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에서는 네옴시티라는 전대미문의 신도시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중 대표 사업인 The LINE은 폭 200m 높이 500m에 이르는 초고층 건물을 무려 170km 길이로 건설하는 것이지요. 이는 2016년 사우디가 발표한 경제개발계획인 ‘비전 2030’의 대표 사업으로 2030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해왔습니다.
이 계획이 발표되자 건설 전문가뿐 아니라 재정 전문가들도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계획이라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그런 비판적인 의견은 건너뛰고 계획 자체에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지난 4월 7일 경제 전문지인 블룸버그에서 목표연도인 2030년까지 당초 계획했던 170km 중에 2.4km만 가능하다는 보도가 나오자 우리 언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내용을 대서특필하고 나섰습니다.
그 보도가 있은 지 꼭 한 달만인 5월 7일,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상당히 긴 분량으로 네옴, 특히 The LINE의 문제점을 세세하게 보도했습니다. 보도는 사업비가 당초 발표했던 것보다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처럼 무모해 보이는 계획이 치밀한 검토 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당초 2030년까지 170km 구간을 한 건물로 잇겠다고 계획했던 것을 2023년 6월 MBS가 직접 출연한 네옴 홍보영상에서 길이 800m짜리 140동으로 나누어 건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계획이 변경된 것이라기보다는 개념설계 수준에 있던 계획이 구체화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생각합니다. 그 영상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그때쯤 이 사업을 단계별로 추진하되 1단계 목표를 2030년까지 16km미터로 설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800m짜리 건물 20동을 짓겠다는 것인데, 블룸버그에서는 그조차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를 3동에 해당하는 2.4km로 추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이번 보도는 공정보다는 사업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들은 1단계로 완성할 2.4km, 즉 계획의 1.4%를 건설하는데 드는 사업비를 1천억 달러로 추정하고 있는데, The LINE 170km를 포함한 네옴 전체 사업비가 5천억 달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업비가 최소 서너 배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도 네옴 전체 사업비를 당초 예상했던 사업비의 4배인 2조 달러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우디 올해 예산의 6배에 해당하고, 우리나라 예산의 4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실제로 네옴의 일부인 산악리조트 트로제나에 스키리조트를 건설하는 데만 이미 380억 달러를 투입했는데, 이는 예상 사업비의 2배가 넘는 규모입니다. (이곳에서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립니다)
게다가 네옴이 워낙 대형사업이어서 소요되는 건설자재도 엄청나고, 그래서 자재를 확보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그러다 보면 품귀현상으로 자재 가격마저 올라 경제적 부담이 이중삼중이 되리라 전망하고 있군요.
작년 12월에 무함마드 알 자단 재무부 장관이 ‘비전 2030’ 사업이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몇 년씩 지연되거나 일부는 조정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사우디에서 십수 년 근무하는 동안 사우디 정부에서 사업 지연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경우를 보지 못했던 저는 그 일이 매우 놀랍고 한편으로 신선하게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이제 사우디가 ‘예측 가능하고 상식적인 사회’가 되어가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발표를 장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아마 왕세자의 승인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왕세자 승인 없이 그런 발표를 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파이살 알 이브라힘 경제기획부 장관이 늦어지기는 하지만 당초 계획을 수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There’s no change in scale.) 물론 추진 과정이 과열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겠다고는 했지만, 지난 12월 무함마드 알 자단 재무부 장관의 발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재무부 장관의 발언을 부정한 것으로 느꼈습니다.
지난번 블룸버그 보도에서 네옴 사업 추진과 관련해 정부 내부에서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과 함께 이번 두 장관의 상반된 발언을 보면 MBS의 독단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MBS가 가진 절대권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Wall Street Journal 기사
왕세자까지 출연한 네옴 홍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amD9QoTH9M&list=PLjsflyWy1OajKlKkuEbUJKdy1U4E4FFTX&index=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