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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06. 2024

[요약]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최지웅

부키

2019.08.20     


[019] 1911년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은 독일과의 해군력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해군 함대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었다. 석유는 석탄보다 부피를 덜 차지하면서 열량이 높아 해군 함정의 속도와 작전 반경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022] 영국인 윌리엄 녹스 다아시는 1908년 페르시아 남부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대규모 석유를 발견한다. 이 발견으로 페르시아에 British Petroleum의 전신인 Anglo-Persian Oil Company를 설립한다. [025] 1940년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 석유를 자급할 수 있었다. 근대 석유산업이 미국에서 록펠러에 의해 발전했고 그가 세운 Standard Oil은 미국 내 생산량만으로 세계최대의 석유회사가 되었다. 석유가 나지 않던 영국은 미국과 달리 중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까지 중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가는 영국이다. 1940년에 들어서면서 미국도 중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1941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석유와 중동의중요성을 깨닫는다. 석유는 전쟁 승패에 결정적 요소였고 미국은 모든 전선에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30년대 말부터 미국 내에서 새로운 유전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해진다. 미국은 해외로 눈을 돌린다.     


[027] 영국은 중동을 노리는 소련의 위협을 홀로 방어하기 힘들었고 중동 유전 개발에 필요한 자본도 부족해 미국이 필요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중동에 들어와 영국의 기득권 상당 부분을 빼앗을 수 있었다. 1944년 루스벨트는 주미 영국대사 핼리팩스를 불러들여 이렇게 제안한다. “페르시아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공유하며, 사우디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 이 제안은 1944년 영미석유협약(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으로 이어진다. [028] 루스벨트의 제안대로 사우디에 미국회사가 들어가고 이란에 영국회사가 자리 잡는다. 미국은 사우디에 아람코라는 석유회사를 세운다. 당시에는 미국 석유기업 SOCAL과 Texaco가 합작해서 세운 100% 미국회사였다. 아라비아의 미국회사라는 의미로 Arabian-American Oil Company, Aramco이다. 이란에서는 BP의 전신인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가 독점적으로 사업을 지속한다.     


[028] 석유시장에서 생산량 조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격이 급격히 오르내리면서 생산자들이 큰 손실을 입는다. 석유생산을 위해서는 시추공과 해상 플랫폼 건설에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다. 그런데 생산자 사이에 합의가 없으면 유가가 상승하는 시기에는 서로 유전개발에 뛰어들어 과잉투자가 발생한다. 일단 생산설비를 갖추고 나면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생산을 계속해서 투자비를 뽑아내야 하기에 한동안 생산량이 수요를 초과한다.     


[033] 1950년대 석유 때문에 이란에서 반영감정이 거세게 일어난다. 앵글로 이란(페르시안) 석유회사에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2억5천만 파운드 수익을 올린데 반해 이란은 로열티로 9천만 파운드만 수익으로 가져간다. 같은 시기에 사우디가 미국과 석유 수익을 반분하는 협정(50-50 Agreement)을 체결한 것을 보면 이란에서 화가 날 만도 했다.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모사데크가 총리로 선출되자 이 회사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한다. 영국은 페르시아만에 함대를 파견하고 이란산 석유 수입을 금지한다. 자체 판매망이 없었던 이란은 영국이 석유를 수입하지 않으면 석유를 판매할 수 없었다. 이란 석유생산량은 1950년 일 65만 배럴에서 1953년 일 2만 배럴로 급감한다. 그러나 모사데크는 영국의 수입금지로 석유를 우리 세대에 팔지 못하면 후손을 위에 땅에 남겨두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 세력과 팔레비 국왕은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다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다. 이후 팔레비 왕정은 1978년 말까지 친미서구화 정책을 추진한다.     


[038] 수에즈운하는 1869년 프랑스 기술자 페르디앙 드 레셉스에 의해 완성된다. 1875년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는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집트 지분을 시장에 내놓는다. 영국은 수에즈운하의 지분 44%를 취득한다. [040] 나세르는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에서 비동맹주의를 주창한다.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집트를 회유하기 위해 아스완댐 건설지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이집트가 소련에서 무기를 구매하고 중공을 외교적으로 승인하자 미국은 아스완댐 건설지원을 취소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나세르는 아스완댐 건설자금 확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운하를 일반적으로 국유화한다. [041] 중동의 석유 운송로가 막힌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군사대응을 결정하고 이스라엘도 끌어들인다. 미국이 반대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강행한다. 2차 중동전쟁이자 ‘수에즈 위기’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043] 미국과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와 이스라엘이 수에즈운하를 점령하자 미국과 소련은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나세르는 수에즈운하를 점령당하기 전에 바위와 시멘트를 가득 선적한 선박을 침몰시켜 수에즈운하를 폐쇄한다. 당시 유럽의 석유 재고는 몇 주 분 정도의 수준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완전히 철수하기까지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양국은 1956년 11월 철수한다. 이로서 석유와 핵이 국제질서의 중심인 것이 명확해졌다.     


