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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9. 2024

[요약] 사우디아라비아

캐런 엘리엇 하우

서정민 해제

빙진영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6년 8월 25일


[해제] 2015년 9월 말 사우디 왕실에서는 고위 왕자가 작성한 국왕 교체 요구 서한과 이를 지지하는 서한이 잇달아 공개됐다. 당시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살만 국왕 퇴진을 먼저 주장하고 나선 왕자의 서한을 보도했다. 이 왕자는 “과다한 예산 지출과 승리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예멘, 시리아, 이라크에 많은 비용을 써가며 참전한 데 대해 왕실이 분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부 왕자들의 불만 표출은 2015년 9월 24일 메카 성지순례 압사 참사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사건과 겹치면서 살만 국왕의 권위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을 반증한다. ... 살만 국왕은 즉위하고 나서 자신의 가문 출신으로 후계 구도를 재편했다. 이에 일부 왕족이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살만 국왕의 의사결정은 훨씬 공격적이고 초강경 노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위 직후 수니파 종주국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예멘을 공습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우디는 수니파 국가들을 결집해 예멘 시아파 후티 반군을 공격하면서 이란에 대한 견제에 들어갔다. 국내에서도 2015년에만 150명 이상을 처형했다. 전년의 두 배 수준이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급부상했다. 이라크에도 사담 후세인의 수니파 정권이 무너지고 시리아 중앙정부가 들어섰다. 시리아 집권세력도 시아파의 일파인 알라위파다. 레바논 최대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도 시아파다. 바레인 인구의 70퍼센트, 쿠웨이트 인구의 40~50퍼센트가 시아파이다. 예멘 북부와 사우디 동부에 시아파가 밀집해 거주한다. 시아파가 사우디를 초승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꼴이다.


[서문] 2006년 기자로서 은퇴한 후 순전한 호기심으로 사우디를 수없이 방문했다. 5년간 사우디를 깊게 파고든 결과물로 이 책을 발간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제한도 있었지만 이점도 적지 않았다. 서양 여성이기에 남성은 물론 종교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무리에도 접근할 수 있었고, 사우디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는 남성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050] 이븐 사우드는 22명의 아내와 4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그중 36명이 장성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의 짧은 결혼까지 포함하면 평생 둔 부인의 수는 300명이 넘는다. 그는 간계와 이중성으로 유명했다. 종교 지도자가 옷이 너무 길어 사치스러워 보인다고 지적하자 즉석에서 가위를 달라고 해서 옷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버렸다. 그러고 종교 지도자가 돌아가자 호위병을 시켜 다시는 자기 눈에 띄지 않도록 만들었다.


[05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지역에서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대체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자 이크완들은 이븐 사우드에게 영국 이교도들에게 대항하여 성전을 벌여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이븐 사우드는 이에 반대했다. 압둘라 요르단 국왕의 고조부이자 경쟁자인 샤리프 후세인을 메카에서 물리치고 아라비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자금과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븐 사우드는 메카와 헤자즈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이크완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들이 아라비아를 넘어 영국의 보호국인 이라크를 상대로 성전을 벌이려 들자 이들과 전쟁을 벌인다. 사우디 건설을 위태롭게 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라크까지 확장하거나 강대국인 영국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크완을 공격했다.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을 공격해 섬멸한 것이다. 이븐 사우드에게 종교는 아라비아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현재 그의 아들들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을 말하면서도 필요하면 종교 지도자와 맞서거나 파면한다.


