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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28. 2023

2023.12.29 (금)

소설은 좀처럼 읽게 되지 않는다. 책을 궁금증을 풀고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다 보니 내용을 음미하고 여운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년 전쯤 독서방송 진행자가 내 취향에 맞을 거라며 소설 하나를 추천해줬다. 조해진 작가가 쓴 <단순한 진심>이라는 소설로, 입양아인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 차별과 혐오 속에 버려진 생명과 이들을 감싸 안고 다독이는 이들이 만나 새로운 우주를 열어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겪어본 바도 없고 그래서 이해는커녕 짐작하기도 어려운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내보일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이후에 찾아 읽은 그 작가의 소설은 모두 <단순한 진심>처럼 내내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에 대한 연민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그 소설의 몇 토막을, 그리고 전체를 몇 번씩이나 다시 읽었다.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드라마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내내 시간을 뺏겨야 해서 좀처럼 보지 않는데, 그런 중에도 방송이 다 끝나고 진가가 드러나고 나서야 보게 것이 몇 편 있다. 그런 드라마도 책을 읽고 또 읽는 것처럼 아예 파일을 받아놓고 보고 또 본다.     


나이 들어가면서 꿈이 하나 생겼다. 좋은 이웃,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 말이다. 그 꿈이 아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생겼지 싶다. 드라마의 주인공도 나보다 젊고 그 역을 연기한 배우도 나보다 젊었지만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박동훈 부장은 내게 좋은 어른의 표본이 되었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에 대해 연민을 잃지 않는 좋은 어른.     


나는 배우 이선균은 잘 모른다. 건들거리고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때로는 야비한 모습을 연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심성이 박동훈 부장을 닮았을 것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이젠 그 생각을 접어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     


박동훈 부장은 이지안이 살인자였다며 그와 그를 채용한 박동훈 부장을 비난하는 윤상태 상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인 아닙니다. 정당방위로 무죄판결 받았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알면서 계속 이런 애를 회사에 다니게 둔 거야? 사람 죽인 애를?”     


“누구라도 죽일 법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무님이라도 죽였고, 저라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법이 그 아이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린 겁니다. 왜, 왜 이 자리에서 이지안 씨가 또 판결을 받아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 당하지 말라고 전과조회도 잡히지 않게 어떻게든 법이 그 아이를 보호해 주려고 하고 있는데 왜 그 보호망까지 뚫어 가면서 한 인간의 과거를 그렇게 붙들고 늘어지십니까. 내가 내 과거를 잊고 싶어하는만큼 다른 사람의 과거도 잊어주려고 하는 게 인간 아닙니까?”     


“여기 회사야!”     


“회사는 기계가 다니는 뎁니까? 인간이 다니는 뎁니다.”   

  

♣♣♣     


박동훈 부장, 잘 가시라.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니 살아있는 사람에게 맡겨 놓으시고 더 이상 마음 고생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 그리고 그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활짝 웃으며 지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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