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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19. 2024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김욱 편역

포레스트북스

2023년 6월 21일


독서모임에서 이번 달에 읽을 책으로 선정한 것이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은 익숙한데 그의 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하고 찾으니 내가 알았던 제목은 부제였다. 그의 저서 중에 그의 통찰을 보여주는 구절을 발췌해 묶은 책인데,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격언)’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명언이라는 말이 소셜미디어에 자주 보인다. 유명인사의 발언이나 드라마 한 구절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스스로 명언이라며 들고 나온 이들도 생겼다. 그런 명언을 만들기 위해 애쓰기는 했겠지만 명언이 작정하고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인가 싶기는 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모아놓은 것인데, 예전 같으면 한 마디 한 마디에 감동할 법도 한 구절들이 이제는 너무 당연한 말이라 오히려 식상해 보인다. 나이 탓일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일흔두 살까지 살았다. 그가 남긴 격언 대부분이 내 나이 이전에 쓴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그의 격언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나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그의 나이부터 가늠한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가 많다 싶으면 그가 누구이던 일단 꼬리를 내린다. 살아오면서 지혜는 나이를 뛰어넘기 어렵다는 것을 수없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격언은 그런 면에서 그저 나이 든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것을 잘 정리해놓은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주는 지혜가 그만큼 크다는 것일 뿐.


쇼펜하우어는 “자식이 부모에게 내 미래를 결정짓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부모도 본인 생각을 꺾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도 부모는 자식을 부양하고 자식은 그 부양을 받아들인다. 결국 부모의 도움은 받으면서 부모가 자기 인생에 개입하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다. 이 말이 논리적으로 성립하려면 자식은 부모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도움으로 살아가거나, 부모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에 대해 자식의 입장에 있는 젊은이들의 생각이 몹시 궁금하다.


부모가 자식을 부양하고 있으니 자식이 부모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옳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게 통하는 세상도 아니고 그렇게 사는 부모도 없다.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다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자식 꺾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자식을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사소한 일에 위로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 고통받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처럼 사소한 일에 위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사소한 일에 고통받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나처럼 사소한 일에 고통받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겼던 사람에게는 여간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다.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불행을 겪었을 때 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통찰은 누구를 막론하고 인생의 표준으로 삼을만하다.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대해봐야 소용없다.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태만이나 무모함, 불성실을 후회하기에도 늦었다. 불행은 그 자체로 징계다.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이 된다. 명백히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미화할 필요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를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고통과 불행을 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는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것이며,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궁극적으로 갖추고 싶은 모양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순간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순간을 맞는다면 그 모든 과정, 즉 성숙을 향해 걸어온 모든 과정이 잘 살아온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행복을 향해 걷는 모든 과정이 행복이라면 고통스럽고 불행한 순간조차도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역설이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고통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 것은 인간이 고통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그렇고 “부부는 자녀를 통해 온전히 하나가 된다”는 말은 참으로 공감이 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그의 통찰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나 자녀를 두지 않는 부부에게는 소용없는 말이다. 그 과정을 겪고 나서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격언이나 명언이라는 것이 그렇다. 정작 필요한 이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지나고 난 이들에게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국가가 세금과 의무라는 명분으로 국민의 노동력을 착취한다”거나 “그것을 합법으로 여기는 유럽 국가들을 전근대적인 탄압을 일삼는 노예국가”라는 그의 말은 당황스럽다. “부를 목적으로 지식을 습득하지 말라”면서 “인세와 저작권 두 가지가 문학을 문학 이하의 위치로 끌어내렸다”는 그의 말을 통해 순수한 모습을 잃어가는 문학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지적재산권이 지적수준을 높이는 동기요 수단이 되는 지금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그러고 보면 격언이요 명언이라 해도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기는 참 어렵겠다.


쇼펜하우어는 “수만 권의 책을 읽은 자의 머릿속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식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의 머릿속에 방 한 칸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서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욕망하고, 스스로 포기하기를 권한다. 그래야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자신의 성을 지켜내고, 독립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독립된 인간으로 완성되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오늘도 내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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