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Feb 14. 2024

계간 <보보담> 2023년 겨울

LS네트웍스

사회평론아카데미

2024년 1월 30일


이번 겨울 호에서는 정동을 다루고 있다. 여느 호에서와 마찬가지로 잡지 전면에 걸쳐 주제가 되는 덕수궁 사진이 열 장도 넘게 실려 있다. 그것도 함박눈이 내리는 덕수궁을. 서울 사람치고는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고궁에 자주 가고, 정독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눈 내리는 걸 보고 눈 구경하겠다고 경복궁으로 뛰어가기도 했지만 이 사진처럼 눈 내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마치 설국을 연상시킬 정도여서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눈 내리는 덕수궁 사진 감상평만으로도 리뷰 한 편을 쓸 만큼 아름답다. 이번 사진 역시 조재무 작가의 작품이다. 사진도 아름답지만 여백 없이 지면 전체를 꽉 채운 편집 솜씨도 사진의 격을 높이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태조 이성계가 스물한 살이나 어린 신덕왕후 강씨를 잃고 비통해하며 직접 좋은 묘소를 찾아다니다가 자리를 잡아 정릉을 마련하고 수호사찰인 흥천사를 창건하기까지 한 곳이 바로 정동이고 정동이라는 이름은 바로 정릉에서 비롯되었다. 한양도성은 태조 본인이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적 세계관을 구현한 도성이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 능과 사찰이 들어왔으니 신의왕후 한씨의 자식인 이방원을 위시한 왕자들도 고까웠을 것이고 유교관에 투철한 종친이나 관료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태조가 물의를 무릅써가면서까지 능을 정동에 쓴 것은 신덕왕후를 단지 남달리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어리기는 해도 권문세족 출신으로 동북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중앙에 진출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건국의 주요 고비마다 과감한 판단력으로 이성계를 도왔기 때문이다.


정릉은 이성계 사후에 지금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아마 이성계도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놓는 데 사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채 정릉을 장식하던 석물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놓는 데 쓰여 지금도 이 다리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궁궐에 비해 덕수궁의 규모가 작은 것은 애초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것을 궁궐로 삼았기 때문이다.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 창경궁과 같은 궁궐은 모두 종로 북쪽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주요 관서들도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임금을 비롯한 관료들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 분노한 도성 사람들이 궁궐과 관서에 불을 질러 종로 남쪽 지역만 살아남았다. 그래서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하는 수 없이 월산대군의 사저로 들어갔고, 이것이 정릉동 행궁이 되었다가 경운궁을 거쳐 덕수궁이 된 것이다.


도성 사람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을 처음 접한 건 아니지만 임금의 말이 곧 법인 왕정국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보며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전쟁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임금이 도망간 것이나 도성 사람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분노를 표출한 것 모두.


이후에도 덕수궁은 자랑스럽기보다는 감추고 싶은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국 황제로서 위엄을 보인 첫 번째 일이 오천 명 가까운 인원을 동원해 명성황후의 국장을 장엄하게 치른 것이고, 이어서 석조전과 중화전을 신축하고 군령기관인 원수부를 궁 안에 들여 자신의 국정 장악 의지를 표명했다. 새 나라를 선포하고 처음 한 일이 백성을 살피거나 제도와 정책을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황후의 국장을 장엄하게 치르고 번듯한 궁궐을 지었다는 것인데. 관료들은 그 모습을 감격스럽게 바라봤을지 모르겠지만, 백성들과 같은 느낌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새롭게 기대할 것도 없었을 것이고.


1904년 화재로 함녕전과 중화전을 비롯한 궁궐이 소실되어 이를 복원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석조전도 짓기 시작한 지 10년이나 지난 19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건축을 마쳤다. 제국을 선언하고 힘 쏟은 일이 이것뿐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마저도 한일합방으로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했다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 시대에 발표된 소설 중에 정동을 무대로 하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정동이 외국인들의 거주지이자 생활근거지였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영사관이 이곳에 모여 있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또한 이곳에 있었다. 아울러 우리나라 호텔 역사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손탁호텔도 이 지역에 있었다. 객실 25개에 식당과 카페를 갖추고 있었던 손탁호텔의 주인인 미스 손탁은 영어와 독어, 프랑스어 뿐 아니라 러시아어도 구사해 주변 공사관을 찾아온 귀빈들이 편안히 묵을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나온 글로리호텔의 여주인 쿠도 히나. 바로 그의 모델이 미스 손탁이라고 한다.


호텔 이야기는 길 건너 조선호텔로 이어진다. 조선호텔은 워낙 조선철도호텔이었는데, 동경에서 부산-경성을 거쳐 봉천-대련으로 가는 장거리 승객들이 묵는 호텔이었다고 한다. 처음 유럽에 여행 갔을 때 가장 신기한 것이 차로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국경이라면 비행기나 타야 넘는 것으로 알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열차로 국경을 넘나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 말이 좋아 반도국가이지 남한만 따지면 꼼짝없이 섬나라인데, 생전에 서울역에서 떠나는 국제열차를 타볼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조선호텔 식당은 정통 프랑스 코스요리만 제공했는데 인당 식사비를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7만 원에서 17만 원 정도란다. 우리가 흔히 정식(定食)이라고 부르는 음식은 잘 차린 한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음식 종류나 음식을 내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걸 말한다. 말하자면 코스요리라는 것이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이 호텔에 묵고 식사하는 비용이 30원이었다. 지금 시세로 150만 원.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이다.


말미에 오르가니스트인 최현영과 인터뷰를 통해 정동교회와 배재학당 설립과 관련한 뒷이야기와 정동교회에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사연도 소개하고 있다.


<보보담>이 가진 독특한 책의 질감을 느껴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사진과 글은 <보보담> 홈페이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시간 날 때 한 번 살펴보시라. 내년 2월 초에 <보보담> 홈페이지에서 신규 구독 신청을 받는지도 확인해 보시고. 정말 좋은 잡지이다.


https://www.lsnetworks.com/upload/bobodam/bobodam_051_%EA%B2%A8%EC%9A%B8.pdf



매거진의 이전글 토론의 법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