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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20. 2024

[요약]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손원호

부키

2021년 8월 5일


1. 여성 차별


많은 사람이 남성 중심의 관습이 이슬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아라비아반도에 살던 아랍인들은 7세기에 이슬람이 창시되기 이전부터 이미 남성 중심의 사회를 형성해왔다. 사막을 횡단하며 수많은 침입과 전쟁을 겪어온 이들로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남성을 더 귀하게 여긴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랍 사회에 만연했던 이 같은 차별은 오히려 이슬람을 통해 개선된다. 무슬림들은 남녀평등 의식이 쿠란에 명시된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성서와 달리 쿠란에서는 남녀 중 누가 먼저 창조되었는지 명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쿠란에서는 “딸을 낳은 수치를 참을 것인가 아니면 흙 속에 묻어버릴 것인가 생각하는 그들에게 불행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쿠란 16:58-59)


2. 이슬람 탄생과 변천


570년 4월 22일, 메카지방의 유력한 아랍 부족이었던 쿠라이시 부족 중에서도 명문가로 소문난 하심 가문에서 무함마드라는 아이가 태어난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대상무역의 대리인에 불과했던 무함마드는 여성 사업가인 카디자와 결혼해 부유하게 되고, 여유가 생기자 그는 사색과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난다. 마흔이 되던 해에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의 계시를 받고 선지자가 되어 포교에 나선다. 그는 “알라 외에는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자신)는 알라의 사자”라고 외친다. 이 문구는 훗날 무슬림의 신앙고백인 ‘샤하다’가 된다.


아라비아반도의 중요한 종교도시인 메카의 중심에 정육면체 건물인 카바가 있다.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사막에 떨어진 운석을 가져다가 카바 자리에 쌓은 자리에 올려놓은 후 아내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알라에게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카바에 오는 사람들에게서 올리는 수입으로 먹고살던 쿠라이시 부족이 일신교를 주장하는 무함마드 때문에 수입에 차질이 생기자 무함마드와 하심 가문에게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하심 가문의 수장이었던 아부 라하브마저 무함마드를 배제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621년 7월, 메카에 있던 무함마드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메카에서 예루살렘까지 일순간에 날아가 일곱 개 하늘에서 아담, 세례 요한, 요셉, 아론, 모세, 아브라함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알라의 보좌를 참배하고 메카로 돌아온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야스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메디나에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피난 온 유대인들의 후예가 살고 있었고,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익숙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메카를 방문한 야스립 출신 아랍인들은 우연히 들은 무함마드의 설교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메디나에서 끊임없는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아우스 부족과 카즈라즈 부족은 무함마드가 분쟁을 해결해주리라 기대하고 그를 초청한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 남쪽에 있는 사우르산 동굴에 사흘 동안 숨어 지낸 뒤 70명의 추종자와 함께 비밀리에 메카를 탈출한다. 이를 이주를 뜻하는 ‘히즈라’라고 하며,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도착한 622년 7월 16일이 이슬람력인 헤지라력으로 원년 1월(무하람) 1일이 된다.


메디나에서 힘을 키운 무함마드는 이슬람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주변 부족들과 전쟁을 감행한다. 마침내 629년 12월 11일 메카에 진입한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은 그에게 항복하고 이슬람으로 귀의할 것을 약속한다. 무함마드는 메카 카바의 우상 신전을 모두 무너뜨린다. 아라비아반도 여러 부족도 모두 충성 서약을 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약속한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631년, 메디나에 살던 무함마드는 마지막 순례를 위해 메카로 떠난다. 메카에 도착한 그는 카바 신전을 돌고 근방에 있는 앗사파 언덕과 알마르와 언덕 사이 420미터를 질주한 후 메카에서 동쪽으로 7킬로미터 떨어진 미나 평원에서 숙영한다. 그가 두 언덕 사이를 질주한 것은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먹일 물을 찾기 위해 두 언덕 사이에서 헤맨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는 메카에서 동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성산 아라파트(해발 229미터)에 가서 고별 설교를 하고 그 자리에서 23년간 받아온 알라의 마지막 계시를 전달한다.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얼마 지나지 않은 632년 6월 8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아 그 자리에 묻힌다. 지금도 이슬람 대순례절인 핫지 때 이 절차대로 순례를 수행한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차기 지도자인 칼리드를 놓고 당시 관행대로 “원로들이 선출하자”는 이들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혈통인 하심 가문에서만 나와야 한다”는 이들로 나뉜다. 이후 1대에서 3대까지는 하심 가문 출신이 아닌 칼리파가 선택되고 4대 때 하심 가문 출신의 알리가 선출된다. 알리가 사망한 후 알리를 따르던 이들은 ‘알리를 추종하는 분파’라는 ‘시아 알리’로 불리다 훗날 ‘시아’로 불리며 ‘시아파’의 기원이 된다. 반면 무함마드의 언행과 관행(순나)를 따라야 한다며 시아파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은 이들은 ‘순나’에서 비롯된 ‘수니파’가 된다. 시아파에서는 4대 칼리파 알리와 그 혈통적 후계자만을 영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칼리파라는 명칭 대신 이맘이라고 부른다. (알리가 1대 이맘)


3. 중동 분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 중심의 연합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동맹국들이 전쟁을 벌인다. 독일이 오스만 제국에서 참전을 제안하자 오스만 제국이 이 전쟁에 뛰어든다. 오스만과 싸우던 영국은 중동 지리에 익숙한 아랍인을 이용해 오스만을 무너뜨리기로 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자극해 오스만에 대항하도록 부추긴다. 자신들은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중동지역을 손에 넣겠다는 심산이었다.


