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좀처럼 읽게 되지 않는다. 책을 궁금증을 풀고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다 보니 내용을 음미하고 여운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년 전쯤 독서방송 진행자가 내 취향에 맞을 거라며 소설 하나를 추천해줬다. 조해진 작가가 쓴 <단순한 진심>이라는 소설로, 입양아인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 차별과 혐오 속에 버려진 생명과 이들을 감싸 안고 다독이는 이들이 만나 새로운 우주를 열어가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겪어본 바도 없고 그래서 이해는커녕 짐작하기도 어려운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내보일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이후에 찾아 읽은 그 작가의 소설은 모두 <단순한 진심>처럼 내내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에 대한 연민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그 소설의 몇 토막을, 그리고 전체를 몇 번씩이나 다시 읽었다.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드라마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내내 시간을 뺏겨야 해서 좀처럼 보지 않는데, 그런 중에도 방송이 다 끝나고 진가가 드러나고 나서야 보게 것이 몇 편 있다. 그런 드라마도 책을 읽고 또 읽는 것처럼 아예 파일을 받아놓고 보고 또 본다.
나이 들어가면서 꿈이 하나 생겼다. 좋은 이웃,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 말이다. 그 꿈이 아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생겼지 싶다. 드라마의 주인공도 나보다 젊고 그 역을 연기한 배우도 나보다 젊었지만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박동훈 부장은 내게 좋은 어른의 표본이 되었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에 대해 연민을 잃지 않는 좋은 어른.
나는 배우 이선균은 잘 모른다. 건들거리고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때로는 야비한 모습을 연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심성이 박동훈 부장을 닮았을 것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이젠 그 생각을 접어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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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훈 부장은 이지안이 살인자였다며 그와 그를 채용한 박동훈 부장을 비난하는 윤상태 상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인 아닙니다. 정당방위로 무죄판결 받았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알면서 계속 이런 애를 회사에 다니게 둔 거야? 사람 죽인 애를?”
“누구라도 죽일 법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무님이라도 죽였고, 저라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법이 그 아이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린 겁니다. 왜, 왜 이 자리에서 이지안 씨가 또 판결을 받아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 당하지 말라고 전과조회도 잡히지 않게 어떻게든 법이 그 아이를 보호해 주려고 하고 있는데 왜 그 보호망까지 뚫어 가면서 한 인간의 과거를 그렇게 붙들고 늘어지십니까. 내가 내 과거를 잊고 싶어하는만큼 다른 사람의 과거도 잊어주려고 하는 게 인간 아닙니까?”
“여기 회사야!”
“회사는 기계가 다니는 뎁니까? 인간이 다니는 뎁니다.”
♣♣♣
박동훈 부장, 잘 가시라.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니 살아있는 사람에게 맡겨 놓으시고 더 이상 마음 고생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 그리고 그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활짝 웃으며 지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