[052] 1980년대 이란 종교혁명의 바람을 타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득세하자 사우드 왕가는 이들을 모두 받아주었다. 이런 극단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1979년 일어난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11월 20일 이맘이 막 새벽기도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총성이 울렸다. 베두인 주하이만 알 오타이비와 700여 명의 추종자가 총기를 사용해 이슬람의 가장 신성한 장소인 메카 그랜드모스크를 점거한 것이다. 그들은 사우드 왕가가 여성의 TV 뉴스 진행을 허용하고 영화를 상영하는 것과 같은 이교도적 개혁을 좌시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사우디 현대 역사에서 일어난 첫 번째 지하디스트의 공격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사우드 왕가를 이를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했지만 유혈전이 2주나 지속되자 이교도인 프랑스 특공대를 동원해 치명적인 화학무기로 이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적어도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우드 왕가는 주하이만 일당을 신속하게 처형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이들이 규탄했던 사회적 자유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여성 진행자들을 TV에서 퇴출하고 여성에게 히잡을 강요하고 영화관을 폐쇄했다. 그 결과 훨씬 더 급진적인 세력이 양산되어 9.11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056] 압둘라 국왕은 2005년 즉위한 이래 여성의 기회 확대를 옹호하였으며, 그 결과 소수의 선별된 여성들이 최초로 사우디 공식 사절단 자격으로 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여성을 슈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으며 2015년에는 실제 참정권을 부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057] 압둘라 국왕은 수많은 젊은이를 유학 보내기 시작했다. 2015년 현재 외국 대학에 다니는 사우디 출신 학생은 10만 명을 훌쩍 넘으며 그중 절반이 미국에 유학 중이다. 2009년에는 사우디의 교육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킹압둘라과학기술대학(KAUST)을 설립했다. 이는 사우디 최초의 남녀공학 대학으로 하버드 다음으로 높은 기부금을 자랑한다. 이슬람 최고 성직자인 울라마가 이 전례 없는 남녀공학 대학을 가리켜 이교도적인 혁신이라고 비판하자 온화해 보이는 국왕은 그를 즉시 해임했다. 또한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이 대학을 지지하는 설명을 발표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073] 룰루는 자식 7명과 2층에 산다. 아래층에는 남편 첫째 부인이 자식 8명과 산다. 남편은 40년째 격일로 아래위층을 오르내리며 산다. 첫째 부인과는 교류를 거의 하지 않는다. 룰루는 40대 초반의 교양있는 여성으로 간혹 더듬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영어를 잘 구사한다. 킹사우드 대학에서 공부한 덕택이다. 룰루가 자발적으로 집 밖을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집 밖의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대신 집에서 남편을 보필하거나 아이들이 엄격하게 종교적 삶을 지키는데 골몰한다. 룰루는 자기 삶의 한계를 단지 수용할 뿐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인다. [142] 아내의 처지에서 남편을 공유하는 게 어떤지 묻자 모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알라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지요.”


[110] 사우디의 벽은 이방인을 차단하고 집 안에 거주하는 사람을 가두기 위해 존재한다. 벽이 높고 화려할수록 집주인은 부유하고 고귀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부유하든 가난하든 왕족이든 평민이든 사우디인들은 모두 갇힌 채 살아간다.


[113] 2009년 말 제다에 홍수가 발생하자 페이스북을 통한 소통은 봇물 터지듯 이루어졌다. 이들은 침수로 인한 사망자 수가 정부의 공식 발표인 150명의 10배 이상이라고 추측했다. 한 젊은 교수는 제다 주지사가 TV에 나와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보면서 냉소적인 말투로 “사상자 수가 얼마라고 하든 거기에 0을 하나 더 붙이세요”라고 했다.


[116] 사우디 여성은 여행을 가려면 우선 순위 친척들이나 가까운 이웃을 방문해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돌아오면 또다시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 작은 선물을 나눠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간단히 짐을 꾸려 남편과 며칠 여행을 다녀오면 부정적인 소문이 돌거나 가족들이 창피를 당한다. 이래서 여성 처지에서는 그냥 집에 있는 편을 택하게 된다.


[123] 오늘날 사우디는 통일국가의 면모보다는 부족, 지역, 이슬람 분파의 집합체라는 성격이 강하다. 제다와 성지 메카를 아우르는 헤자즈 지역은 사우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사우디 왕가 발상지인 리야드를 아우르는 네지드 지역 출신들이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그들의 관습과 종교관을 모든 국민에게 강요한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석유가 풍부한 동부지방 출신 시아파의 원성은 더욱 심하다. 이는 와하비즘이 삶을 지배하며 차별이 만연하는 사실에 분개한다. 부족 충성심 또한 국민을 분열시키는 요소이다. 부족 간의 결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선호하는 결혼 상대는 사촌이다. 사우디인들은 억양이나 이름으로 다른 부족을 쉽게 구분한다. 사우디인들의 삶에서 분열은 일상 요소다. 헤자즈 사람들은 지역주의를 이유로 네지드 사람들을 비난한다. 네지드 사람들은 헤자즈 사람들을 순수 혈통을 상실한 사람으로 여긴다. 북부 사람들은 시리아와 이라크에 가깝다는 이유로 열등하게 여겨지며, 이는 뿌리를 예멘에 두고 있는 남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네 지역민의 분열 특성은 오늘까지 이어진다. 대도시로 이사할 때 대부분 출신지역과 부족이 같은 이웃을 찾는 경향이 있다.


