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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2. 2020

[사우디 이야기 1] 아랍어

사우디 이야기 (1)

저는 2009년 2월 사우디 현지법인에 부임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은퇴할 나이를 넘긴지도 이미 오래되었고 이곳에서 해야 할 역할도 끝나가는 것 같아 조만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아갈 때가 되니 그동안 낯선 곳에서 낯선 관습과 낯선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은 경험을 그냥 묻어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경험한 것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사소한 경험이기는 하지만, 같은 길을 걸어야 할 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출장도 잦고 잠깐 현장에 주재한 일이 있기는 해도 활동영역이 수도인 리야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업무영역도 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환경사업에 한정되어 시장을 폭넓게 알지 못합니다. 발주처도 몇몇 정부기관에 한정되어 있어 다른 정부기관이나 사기업의 상황은 잘 모릅니다. 가깝게 지내는 사우디 사람이 좀 있기는 해도 모두 업무로 알게 된 사이이니 그들의 속내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한정된 곳에서 한정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경험한 것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에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전체를 아는 것처럼 글을 쓰지나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가능한 직접 겪고 확인한 사실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류가 없을 수도 없고 제 개인적인 느낌을 온전히 배제하는 게 가능하지도 않겠습니다마는, 아무튼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아랍어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민 간 아내 친구가 있었다. 사느라 바빠서 아이들 말 가르칠 여유가 없어 아이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쓰며 자랐다. 자리가 잡혔을 때는 아이들과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고, 그것을 몹시 가슴 아파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다니고, 아랍어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워낙 외국인이 많으니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도 많고 수준도 천차만별이어서 형편에 맞춰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부모들도 대부분 아이들이 아랍어 쓰는 걸 그다지 반겨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영어를 쓰고 집에 돌아와서는 우리말을 쓴다. 최근까지도 여성취업이 실질적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니 집에는 늘 엄마가 있고, 한국처럼 근무시간이 길지 않아 아빠와 같이 보내는 시간도 훨씬 많다. 그러다보니 부모자식 간에 말이 통하지 않아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는다. 교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주재원 가정은 더욱 그렇다.     


아랍어는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 25개국 3억 명 인구가 사용하며, 중국어ㆍ영어ㆍ스페인어에 이어 네 번째로 사용자가 많다. 이 중 산유국은 에너지 조달 창구로도 그렇고 우리 기업이 겨냥하고 있는 큰 시장인데도 불구하고 아랍어 할 줄 아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거래 대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교관이나 주재원 중에서 아랍어가 가능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꼽기도 바쁘고, 한국인 아랍어 통역사는 숫자도 얼마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수준도 불안불안하다. 이런 상황이니 아랍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 큰 강점이 아닐 수 없다.     


주재원 아이들 중에 아랍어 하는 아이는 본 일이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중에 간혹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다보니 통역이나 번역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 학부모들이 아이들 교육에 쏟는 열정이야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 아랍어 과외를 시킨 경우는 지금까지 딱 한 집을 본 일이 있을 뿐이다. 물론 영어 과외는 시키지 않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한 나라에서 십 년 넘게 살았다면 그 나라 말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한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나는 인사말 이상은 알지 못한다. 글자도 모른다. 심지어는 내 이름조차 아랍어로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아라비아에 왔으니 숫자 읽고 쓰는 건 불편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아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숫자를 읽을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이게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십 년 산 교민도 크게 다르지 않고, 아랍어를 잘한다고 해도 격식 갖춘 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1/3이 넘고, 취업인구는 외국인이 오히려 사우디 사람보다 훨씬 많으니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게 원인일 수는 있다.


언젠가 사우디 사람들과 회의를 끝내고 함께 식사를 할 때 참석자 중 하나가 회의에 앞서 아랍어를 할 줄 몰라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면서, 농담처럼 “혹시 사우디 문화를 얕잡아봐서 그런 거 아니냐”고 한 마디 툭 던지고 간 일이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대답은 했으면서도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몹시 당황스러웠다.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현지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어딘가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거기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중동에서 한 번 일했던 사람은 다시 중동에서 일을 하거나 중동 관련 업무를 맡게 마련이고, 실제로도 이곳 주재원 대부분이 그렇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아랍어가 더 필요할 텐데도 아랍어를 배우려하지 않는 모습은 여전하다. 이곳에 오래 산 교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이니 아이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겠는가. 결국 계속 중동에 살거나 중동 관련 업무를 보면서도 굳이 아랍어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서라기보다는 이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그렇다고 이 문화를 무시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익숙해 있는 동양문화나 서구문화와 매우 달라 낯설게 여겨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구글 번역기가 상당히 좋아져서 영어 번역으로 글의 맥락을 파악하는 정도는 어려움이 없다. 아랍어 문서를 번역할 때 먼저 구글 번역기로 초벌 번역을 하면 시간을 상당히 아낄 수 있다. 얼마 전에는 나 혼자서 대학에서 발간한 백여 쪽 넘는 보고서를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일도 있었다. 몇몇 전문용어 때문에 아랍 직원에게 물어보기는 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다른 언어와 달리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다 보니 아랍어 텍스트를 번역기로 옮기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이와는 달리 텍스트에 들어있는 영문과 숫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데, 아직까지 번역하는 과정에서 간혹 숫자가 뒤집어지는 오류가 생기기는 한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랍어를 왜 배우지 않는지 의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별 반응이 없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학부모들은 그 시간에 한 마디라도 영어를 더 쓰기를 바라는데,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걸 권했으니 학부모들에게 면박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아이들에게 아랍어 배우기를 적극 권하는 마음은 아직도 다르지 않다. 기왕 중동에 사는데, 큰 노력 하지 않고도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마다하는 게 영 아까워서 말이다. 이젠 영어 하나 잘하는 걸 강점이라고 내세우기는 어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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