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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2. 2024

소설 <모조품>

커스틴 첸

유혜인 옮김

아르테

2023년 11월 27일


중학교 다닐 때쯤 라디오 방송극이 지금 TV연속극 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당시는 부잣집이나 TV가 있을 때여서 서민이 즐길 것이라고는 라디오밖에 없었다. 라디오도 집집이 있는 게 아니라서 방송극이 나올 때가 되면 라디오 앞에 모여앉곤 했다. 일일연속극은 대개 하루 20분 길이로 한 달씩 방송했다. 연말연시 같은 특별한 때에는 특집극으로 한 시간 가까이 방송하기도 했다.


그때 들었던 특집극 하나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헤어지면서 나눈 이야기가 전부였다. 당시 연속극에는 무대장치 대신 음향효과를 넣었는데, 이 특집극에서는 음향효과라고 해야 컵에 물 따르는 소리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모든 사연을 설명해낸 것이다.


그때 여자 주인공을 맡았던 성우가 김세원 씨이다. 동아방송 ‘밤의 플랫폼’, 동양방송 ‘영화음악실’, 문화방송 ‘가정음악실’을 진행한 명진행자이자 시 낭송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바로 그 김세원 씨가 내가 중학교 때 라디오 특집극 주인공 역을 맡은 성우였다는 말이다.


그 후로 그런 작품을 다시 한번 만났으면 했다. 드라마던지, 영화던지, 소설이던지.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소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가? 온전히 두 사람만의 대화를 통해서 스토리를 풀어나간다는 설정이 멋지지 않은가? 오직 두 사람의 음성과 어조의 높낮이와, 때로 한숨 짓거나 침묵함으로써.


지금껏 이와 비슷한 드라마는 물론 소설도 본 일이 없다. 때로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나라도 써볼까 하고.


두어 달 전인가 독서방송 ‘책걸상’에서 이 작품을 소개했다. 소설 전체가 주인공의 독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작품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주문했다. 내용은 대충 설명을 들었지만 소설가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냈을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


“제일 먼저 보인 건 눈이었어요. 눈이 무슨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커다랬고...”라는 첫 문장은 화자이자 주인공인 ‘에이바’가 자기 친구인 ‘위니’를 만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마 독서방송을 듣지 않았더라면 페이지가 한참을 넘어가도록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열 페이지쯤 지나서야 비로소 그 이야기를 듣는 이가 형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고 버킨백, 토트백, 켈리백, 가브리엘백까지 생전 보도 듣도 못한 핸드백 이름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주인공 ‘에이바’는 결혼해 아들을 둔 사내변호사이고, 대학 친구인 ‘위니’를 만나 짝퉁 핸드백 사기에 동원되었다가 붙잡혀 형사에게 취조받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내용은 사기극인데 독자는 영락없이 추리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긴장하지 않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지금이 어느 상황인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책을 사놓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미뤄둔 사이에 아내가 먼저 읽기 시작했다. 책은 다시 책꽂이에 꽂혔는데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독서방송에서 들은 내용으로는 흥미진진했을 책이었는데... 잠시 의아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 바로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독서방송을 듣고 읽기 시작했는데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런 힌트도 없이 읽었다면 아마 나도 중간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


어느 날 중국계 미국인인 주인공 ‘에이바’에게 대학 때 동창이었던 중국인 ‘위니’가 찾아온다. ‘위니’의 중국인 친구가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름난 이식 전문의이자 ‘에이바’의 남편인 ‘올리’의 도움을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니’가 ‘에이바’를 찾은 것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이바’는 짝퉁 핸드백 사기를 치고 다녔는데 규모가 커지자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졌다. 그저 짝퉁을 짝퉁으로 파는 건 돈이 되지를 않고 짝퉁을 진짜로 파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진짜 명품 핸드백을 산 후 그와 똑같이 만든 짝퉁 핸드백으로 환불받고 진짜 명품 핸드백은 약간 할인해서 판 것이다.


그런 사업에 변호사인 ‘에이바’를 끌어들이는 건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니’는 그것을 위해 이런저런 덫을 놓고 ‘에이바’가 그 덫에 걸릴 때까지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인데 날이 갈수록 범죄 규모가 커지다 보니 결국은 체포되거나 추적의 대상이 된다. 소설은 우여곡절 끝에 ‘에이바’와 ‘위니’가 추적을 피해 둘이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소설의 전개 방식에 흥미가 있었던 것이지 스토리 자체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마치 중학교 때 라디오 특집극을 인상 깊게 듣고 나서 머릿속에 그려왔던 형태로 스토리를 풀어간 이 소설의 구조가 궁금했던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독백으로 소설을 끌어나간다는 설정이었으니 내가 거기에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처럼 독특한 소재와 전개 방식을 끌고 나가기엔 소설가의 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소설이라면 무엇보다 스토리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장치를 곳곳에 배치해놓다 보니 오히려 스토리를 확인하느라 작품에 집중하지 못했고 속도감은커녕 암호 푸는 느낌으로 더듬더듬 읽어나가야 했다. 왜 이렇게 풀어나갈까 궁금해 하다가 혹시 장편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아무튼 내 기준으로 볼 때 시도는 좋았지만 작품이 그렇게 만들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차라리 이 소설을 단편으로 만들면 속도감이나 긴장감도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빠르고 깔끔하고 담백한, 그리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문학에 문자도 모르는 이’가 할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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