[144] 사우디 여성뿐 아니라 서양 여성에게도 1970년대 말이 훨씬 자유로웠다. 그 당시 나를 비롯해 서양 여성들은 사우디에서 아바야를 입는 경우가 드물었다. [147] 국왕의 한 측근은 “국왕은 여성 운전을 허락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보니 국민의 85퍼센트가 여성 운전에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왕께서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뭘 할 수 있겠습니까?”


[148] 무함마드는 카디자 생전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던 시절이었다. 619년 카디자와 사별한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명의 아내를 두었다. 무함마드 당시 여성은 모스크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 전쟁에도 참전했다. 사우디 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하지요.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무함마드는 항상 아내인 카디자에게 자문을 구했어요.”라고 증언했다.


[203] 1965년 압둘라 왕자가 태어났을 때 삼촌이었던 파이살 국왕은 사우디에 TV를 보급하려고 했다. 형 칼리드 왕자는 이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10년 후 국왕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압둘라 왕자의 또 다른 형인 파이살이 파이살 국왕을 암살한 것이다. 국왕이 해외여행을 금지한 데 대한 분노, 혹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추정된다. 국왕을 방문한 파이살은 국왕이 맞으러 나오자 삼촌인 국왕에게 권총을 세 번이나 쏘았다. 즉시 체포된 파이살은 1만 군중 앞에 세워졌다. 두 아들을 잃고 나자 아버지인 무사드 왕자는 은둔 생활을 했다.


[215] 파이살 국왕의 아들인 투르키 왕자는 서구에서 가장 인정받을 뿐 아니라 존경받는 왕자 중 하나이다. 그는 24년간 정보국장을 역임하고 관례에 따라 주영대사와 주미대사로 재직했다. 그는 압둘라 국왕의 미움을 사서 2006년 12월 주미대사로 근무한 지 15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이는 가족 내부의 음모 때문이었는데, 그의 사촌이자 매부이며 전임 대사인 반다르 빈 술탄 왕자가 벌인 일이었다. 반다르 왕자는 투르키 왕자에게 대사직을 넘긴 후에도 대미 업무에 지속해서 간섭해왔다. 대미 관계의 선봉장 자리를 두고 벌어진 이들의 권력투쟁은 가족 분쟁이 외부로 노출된 드문 사례였다.


[224] 1960년대 이후 사우디는 교육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오늘날에는 더 많이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전 세계 학생들과 비교할 때 사우디의 교육 수준은 여전히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절반이 넘는 학교가 낙후된 임대 건물에서 수업한다. 사우디 출신 남성 교사들의 대학 성적은 하위 15퍼센트에 그친다. 대학 성적이 좋은 남성들은 수입이 훨씬 높은 직업을 선택하고, 우수한 여성들은 남학생 가르치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 [226] 공립학교에서는 1학년부터 수업의 절반 정도에 코란을 가르친다. 초등교육 과정에서 종교 수업은 1주일에 9회지만 수학, 과학, 지리, 역사, 체육 수업은 통틀어서 1주일에 평균 12회이다. [229]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교육부장관이었던 파드 국왕은 종교계에 교육기관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235] 압둘라 국왕은 2011년 미국과 유럽 또는 아시아에서 유학하는 10만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39] 2002년 메카 여학교에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 종교경찰이 여학생들이 아바야로 몸을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의 탈출을 막아 여학생 5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국민적 분노가 들끓자 압둘라 국왕은 여학교의 지도 관리 담당을 종교 당국에서 교육부로 바꿨다.


[253] 2010년 ‘아랍의 봄’이 일어났을 때 사우디 정부는 수천억 달러를 사회 전 분야에 뿌렸다. 그 덕분에 시간을 벌었지만, 실업이나 빈곤, 중산층 생활 수준의 하락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결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국왕이 공무원 최저임금제 도입과 2개월 보너스 지급, 126,000개의 공무원 일자리 창출(보안 인력 강화 6만 명, 교사 및 보건 전공자 6만6천 명)을 결정하지 젊은이들은 민간 부분 생산직 취업을 준비하려는 동기가 대폭 줄어들었다. 이 보조금 덕분에 2004년 이후 공공지출은 3배 상승한 반면 민간부문의 비석유 부문 GDP 공헌도는 정체된 상황이다.


