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종주국이라는 곳에 살면서 정작 그들에게 이슬람이 신앙인가 하는 의문이 늘 있었다. 하루 다섯 번 기도하고 금식과 순례를 철저하게 지키지만 신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을 만난 일도 없고 그런 흔적을 본 일도 없다. 아랍권에서 일어나는 종파 분쟁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분쟁 상황 역시 이슬람 신앙이라는 것을 걷어내고 봐도 이해관계만으로도 충분히 지금과 같은 상황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북토크에서 저자인 황의현 선생께 이슬람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나 관습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자는 이슬람은 타고 나는 것인데 반해 다른 종교는 선택한다는 것이 큰 차이가 아닐까, 타고나는 것이니 신앙에 대해 고민할 일이 없지 않은가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신앙에 대해 숱하게 번민했다. 성경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수시로 바뀌었다. 성경이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는 결론에 이르는 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누구에게 빠지지 않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그것이 신앙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칠십이 다 된 나이에 교회를 옮기는 일도 있었다.
어디 기독교뿐인가. 적어도 무속이나 기복을 벗어난 정도의 신앙이라면 어느 종교이던 그만한 번민은 있게 마련이 아닌가. 하지만 무슬림에 둘러싸여 십 수 년을 살면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딱 두 명을 만났을 뿐이다. 그것도 사우디 사람은 아니고 젊은 이집트 엔지니어와 파키스탄 안전관리책임자였다.
이런 궁금증은 왕세자 명령 하나로 하루아침에 종교경찰이 흔적도 없이 해산되고 그에 대해 당연히 반발할 종교계에서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이 신앙이 아니라 생활양식이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모임이 끝난 후에 저자와 또 다른 이슬람문화 학자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연히 정답이라고 말할만한 결론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체로 ‘신앙의 정의’가 종교마다 다를 수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신앙과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신앙의 형태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 뜻대로 사는 것인가 번민하는 것’이 기독교신앙이라면, ‘꾸란이 정한 것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이슬람신앙이라는 것이지.
이야기 나눌 때는 이해한 것 같았는데 써놓고 나니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