[049] 1950년대 석유업계를 지배하던 Seven Sisters는 Standard Oil New Jersey, Standard Oil New York, Shell, British Petroleum, Standard Oil California, Texco, Gulf Oil였다. 처음에는 Seven Sisters가 일방적으로 유가를 결정했다. [060] 1960년 이들이 중동산 원유 가격을 10센트 내리겠다고 결정하자 중동국가의 반감이 극에 달해 바그다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를 결성한다. 창설 멤버인 사우디,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의 석유수출량은 80%였기 때문에 시장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061] 그러나 베네수엘라가 케네디 대통령의 중남미 경제원조의 수혜자가 되면서 반미정서가 옅어지고, 사우디와 이란 관계가 좋지 못하고, 석유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과 판매에 이르는 모든 부분을 메이저 석유회사에 의존하고 있어서 이들에게 강하게 도전하기 어려웠다. [062] 사우디 야마니 석유장관이 24년간 자리를 지키면서 강력한 연합정책과 생산량 담합으로 OPEC을 석유질서의 한 축으로 만든다.     


[074]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결심한 것도 패망한 것도 모두 석유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동남아시아를 차지해야 하는데 그의 일환으로 1941년 7월 인도차이나를 공격하자 미국은 일본에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한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 함대의 방해 없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에서 생산된 석유를 안전하게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진주만을 공습해 미 해군의 전력을 무력화하려 한다. 결국 진주만 공습의 최종 목적은 진주만이 아니라 석유가 풍부한 동남아였다. [076] 결국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다수의 일본 원유 수송선이 침몰하면서 일본은 극심한 원유 부족에 시달려 패전하기에 이른다.     


[082] 미국은 1960년대 말까지 자국 석유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석유 수입을 제한했다. 자국의 석유 생산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083] 1956년 수에즈 위기 때 수에즈운하가 수개월간 폐쇄되어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초래되었지만 미국의 여유 생산능력이 그것을 막았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는 아랍 국가들이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지만 남아도는 공급량 때문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잉여 공급량이 소멸되자 공급 중단은 곧 공급 공백을 초래하는 상황이 되어 아랍은 석ㅇ 질서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다. 아랍 지위가 상승하고 협상력도 강해졌다. 아랍 국가들이 석유의 국유화나 무기화를 통해 서구세계를 위협할 경우 치명적인 위기를 불러올 수 있게 되었다.     


[095] 1973년 10월 6일 아랍의 기습공격으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101] 이 전쟁에서 아랍의 강력한 무기인 석유의 힘을 드러냈다. 전쟁 중 압박수단이었던 석유 감산과 금수 조치로 인해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한다. 아랍은 전쟁 중에 시행된 석유 감산을 전후에도 그대로 유지한다. 매월 5%의 점진적 감산이었지만 그 충격은 대단해서 3달러이던 유가가 한 달 만에 12달러까지 올라간다. [102] 1974년 3월까지 감산이 계속되면서 세계는 극심한 석유 공급난에 빠진다. 미국에서 휘발유 가격이 40% 이상 급등했고 국민총생산(GNP)은 1973년에서 1975년 사이에 6%나 감소한다. 일본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계속하다가 처음으로 국민총생산이 감소한다. [105] 유럽공동체(EC)는 1973년 11월 아랍 지지성명을 발표하고 일본도 같은 시기에 지지성명을 발표해 추가 감산 대상국가에서 제외된다. 1973년 12월 한국도 지지성명을 발표한다.     


[114] 1차 오일쇼크 이후 영국은 북해 유전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북해의 대표 유전인 Forties, Brent 유전은 이미 발견된 상태였지만 1차 오일쇼크 이후 본격적으로 생산이 개시된다. 미국은 알래스카 유전 개발과 장거리 송유관 건설에 집중하는데 이후 알래스카는 미국 원유 생산량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1970년대 후반에는 셰일오일 개발을 시도한다. [118] 프랑스는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원자력발전에 집중한다. 2018년 기준으로 프랑스는 전력의 75%를 원자력으로 조달한다.     