[254] 외국 노동력 자체가 경제적 병폐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완전고용경제라도 싱가포르처럼 외국 노동력을 유입해 생산력과 성장에 박차를 가해서 자국민과 외국인 노동자 모두에게 이로운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우디는 그 반대 상황이다. 사우디 경제는 실업 확대로 생산성을 잃어버렸고 외국 노동력을 수입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사우디인들은 이에 맞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수행할 의욕도 없다. 노동부 장관조차 인정하기를 사우디인들은 원하는 직업은 능력이 안 되고 능력이 되는 직업은 거절한다.


♣ 2005년과 2009년 사이 민간부문은 2,2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으나 사우디인은 겨우 9%만 차지했을 뿐이다. (오류)


[258] 정부가 선호하여 투자하는 거대 프로젝트는 예외 없이 공기가 상당히 지연되고 예산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2011년 프로젝트 관리자와 감독관 3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제 때에 종결하지 못한 정부 프로젝트가 97%, 예산 초과는 80%에 달했다. 가장 치명적인 점은 감독관, 즉 공무원들이 일이 지연된 것에 대해 아무런 잘못도 인식하지 못하고 막대한 국가적 낭비를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프로젝트 개발 관리 전문가의 말이다. 그 중 하나가 리야드의 프린세스 누라 대학이다. <아랍뉴스>에 따르면 2008년 예산 150억 리얄(40억 달러)였으나 2011년 5월 개교 당시 20억 리얄(53억 달러)을 투입하여 2년 동안 33% 초과지출이 발생했다.


[266] 정부에서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 교육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 하나로 아랍어가 가능한 교사가 부족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리야드에 신설된 플라스틱 고등교육원은 사우디 80개 직업훈련소 중 하나로 모든 설비가 최신식이며 1,900만 달러짜리 신축 빌딩에 약 4천만 달러에 달하는 독일제 최신식 플라스틱 제조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곳 전문가들은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출신으로 아랍어를 전혀 못 한다. 대화가 가능하다 해도 교육생들은 배우려는 열의가 없고 오직 출석한 대가로 받는 정부 보조금에만 관심을 보인다.


[267] 육체 노동과 단순 작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사우디 경제에 기여하기보다는 고갈을 초래한다. 이들은 최저 생계 수준을 유지하면서 임금을 모아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할 뿐 사우디 국내에서 소비하지 않아 사우디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81] 빈곤층들은 낙후한 시골에 거주하거나 대도시 변두리의 산업 불모지에 흩어져 있는 빈민가에 주로 모여 산다. 하지만 이들은 이방인뿐 아니라 다른 사우디인에게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우디는 풍부한 석유와 최고급 생활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가구의 40%가 한 달에 3천 리얄(850달러) 이하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2003년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극빈층은 국민의 19%를 차지하며 한 달 생활비가 1,800리얄(480달러)에 못 미쳤다. 한 달 생활비 850달러는 형편없이 낮은 금액처럼 보이지만 사우기 정부가 무상으로 의료서비스(제때 제공되지 못하거나 수준이 낮다)아 교육을 제공하고 물과 전기도 보조해준다. 게다가 휘발유 가격은 미국 평균의 1/5 유럽 평균의 1/10보다 싸다. 빈곤층과 중산층 가정은 쌀과 닭고기를 주로 먹는데 둘 다 비교적 값이 싸다.


