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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2. 2024

[요약] 중동 정치의 이해 2

박종평

21세기 중동이슬람문명권 연구사업단

한울 아카데미

2005년 5월 25일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건국 과정에서 두 가지 요소를 이용했다. 첫째, 이븐 사우드는 와하비즘과 결합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다. 둘째, 영토 확장 과정에서 부족주의(tribalism)를 이용했다. 아라비아반도는 당시 지역적으로 부족장들이 카라반 루트와 전략적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부족장들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으며, 특정 권력에 소속되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븐 사우드는 군사력보다는 부족주의를 활용해 통치권을 확대했다. 부족장들은 점차 많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부유층의 구성원이 되었고 부족원인 유목민들은 뒤늦게 정착한 도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류층에 편입되었다. (p.18) 


사우디의 현 정치체제는 파이살 국왕 시대에 수립되고 조직됐다. 파이살은 관료화와 제도 설립, 그리고 기술의 현대화라는 두 가지 면에서 변혁을 시도했다. 1930년대 초 외무부와 재무부가 설립되고 1953년 정부 기구 재조직 포고령으로 통신, 교육, 농업, 보건, 상무, 공업 분야의 정부 부처가 신설되었다. 정부 조직이 서구의 정부 조직을 모방하고 있으나 기능은 많은 차이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정부의 고급 관료는 능력보다는 왕족이나 영향력 있는 부족장 출신으로 임명해 공직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개인적인 치부의 기회로 인식함으로써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둘째, 전문 교육기관이 미비해 정부 운영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같은 주변 아랍국가들의 인력에 의존해야 했다. (p.20)     


급격하게 늘어난 오일달러는 사우디 왕실로 집중되었다. 오일달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우디의 현대화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사우디 왕정의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첫째,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서방세계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사우디 왕실은 대외관계는 물론 국내 치안까지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둘째, 석유 수입을 부족 지도자와 동맹 세력에게 분배함으로써 사우디 왕정에 대한 불만을 줄이고 중앙권력에 의존하게 만들어 정부의 권력을 강화했다. 또한 오일달러로 무역상과 석유 기술자가 중심이 된 중산층이 출현했다. 아람코를 비롯한 석유회사가 중심이 되어 기술자들을 양산했는데 아람코 직원 숫자가 행정부 인원을 능가할 정도였다. 특히 1973년 이후 고유가시대를 맞아 베두인이 도시에 유입되고 외국인 근로자들이 사우디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전기, 주택, 운송과 같은 기간산업이 미비해 사우디 왕정의 발전전략이 성공하지 못했다. 고유가가 오히려 풍요 속의 빈곤을 만들어 낸 것이다. (p.24)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우디 정부는 막대한 석유 수입을 복지와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사우디인들은 고등교육 혜택을 받고 해외 유학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사우디 내에는 이들의 교육 수준에 맞는 일자리가 없었다. 또한 중산층은 정부 부처나 군부에서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서 체제에 불만을 갖는 세력을 양산했다. (p.25)     


오일달러가 사우디 국민에게 복지 형태로 분배되면서 대부분의 국내 생산은 외국인 근로자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저유가로 돌아서면서 사우디 국가 재정도 적자로 돌아섰고 민간기업이 위축되었다. 또한 오일달러 급감으로 사우디 국민의 실업이 증가했고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다. (p.26)     


국가 건설 과정에서 오일달러를 장악한 사우드 가문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보호와 지원으로 지배 왕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대신 지방의 유력 부족들은 사우드 가문과 결혼으로 동맹을 맺었다. 수다이리 출신의 핫사 빈트 수다이라 왕비가 낳은 일곱 왕자는 왕실의 최대 세력이 되었고 6대 압둘라 국왕은 사우드 가문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북부 부족 샴마르 출신이다. (p.27)     


5대 파드 국왕은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신행정기본조직에 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사우디는 왕실이 정통성을 갖는 최상의 체제임을 강조함으로써 왕정에 대한 변화 요구와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이다. 파드 국왕은 포고령에서 “사우디의 통치는 왕국을 건국한 압둘아지즈 국왕의 아들과 손자로 한정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형제 왕위계승을 부자 왕위계승으로 확대했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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