[120] 1차 오일쇼크 이후 산유국과 석유회사 간의 계약 형태가 생산물 분배 계약(Production Sharing Contract)으로 바뀐다. 과거에는 석유회사들이 자신이 발견한 석유의 소유자로서 권리를 가졌다면 이제는 발견된 석유에 대해 수일을 분배받는 계약자(Contractor) 지위로 격하된다.     


[128] 1차 오일쇼크 동안 사우디는 아람코를 인수해 석유시장의 물량조정자(Swing Producer) 역할은 한다. 물량조정자란 막대한 석유 매장량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석유생산량을 조절해 유가의 급등락을 방어하고 석유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산유국을 의미한다. 1차 오일쇼크를 주도한 사우디는 명실상부한 물량조정자로서 시장의 지배자 역할을 맡았는데, 그 중심에는 석유 황제라 불리는 야마니가 있었다.     


[130] 야마니는 석유의 꾸준한 수요 증대를 위해 유가를 낮게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유가가 지속될 경우 세계 경제는 침체를 넘어 장기적인 불황에 빠질 수 있고 이는 결국 석유 소비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야마니는 훗날 석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석시시대는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시대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 야마니는 1차 오일쇼크 이후 에너지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기술 진보가 에너지 공급원을 다양화할 것이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석유 수요를 줄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132] 사우디의 저유가 정책에는 미국과 사우디 사이에 결탁과 배후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1970년대 초반 석유 결제 통화를 달러로 통일하며 달러의 기축통화 위치를 지켜준 사우디의 결정, 그리고 미국 회사였던 아람코를 별도의 시가 평가 없이 장부가로 사우디에 매각한 후 국유화를 허용한 미국의 결정은 양국이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134] 1975년 미국 포드 행정부는 약 200기에 달하는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미국은 세계 1위의 원자력 발전 대국이 된다. 저유가 기조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시장인 미국이 적극적인 석유 수요 감축 정책을 펴는 상황이라면 고유가는 원자력의 확산을 더욱 촉진할 위험이 있었다.     


[144] 1차 오일쇼크는 중동 산유국의 생산 축소가 그대로 공급 공백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는 조금 달랐다. 북해,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등 비중동 지역에서 새로운 유전이 개발되어 생산 중이었기에 이란 혁명으로 석유 공급이 감소해도 다른 지역의 증산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유가가 13달러 수준에서 몇 달 만에 40달러로 급등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불안과 공포를 들 수 있다. 이란 혁명의 불길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알 수 없었고, 혁명의 여파가 중동 전역에 미친다면 전 세계에 석유 공급이 중단되는 극단적인 상황도 벌어질 수 있었다. [146]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도 불확실성을 더했다.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은 무려 15개월이나 지속되며 2차 오일쇼크 장기화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147] 설상가상으로 1979년 미국에서 Three Mile Island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한다. 방사능 유출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이 사고로 대체에너지로서의 원자력에 대한 기대치가 대폭 낮아진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원전 70여 기의 건설계획을 중단한다. 그 결과 석유 수요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증가한다. [148] 1979년 11월 사우디에서 약 5백 명의 무장 원리주의자들이 친미 정권 타도를 외치며 메카를 점거한다. 이 사건은 사우디 정예부대가 진압하는데 실패해 프랑스 특수부대가 동원되어 진압한다. 진압은 되었지만 사우디라는 요충지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협하는 사건이어서 이 또한 석유시장의 불안을 부채질한다. 한 달 후인 12월에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한다. 미국은 소련이 아프간을 발판 삼아 걸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해한다.     


[165] 1982년 전 세계적으로 경제 불황이 닥치고 석유 수요는 계속 감소한다. 2차 오일쇼크 이후 유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동안 경제성을 확보한 북해, 알래스카, 멕시코만의 석유 개발이 급진전되고 새로운 유전의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한다. 1982년을 기점으로 비OPEC 생산량이 OPEC 생산량을 앞지르면서 OPEC은 시장을 지배할 힘을 잃어간다.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이제 공급자가 구매자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시장이 펼쳐진 것이다. 고유가로 인해 세계 에너지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도 줄었다.     