[329] 이븐 사우드는 임종을 앞두고 장남인 사우드와 파이살을 불러서 형제 상속을 맹세하게 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국왕의 말은 힘이 없었다. 형인 사우드가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라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당시 사우디는 자원이 부족했음에도 사우드의 낭비벽은 심각했다. 궁전의 조명이나 냉방 그리고 관개에 소비되는 전력과 물은 리야드 전체 소비량보다 훨씬 높았다. 사우드 국왕이 궁전을 드나들 때면 으레 차창 밖으로 금화 은화를 한 움큼씩 던지고 이를 줍기 위해 앞다투어 나오는 모습을 즐겼다. 반면 파이살은 금욕적인 인물이었다. 사우드 왕가가 추구하는 소박한 생활 방식대로 독실하고 근면하게 생활했다. 사우드 국왕이 국가 자원을 낭비하고 이로 인해 석유 수익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1958년 사우디 정부는 파산했다. 그해에 왕실 대표가 파이살에게 새로운 개혁정부의 수장을 맡아 사우드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으라고 요청했다. 이에 파이살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부 인수를 발표했다. 파이살 왕세제는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 현금 보유액을 알아봤지만 고작 317리얄(100달러)이 전부였다. 사우디에서 규모가 가장 큰 상업은행(NCB)에 대출을 요청했지만 이미 사우드 국왕이 갚지 못한 거액의 대출금 때문에 거절 당했다. 이후 6년간 형제들이 통치권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공개적인 줄다리기는 팽팽해진다. 이에 국가는 내전 위기에까지 몰린다. 사우드 국왕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권력 이양을 거부하다가 1963년 마침내 왕궁을 왕실 근위대로 둘러싼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술탄 왕자는 군대를 경계 태세로 돌렸다. 국가방위군 수장이었던 압둘라 왕자 역시 군대를 소집했다. 사우드 국왕을 포함한 대가족은 왕궁에 틀어박혔다. 국가 전체가 긴장한 것이다.


[331] 결국 왕실은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울라마에게 이 다툼의 판결을 부탁했다. 울라마는 사우드 국왕이 자발적으로 왕세제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으니 이를 철회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왕실 어른들은 울라마에게 이 판결을 파트와로 규정하기를 요청했다. 파트와를 발표하자마자 7천여 명의 모든 왕자가 지지를 표명했다. 마침내 사우드 국왕은 사우디를 떠나게 되었다. 폐위 당한 사우드 국왕은 다란과 베이루트를 거쳐 종착지인 아테네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332] 파이살 국왕은 결단력 있고 원칙에 입각한 권위주의적 지도자로서 여전히 사우디인들에게 널리 존경받는다.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1960년대에 여성 교육을 도입하는 등 국가 근대화를 이끌었다. 1973년에는 서양에 대항하여 석유 금수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1975년 조카에게 암살당한 이후 왕위는 다른 이복형제에게 승계되었다.


[336] 1995년 이후 전반적으로 지도력의 정체가 이어지고 있다.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당시 압둘라 왕세제는 제대로 된 파트너나 왕세제 없이 10년간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다. 2005년 파드 국왕이 사망하자 압둘라는 국왕에 오른다. 압둘라 국왕이 술탄을 왕세제에 임명하지만 술탄은 2년 동안 뉴욕에서 암 치료받다가 2011년 10월 사망한다.


[342] 2011년 압둘라 국왕이 모로코에서 척추수술을 받고 회복 중일 때 튀니지에서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났다. 압둘라 국왕은 즉시 귀국해 연간 예산을 무려 85%나 초과한 1,300억 달러를 조달해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각계각층에 골고루 나눠줬다. 그중 5천억 리얄은 종교계, 군대, 학생, 무직자에게 나눠줬으며 절반은 주택공급에 배정했다. 처음으로 사우디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도입했다. 물론 외국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거액을 나눠줬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우디인의 특권의식을 강화하고 불공평한 부의 분배에 대한 적대감을 높였으며 국민의 권리를 왕가의 호의로 포장해 사우디인의 굴욕감만 높였다.


[349] 다란 부근에 벽으로 둘러싸인 사우디 아람코 안에서는 수천 명의 사우디인이 능률적이고 생산적으로 일한다. 여기에는 남녀뿐 아니라 수니파, 시아파가 골고루 관리자와 직원으로 근무한다. 사우디인이 대부분이며 외국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사우디 사회 전반에서 실력주의라 일컫는 방식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고 근면은 당연하게 여기며 진취적인 태도를 장려한다. 재능은 인정받고 보상받는다. 아람코는 종교경찰이 접근할 수 없고 사우디 일반사회와 달리 동떨어진 섬처럼 존재한다. 직원들은 목표와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최첨단 기술을 운용할 수 있다. 


♣ 여성으로서 사우디 아람코 부사장 가운데 한 명이자 시아파인 나드미 알 나스르는 킹압둘라 과학기술대학의 설립 및 건설 책임자로 선정된 바 있다. (남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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