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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25. 2024

[요약] 중동 종교운동의 이해 2

최영길

21세기 중동이슬람문명권 연구사업단

한울

2005년 5월 17일


1. 사우디 건국


18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이전 상태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미신과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있었다.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은 이를 개혁하기 위해 순수 정통 이슬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지만 토후국 왕자들이나 부족장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통치하던 디리야 지역으로 본거지를 옮겨 이슬람 부흥 운동을 재개했고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그를 지원하면서 두 가문은 함께 알라를 위한 성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아라비아반도에 일고 있는 정통 이슬람 회복 운동을 차단하고 나선 데다가 정적이었던 무함마드 이븐 라시드와 분쟁을 겪느라 허약해진 사우드 가문은 리야드와 그 주변을 라시드 가문에게 빼앗겼다. 그 결과 1891년 이맘 압둘라흐만 알 파이살 알 사우드는 12살이었던 압둘아지즈와 가족을 데리고 리야드를 떠나 쿠웨이트로 넘어가 그곳에서 체류했다.


압둘아지즈는 1902년 1월 15일(헤지라 1319년 10월 5일) 부친의 고향인 리야드를 탈환해 사우드 가문의 리야드 통치를 재개했다. 또한 무함마드 이븐 라시드가가 본거지로 삼았던 하일을 비롯한 아라비아반도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했고, 1924년 순례월에 메카에 입성해 명실상부한 아라비아반도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 등장했다. 이슬람 학자들을 비롯한 법률가와 지역의 지도자들도 그를 통치자로 받아들이고 충성을 맹세했다. 드디어 1932년 12월 22일 자기가 장악한 모든 지역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선포하고 초대 국왕에 올랐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사우디 왕국의 헌법으로 채택하고 “모든 일을 협의해 처리하라”는 쿠란 32장 159절을 따라 협의기구인 마즐리스 알 슈라(Mazlis Al Shura)를 설치했다. 초대 국왕부터 모든 국왕은 쿠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헌법으로 채택하고 이 두 가지 근원을 통치이념과 권력, 입법, 사법, 행정, 교육, 문화, 외교정책,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치행위와 일상생활 전반에 적용함으로써 사우디는 정통 이슬람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파드 국왕은 두 성지 메카와 메디나 확장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왕(Al Malik)이나 폐하(Al Jalalah)라는 칭호 대신 ‘두 성지의 수호자(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 쿠란


사우디를 비롯한 전 세계 무슬림들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알라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그의 모국어인 아랍어로 계시한 것을 쿠란이라고 정의한다. 쿠란은 610년 9월 27일 메카에서 북동쪽으로 3마일 떨어진 사우르 산 중턱 히라 동굴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있을 때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이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알라의 말씀을 계시받은 즉시 외우고 외운 것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외우게 했다.


3. 이슬람 운동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은 리야드 북쪽 우야이나 지역의 타밈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 압둘와합과 삼촌 이브라힘에게 쿠란을 배웠다. 이후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의 전통을 다시 공부하고 이라크 남부 바스라로 건너가 아랍 어학과 이슬람 교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바그다드에서는 이슬람 법학을 수학했다. 사우디 이슬람 학자(Ulama)들은 그가 선지자 무함마드 시대처럼 이슬람이 종교와 법과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되는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이슬람 운동의 최종 목표로 삼았다고 서술한다.


그는 쿠란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에 따라 간통을 저지른 여인에게 투석에 의한 사형을 선고하고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쿠란에 금지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이슬람법을 원칙대로 적용했다. 지역 주민들의 신앙 중심지가 되어 있던 일부 고분이나 묘당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로 주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한편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알아흐사 지역의 통치자가 우야이나 지역의 통치자에게 그를 죽이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반대에 한계를 느낀 그는 그의 활동을 후원했던 우야이나 통치자의 조언을 따라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통치하는 디리야로 활동 거점을 옮긴 것이다.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를 만난 자리에서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은 이슬람 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유일신 사상’과 ‘선행 장려와 사회악 퇴치’(사우디 종교경찰인 권선징악위원회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됨 Committee for the ‘Promotion of Virtue and Prevention of Vice’), 그리고 ‘성전’(지하드 Jihad) 세 가지를 제시했고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의 손등에 손을 올려놓고 셰이크가 펼친 쿠란의 가르침과 선지자의 언행과 전통에 근거한 통치이념과 이슬람 사상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협정을 맺었다.


나지드 지역을 비롯한 메카와 메디나 예멘 그리고 다른 국가의 많은 이슬람 학자들이 이 운동을 지지했고 후원하는 지지자들이 늘어났으며 이에 사우디 통치 가문이 협력함으로써 짧은 기간에 다신론 사상과 미신을 타파하는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주변의 일부부족장들이 이 운동에 반대하면서 디리야 지역을 공격해왔다. 그러자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은 지역을 방어하고 지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전을 선포했다. 웅변과 글을 통해 반대파를 설득하고 때로는 칼을 앞세우고 공격해오는 부족들을 방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복사업을 펼쳐나갔다. 이때까지 통치권 영역 문제로 분열되어 있던 부족장들이 그를 중심으로 단합하자 그가 주도한 이슬람 운동을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나지드와 두 성지가 있는 히자즈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비아반도가 정통 이슬람 사상과 이념으로 통일되었다.