[180] 2014년 하반기부터 2015년에 걸쳐 유가가 100달러에서 20달러까지 추락한다. 1985년 30달러에서 1986년 7달러로 추락하기도 한다. [181] 1986년에는 사우디가, 2014년에는 OPEC이 물량조정을 포기하고 점유율 전쟁을 하면서 유가급락이 촉발되었다. 산유국은 점유율에 왜 집착하는 것일까? 점유율이 바로 국가와 국민의 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도 이유가 된다. 산유국으로서는 석유 감산과 그로 인해 점유율 감소가 일어나더라도 언젠가 그 물량만큼 더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감산 결정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사우디는 막대한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 같은 대형 산유국 입장에서는 당장의 점유율 축소가 미래의 점유율 확대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석유시대가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점유율을 확대해 석유를 처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우디는 1970년대에 줄곧 최대생산국의 위치를 유지했다. [184] 1982년 비OPEC 생산량이 OPEC 생산량을 앞지르고 1983년 선물거래가 시작되면서 OPEC 주도의 가격결정권도 위협받자 사우디는 유가가 급락할 것을 우려해 급격한 감산에 돌입한다. 당장의 가격 붕괴를 막고 공식 판매가격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사우디는 1천만 배럴 생산물량을 3백만 배럴 수준으로 줄인다. 그러나 OPEC 회원국들은 번번이 점유율 경쟁을 펼치며 쿼터를 위반했다. [185] 2년간 사우디는 단독으로 생산량을 줄이면서 유가를 방어했지만 수입은 1983년 1,190억 달러에서 1985년 250억 달러까지 감소한다. 결국 사우디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가는 1985년 12월 30달러에서 이듬해 7월 7달러까지 폭락한다.     


[190] 당시 사우디는 하루 3백만 배럴 수준의 생산량을 원래 생산 수준이었던 1천만 배럴까지 늘리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시장이 사우디의 엄청난 물량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우디는 고객을 빼앗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효과적인 마케팅이 필요했다. [191] 정유업체는 원유 가격과 제품유 가격 차이가 확보되어야 수익을 얻는다. 만약 원유를 구매한 후 제품유 가격이 하락하면 손실을 본다. 하지만 유가는 등락을 거듭하기 때문에 제품유가 원유보다 저렴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정유업체는 원유 대량 구매를 꺼린다. 그래서 사우디는 제품유 가격에서 마진을 뺀 금액에 원유를 공급하겠다는 넷백 방식을 제안한다. 이 경우 정유업체는 사우디 원유를 위험부담 없이 대량 구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92] 이러한 파격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잃어버린 점유율을 회복하는데 10년 이상 걸린다. 이후 사우디는 정유회사 지분을 매입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다. [193] 아람코는 1991년 쌍용정유(에스오일) 지분 35%를 취득하고 이후 63.5%까지 늘린다. 2019년 4월 현대오일뱅크 지분 17%를 취득해 2대 주주에 오른다. 셰일오일 혁명으로 미국이 석유 생산을 늘리면서 미국에 한국 시장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246] 2012년 발간된 미국 에너지정보국(USEIA) 연례보고서는 2020년 원유 생산량을 670만 배럴 수준으로 전망했다. 2014년 보고서에서 이를 955만 배럴로 수정하지만 2017년에 900만 배럴을 돌파한다. 2018년에는 1,100만 배럴 수준을 기록하면서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최고 수준에 도달한다.    

 

[268] 화폐는 홀로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 태환 약속이 달러 가치의 기반이었다. 오늘날 달러는 금과 직접 연관이 없지만 기축통화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가. 현대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재화인 석유가 달러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278] 셰일오일을 생산하는 핵심기술인 Fracking은 보고서가 나오고 약 10년이 지난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수압파쇄법과 수평시추기술을 결합해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281] 셰일오일 기술 상용화에 한 축을 담당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였다. 미 연준은 금융위기 수습을 위해 양적완화를 추진한다. 특히 2009년부터 2015년까지 0~0.25%의 초저금지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Fracking의 가능성을 본 셰일오일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때마침 유가도 2011년부터 100달러를 돌파한다. 금리와 유가가 셰일오일 산업의 성장을 도운 것이다. [282] 셰일오일의 가시적인 성과는 2011년부터 나타난다. 생산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이다. 새로운 석유 등장에 중동 산유국은 긴장한다. 셰일오일 붐이 일어난 2014년 중반 이후 저유가로 셰일오일의 등장을 하루라도 늦춰보겠다는 의도로 OPEC은 석유 증산에 나선다.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OPEC의 증산으로 2014년 유가는 폭락하고 결국 수많은 수의 셰일업체들이 도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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