애 논란의 중심에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느낌과 주장’만 난무하고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이야 어쩌겠나. 다만 이 논란을 한탄하는 이들 중에 한 문제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주장을 고집하는 상대를 비난하면서, 다른 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도 근거 없는 주장을 고집하는 걸 보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한 문제에 대해 상대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비난했다면 다른 한 문제에 대해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그것이 근거가 있는지 살피는 게 인지상정이겠는데 말이다. 설마 알면서도 그랬을까. 주장에 몰입하느라 잠시 중심을 잃은 것이 아닐까.



공론화 (2017.10.20)


중요 정책에 대해 국민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을 때 공론화가 이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공론화 대상은 ‘원칙’이어야 하는 것이지 ‘실현방법’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관심이 있다고 해서, 중요한 정책이라고 해서 모든 국민이 그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공론화 대상은 ‘고리원전 5ㆍ6호기 공사 재개여부’가 아니라 ‘원자력 정책’ 자체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것인지 줄일 것인지 묻고, 그 결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은 해당 기관이나 전문가에게 맡겨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 ‘원칙’이 아닌 ‘실현방법’을 공론화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공론화 대상으로 삼지도 않은 ‘원칙’을 슬그머니 끼워 넣고, 권고라는 이름으로 그 ‘원칙’을 기정사실화했다. 이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으로, 매우 부당한 결정이다.



자식을 위한 기도 (2017.10.21)


예술은 감상의 대상이지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래 듣는 걸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성가대를 해오기는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지금 유럽 오페라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식을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예술은 뛰어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해 온지라 한 번도 자식에게 예능을 시키겠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성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귀담아 들을 일이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음악선생님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성악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음악선생님이 되고 싶다니, 그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중에 보니 음악선생님 되는 일이 성악가로 성공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기는 하더라마는.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성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그런 결정을 내린 자신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 생각대로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한참을 지나서 그것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성악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기 얼마 전, 아내를 따라 새벽기도를 나간 일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일이야 그렇다 치고 몇 분 기도하기도 어려웠던 사람이 새벽기도에 나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나. 그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으니 기도는 해야겠는데, 마땅히 뭘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아비라서 그랬는지 자식을 위해 기도하게 되더라. 그렇게 두어 달, 자식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지혜를 허락해 주십사 기도했다. 불과 두어 달, 그것도 아내 따라 나가 하나님께 구했던 물음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 응답으로 자식이 성악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 이유를 물을 마음을 허락하셨고, 그렇게 자식이 성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저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글쓰기 (2017.10.22)


아내가 사우디에 오기 전에 일 년 넘게 하숙을 했다. 하숙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늘 과일을 풍성하게 내었는데,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열대과일에 맛은 또 얼마나 좋았던지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식성까지 바뀌었다. 수박은 마치 설탕에 재어놓은 것 같았다. 그때는 사우디 수박이 다 그런 줄 알았다.


아내도 수박을 좋아하는데다가 값도 싸서 여름엔 늘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좀처럼 하숙집에서 먹던 것 같은 수박이 걸리지 않는다. 가게 주인에게 좋은 걸 골라달라고 해도 내가 고른 것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다. 하루는 아내가 하숙집 주인을 만난 길에 도대체 어떻게 그런 좋은 수박을 샀는지 물어봤단다. 그냥 슈퍼에서 산다고 하더란다. 그리고 잘라서 잘 익었으면 내놓고 그렇지 않으면 버렸단다. 너무나 당연한 답이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답이었기도 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얼마 전부터는 치매 예방하겠다고 하루에 글 하나 쓰는 걸 목표로 삼았다. 쓰기 전에 뭘 쓸까 생각하고, 애써서 쓰고, 써놓고 나서는 수없이 고친다. 그렇게 해도 써놓고 나면 영 마땅치 않다. 맛있는 수박을 내놓으려면 맛없는 수박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들인 공이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페북 담벼락만 어지럽히고 있다. 그 중 몇 개라도 건질 수 있으면 좋겠구먼.



선명한 증거 (2017.10.23)


평생 엔지니어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늘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이루려 애썼다. 요즘 풀릴 것 같지 않은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눈을 들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데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도 선명하다. 이보다 더 선명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매번 의심과 염려로 속을 끓이고 있으니 어떻게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있겠나. 나이를 헛먹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하라 하셨으니 오늘은 오늘 일만 생각하리라.



버림 (2017.10.26)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름답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게 그저 사람 사는 모습 아닐까. 젊어서는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자기욕망을 위해 애쓰며 사는 것이고, 나이가 들면 그 욕망을 절제하고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이가 드니 욕망을 덜어내는 건 그다지 힘겹지 않은데 대신 염려가 그 자리를 꿰어 차고 앉았다. 그런데 그 염려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혹시 욕망이 옷만 갈아입고 나타난 건 아닐까?



구역공과 (2017.10.28)


발표 자료는 늘 스스로 만든다. 아주 중요한 발표일 때 손을 빌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에도 줄거리까지 맡기지는 않는다. 발표 내용이 내 것이 되지 않으면 남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역예배를 준비하면서, 또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이 무척 많고 교우들과도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어 신앙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구역예배는 교회에서 정한 공과에 따라 진행하는데,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간혹 있다. 그럴 때면 공과를 인도하는 일이 몹시 힘겹다. 공감하지 못하는 걸 설명하자니 설명은 설명대로 힘들고 구역식구들 보기도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나름 지향하는 바가 있어 공과를 결정한 것이겠지만, 공과공부를 인도하는 이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보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건 어떨까?



양지 (2017.10.30)


해고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 ‘카트’를 받아놓은 지 꽤 되었다.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해서 받아놨지만 두 해 넘게 미뤄두고 있다가 오늘에야 보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당초에 짐작했던 것처럼 해고노동자의 논리가 거북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그들의 대척점에 서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돌아보니 지난 사십 년 양지에서 양지의 논리로 살아왔는데도 나는 늘 변방에 머물렀다고 생각했다. 주류는 아닐 터이니 변방에 머물렀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주류에 속하지도 못한 주제에,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는 양지의 논리에 동조해왔다. 차라리 주류였다면 양지의 논리로 날뛰던 모습이 덜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내가 지닌 보수 성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보수 성향은 무슨, 변방인 주제에 주류로 착각하고 산 까닭인 것을.



하나님 아버지 (2017.10.30)


아내 세 살 때 장인께서 의료사고로 돌아가셨다. 멀쩡히 걸어 들어가셨다가 불귀의 객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게 낯설고 이해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저녁 식탁에서 아내가 읽고 있는 소설 이야기를 하는데,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랑이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더란다. 이야기 끝에 신앙을 갖게 된 후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더라고 했다. 그동안 하나님이 왜 남성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이 몹시 거북했는데 아내 말을 들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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