4. 이슬람 운동에 대한 공격


이슬람 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가자 오스만튀르크 정부는 이슬람 운동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비록 이슬람 운동이 반 오스만튀르크 운동이 아니라 순수한 이슬람 회복 운동이었음에도 나지드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이 쇠퇴하자 이슬람 운동을 반란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때까지 오스만튀르크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이슬람 제국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하산 이브라힘 하산은 <이슬람 역사와 문화>라는 그의 저서 353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 지도자이며 칼리프인 오스만튀르크 수란은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의 가르침을 이교도들의 행위로 간주하고 이 운동의 확산을 막는 것이 최선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가 그들의 수중에 넘어가자 술탄은 그를 제압하기 위해 이집크의 무함마드 알리에게 와하비 운동을 제압하라는 임무를 하달했다. 1811년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 국경을 넘어 아라비아반도 정복에 나섰다. 1912년에는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투순이 메디나를 점령한 후 계속해 제다, 메카, 타이프를 정복했고 그 뒤를 이어 1818년에는 이브라힘이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 가문의 본거지였던 디리야를 점령하고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압둘라를 카이로로 붙잡아간 후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그곳에서 처형되도록 했다.”


유럽에서도 이슬람 운동이 자신들의 국가 이익에 불리하다고 보고 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고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리 빈바스는 그의 저서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에서 전하고 있다.


“카멜 타월은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의 이슬람 운동에 관해 나폴레옹과 교황이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몇 가지 문서를 발견했다. 이 문서들은 그의 이슬람 회복운동이 그들의 동방 진출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항하는 조치를 요구했다.”


그뿐 아니라 나지드 주변의 하라마인 촌락을 비롯해 주변 부족장들도 이슬람 운동에 반기를 들었다. 성인들의 묘당을 찾는 방문자들을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 이슬람 운동은 그들의 수입원을 막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로 오스만튀르크가 아라비아를 점령하고 각 지역 각 국가에서 메카를 찾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그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공세를 펼쳤다. 고국으로 돌아가 각 국가의 순례자들은 쿠란과 선지자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운동을 오히려 정통 이슬람에서 벗어난 행위로까지 묘사했으며, 서구의 일반 반이슬람 지도자들도 그를 원리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로 묘사했다.


5. 이슬람 성지


헤지라력 1362년 압둘아지즈 초대 사우디 국왕 시대에 들어와 메카 신전 문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그 이후로 그 열쇠는 하람 사원을 관리하는 알슈아이비 가문이 보관해오고 있다. 현재 신전 문은 칼리드 국왕의 지시에 따라 헤지라력 1399년에 제작된 것이다.


쿠란 17장 80절에 언급되고 있는 진실의 출구와 진실의 입구가 각각 메카와 메디나로 해석되면서 이 두 도시는 신의 축복을 받은 성역이 되었다. 메카가 최초로 아브라함에 의해 성역화되었다면 메디나는 헤지라력 7년 초반에 선지자 무함마드에 의해 성역화되었다. 그 이후로 두 도시는 성역(하람)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 성역 안에서는 짐승 사냥이나 나무를 절단하는 행위를 비롯해 무기 소지 및 살상이 금지되었다.


6. 성지순례


선지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남성은 속옷까지 벗어버리고 바느질되지 않은 두 장의 길고 흰 천으로 한 장(Izar)은 허리에 둘러 아래를 가리고 다른 한 장(Rida)은 어깨에 두르고 메카로 들어간다. 평상복을 벗고 하얀 천으로 몸을 가리는 것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귀의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수의 한 벌만 걸치고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것처럼 현세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알라 하나님 앞에서 평등을 실현하는 한 과정이다. 순례자는 고급스러운 구두 같은 신발을 신어서도 안 되며 필요한 경우 샌들 같은 가장 허름한 것을 신거나 아니면 맨발로 순례하는 것이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했다. 알라가 당신 앞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모세에게 명령한 쿠란 20장 12절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쿠란에 명시된 대순례(핫지)가 헤지라력 10월, 11월 그리고 12월 10일까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대순례 의식은 10월초부터 가능하다. 그러나 순례의 주요 의식은 12월 초순부터 13일 사이에 수행되며, 이 기간 중에서도 8, 9, 10일 3일 동안이 대순례의 절정이다. 순례자들은 소순례를 마친 후 9일 신전에서 dr 14킬로미터 떨어진 에덴동산(Arafat)으로 이동해 순례의 마지막 의식을 행한다. 자비의 산(Jabel Al Ramah)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은 아담과 하와가 땅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만나 알라를 경배했던 곳이며, 아브라함이 알라를 인식하는데 절정에 이른 곳이다. 또 선지자 무함마드가 임종하기 전에 무슬림들에게 마지막 고별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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