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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12. 2024

토론의 법칙

쇼펜하우어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

2016년 9월 1일     


“논쟁에서 상대가 모르는 분야의 권위를 내세우면 대체로 효과가 좋다. 아무런 뜻도 없는 라틴어 몇 마디에도 존경심을 느낀다. 필요하면 이런 권위를 내세우고, 권위가 없으면 권위를 날조해도 된다.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의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허튼 생각뿐이기 때문에 이 점을 공략하면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명제를 이용해 다른 명제를 증명한다. 특정한 용어를 본래 의미가 아닌 엉뚱한 의미로 사용한다.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난 문제를 마치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확대해서 해석한다. 상대의 주장은 과장해서 해석하고 자신의 주장은 경계를 좁혀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상대의 주장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의 주장을 반박한다.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기 어려울 때 전문지식이 부족한 청중을 향해 말도 되지 않는 이의를 제기한다. 상대의 주장이 타당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잘못되었을 경우 이 근거를 물고 늘어져 상대 주장을 반박한다.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틀렸다고 억지를 쓴다.”     


“의미 없는 말을 기관총처럼 상대에게 퍼부어서 상대를 놀라 당황하게 만든다. 자기가 지적받게 되었을 때는 상대에게 느닷없이, 많은 것을, 자세하게 질문한다. 상대를 화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거나 상대가 장점을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도록 한다. 상대를 자극해 무리한 주장을 펼치게 만든다. 상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쟁점을 바꾼다. 질 것 같으면 갑자기 딴소리를 하거나 자신은 무식해서 못 알아듣겠다고 말한다.”     


‘논쟁과 토론에서 이기는 38가지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에 실린 책의 주요 내용이다. 저잣거리의 야바위꾼이나 할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무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 쇼펜하우어인데, 그중 압권은 38번째에 실린 “상대를 도무지 이길 수 없으면 인신공격이나 모욕도 서슴지 않는다”는 기술이다.     


다른 번역본이나 아마존에 올라온 영문본 소개 자료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역자 역시 서문에서 이 책의 내용을 쇼펜하우어의 역설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계적인 철학자가 그런 야바위꾼 같은 짓을 부추겼을 리 없을 것이라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만 드는 토론 태도를 경계하고, 인간의 우둔함과 추악한 허영심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 지닌 문제점을 성찰하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이쯤 되면 옹색한 변명이 아니라 찬사라고 해야 옳다.     


동시에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에게 자신이 정당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기술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객관적 정당성이나 진실과는 상관없이 논쟁과 토론에서 상대를 무찌를 수 있는 38가지 토론 기술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앞뒤 모순되는 설명이 무안했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만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고, 상대가 이런 간교를 썼을 때 그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상대를 물리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얼마 전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격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책을 읽은 일이 있다.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쇼펜하우어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저서와 그가 남긴 편지나 일기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좋은 글만 모아놓은 셈이다. 나는 글을 ‘맥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바로 읽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맥락과 관계없이 덜렁 글의 한 토막을 가져다 놓고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건 글을 바로 읽는 게 아닐뿐더러 그렇게 유도하는 게 속임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 기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고 책을 덮으며 다시 같은 실망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 책을 읽은 건 분명치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     


대학 신입생 때였으니 꼭 오십 년 전 일이다. 입학할 때 나눠준 교과서에 ‘필독 도서’가 몇 권 들어 있었다. 어느 과목에서도 그 책을 다루지 않아 읽지 않고 미뤄두다가 결국 책도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중에 ‘토론에서 이기는 법’을 다룬 책이 있었는데, 쇼펜하우어의 책을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독서 목록에 넣어만 놓고 몇 년 지내다가 올해 비로소 읽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봐도 70년대 초반에 그런 책이 발간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 책의 원전이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표지에 적혀있는 <The 38 Laws of Discussion>이라는 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마존에 <The Art of Being Right; 38 Ways to Win an Argument>라는 책이 올라와 있었는데, 저자가 같으면서 제목도 비슷한 책이 몇 종 더 있어 번역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쇼펜하우어가 미국인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원전이 무엇인지 나타난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에라스무스 변증법(Eristische Dialektik)이라는 실마리를 찾아 검색해 보니 쇼펜하우어 사후에 발견된 원고 중에 남아 있던 46쪽 분량의 <에라스무스 변증법, 38개 전략과 각주>라는 논문이 출처가 아닌가 싶었다. 결국 미완성으로 보이는 이 논문을 책으로 옮기고 빈칸은 역자 마음대로 채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쇼펜하우어 이름만 알았지 그가 어떤 철학을 추구했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저서 하나 읽은 일이 없다. 언젠가 하나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 이어 <토론의 기술; 논쟁과 토론에서 이기는 38가지 기술>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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