영국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의 샤리프이자 헤자즈 지역의 왕이었던 후세인 빈 알리를 지도자로 점찍는다. 무함마드 혈통인 하심 가문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고 후세인은 하심 가문의 최고 실력자였다. 영국은 하심 가문이 전투를 주도할 경우 다른 가문이 쉽게 반대할 수 없으리라고 계산한 것이다. 영국은 이 전쟁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고등판무관인 헨리 맥마흔이 “후세인이 오스만을 무너뜨리면 영국이 후세인을 도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지역에 통일된 아랍왕국을 세울 수 있게 돕는다”는 서한을 보낸다. 그러자 후세인은 자신의 삼남인 파이살을 중심으로 아랍 반란군을 조직한다. 영국은 1916년 아랍 전문가인 로렌스를 파이살의 군사고문으로 파견한다.


로렌스는 파이살이 이끄는 아랍 군대와 함께 메카에서부터 오스만과 전투를 벌인 다마스쿠스까지 진격한다. 사기 충만했던 아랍인들과 전략가 로렌스의 조합은 완벽해 보였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함께 2년간의 여정을 견뎌내고 1918년 드디어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영국의 배신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후세인을 헤자즈 왕국의 왕으로만 인정하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통일 아랍국가 건설과 칼리파 복원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후세인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를 영국이 점령한다. 영국 정부가 아랍인들과 로렌스를 제국주의적 전략에 이용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은 무너지고 튀르크 민족이 지배하던 광활한 영토는 아나톨리아 북반부(현 터키)로 축소된다. 이때 영국군을 무찔러 국민적 영웅이 된 무스타파 케말이 반정부 세력을 모아 술탄 정부를 타도하고 현재 터키를 수립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의 바람이 중동으로 파급되는 것을 우려해 터키라도 조용히 있기는 바라는 마음으로 이를 승인한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16년 이미 오스만 해체를 예상한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는 오스만 영토를 3분 하기로 합의한다. 러시아가 자국의 혁명으로 이 대열에서 이탈하자 1920년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영국 외교관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피코 사이에 맺은 비밀협정을 토대로 새로운 중동의 지도를 그린다.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그 결과 프랑스가 레바논 북부와 시리아를 차지하고 영국이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현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을 차지한다. 이때 현재와 같은 인위적인 직선 형태의 국경이 생긴다. 인위적인 국경으로 인해 쿠르드 민족은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민족과 문화가 전혀 다른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네 나라에 찢어져 살게 되면서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 된다.


1921년 영국 식민장관이었던 처칠은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어 영국의 중동 지배를 더욱 구체화하려 한다. 이 모임에 처칠의 고문으로 참여한 로렌스의 제안으로 후세인의 두 아들에게 여러 개로 쪼개진 아랍국가의 왕 자리를 하나씩 주기로 한다.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에 극렬히 반대하는 아랍 민족주의가 싹트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의 명문 하심 가문에 왕위를 줌으로써 아랍인의 불만을 가라앉히려 한 것이다. 그 결과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는 요르단강 동쪽의 트랜스요르단(현 요르단)의 국왕이, 삼남 파이살은 이라크의 국왕이 된다.


이라크 왕국은 1958년 혁명으로 무너졌지만 요르단은 지금껏 선지자 무함마드의 혈통이 다스리는 나라로 남아있다. 하지만 정작 후세인은 그가 다스리던 헤자즈조차 지킬 힘이 남아있지 않아 1924년 압둘아지즈가 이끄는 사우드 가문의 공격으로 메카와 메디나와 제다를 차례로 상실하고 사이프러스로 유배된다. 이후 트랜스요르단으로 건너가 1931년 사망한다.


4. 사우드 왕가


1932년 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국왕은 장남 투르키 왕자가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하자 둘째 아들인 사우드에게 승계 준비를 시키면서 “파이살이 더 명철하니 그의 조언을 새겨들으라”고 명령한다. 사우드는 아버지를 도와 전투만 했고 파이살은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지식을 체득했을 뿐 아니라 외국을 다니며 서구 문물을 배우고 외교능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1953년 압둘아지즈 국왕이 서거한 후 즉위한 사우드 국왕은 사치를 좋아해 즉위 5년 만에 국가 경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자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차관을 끌어 쓸 정도가 된다. 더구나 무능한 자기 아들들을 포진시켜 부왕의 유언인 형제 상속이 아닌 부자 상속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왕실 인사들과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사우드 국왕의 폐위를 결정한다.


사우디 국왕 중 파이살만큼 현대화 발전에 관심을 두었던 활동가적 군주가 없었다는 평가가 말해주듯 파이살 국왕의 개혁적인 정책 추진과 국가 리더로서 그가 보여준 결단력은 사우디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그는 국가의 각종 비용을 절감하고 석유 생산량을 늘려 재정 균형을 잡아간다. 1970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오일머니를 이 거대한 국가적 사업에 투입한다.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고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인이 피해를 보자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 등 서구 국가에게 석유 공급을 축소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파이살은 비록 같은 반감을 가졌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우선해 석유 공급을 중단하지 않는다. 당시 사우디는 경제적 전략적으로 미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1973년경 세계석유 수요가 증가하고 미국도 비상시에는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파이살은 결단을 내려 미국이 시온주의를 지원하고 아랍 세계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석유 공급을 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알린다. 이후 사우디 주도로 중동 산유국들은 친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석유 공급을 축소하거나 중단하고 이로 인해 유가가 급속도로 상승한다. 이 일로 더 많은 오일머니가 사우디로 흘러 들어오자 파이살은 외국에서 수많은 기술자와 의사를 불러들이고 사우디 여성들에게 최초로 고등교육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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