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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14. 2020

[사우디 이야기 2] 입국

사우디 이야기 (2)


언젠가 리야드공항에서 유럽 가는 비행기를 탈 때 비자 때문에 승강이를 벌인 일이 있었다. 비자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무비자입국 대상이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금년 기준으로 한국인은 189개국을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지만 사우디인은 77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2020년 Henley Passport Index) 그러니 무비자로 유럽에 가겠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우디인은 비자 없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 한국인은 사우디에 입국하려면 아직도 비자가 필요하다. 작년에 전자비자가 발급되기 시작하면서 한결 쉬워졌지만, 그 전까지는 입국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비자 받는 것도 까다롭고 길게 내주지도 않았다. 여성은 특히 더했다. 우리가 아쉬운 입장이었고 여성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이슬람 국가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생각해보면 양국이 지켜야 할 상호주의 원칙에 어긋난 일이었다.


처음 입국할 때 일이다. 비자 받는 것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까다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야박했다. 처음에 3개월이었던 유효기간이 이후 6개월로 늘었지만 체류기간은 14일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회사 설립하는데 짧아도 1년이 걸렸다. 입국해서 회사부터 세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인 조건이었다. 결국 체류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 14일 마다 출입국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만에 챙겨야할 현장이 있었고 아랍에미리트 시장도 살펴봐야 할 상황이어서 일정을 잘 맞춰서 체류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보내던 중 문제가 터졌다. 현장 상황이 달라져서 출장을 앞당겨서 다녀왔다. 출입국이 당겨졌으니 다음 출입국 일정도 함께 당겨진 것인데, 그만 그것을 까맣게 잊고 당초 계획했던 출장 일정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출장가기 전날 비로소 그 일을 기억해냈다. 체류기간을 넘겼으니 불법체류자가 된 것이었다.


그때 소동은 기억하기도 싫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visa office*를 운영하는 사우디인의 도움을 얻어 일을 잘 무마할 수 있었다. 덕분에 300만 원에 달하는 벌금도, 불법체류자 딱지도 면했다. 어디 줄을 끌어댄 것도 아니고 그가 담당자를 하나하나 만나 사정해서 해결한 것인데,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있는 지금은 꿈꾸기도 어려운 이야기이다.


Visa Office; 비자, 거주허가, 가족초청에 관련한 문제를 처리해주는 업체. 회사에 이를 전담할 직원이 없다면 visa office를 이용하는 게 낫다. 규모가 작은 한국 업체나 지사에서는 visa office와 계약을 맺고 해당 업무 처리를 맡기는 경우도 있다.


내가 이렇게 살얼음판을 걷는데도 함께 일하는 미국인 동료는 도통 체류기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나 내나 거주비자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알고 보니 미국인에게는 ‘유효기간 5년, 체류기간 3개월’짜리 비자를 내주고 있었다. 부럽기도 하고 국력의 차이를 실감하기도 했다.


모두가 겪는 이런 어려움은 대사관에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거론되었다. 우리 대사관에서 사우디 외교부와 협상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2018년 초에 양국이 ‘비자발급 간소화 양해각서’에 서명하였다. 서명할 때쯤 비자발급 수수료가 엄청난 폭으로 올랐다. 틈만 나면 ‘세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상위권에 들었다고 자랑하는 사우디 정부에서 세수를 늘이기 위해 비자발급 수수료를 올린 것이니, 당시 저유가로 인해 사우디 정부가 느꼈을 타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이전에는 비자발급 수속비 30만원 정도만 들었는데, 거기에 수수료 60만원(단수비자)~150만원(1년 복수비자)이 더해진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아직 비자발급 수수료가 이보다 비싼 나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 양해각서는 서명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근 1년이 지난 2019년 2월에야 비로소 발효되었다. 비자 한 번 받아놓으면 5년을 잊고 살아도 된다는 것도 그렇고, 수수료가 10만원으로 내린 것도 이곳에서 일하는 기업에게는 큰 도움이 아닐 수 없었다. 대사관에서 늘 기업을 도우려고 애를 쓰지만 그때만큼 크게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부임 초기에는 비자 유효기간을 일수가 아닌 개월 수로 표시했다. 함께 일했던 동료 하나가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바레인으로 출국했는데, 다음날 항공사에서 리야드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태워주지 않았다. 유효기간이 지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명히 6개월이 되기에는 아직 며칠 남았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개월 수가 문제였다. 우리는 그레고리안력으로 따져서 6개월을 180일로 계산했고, 그들은 헤지라력으로 따져서 177일로 계산한 것이었다.* 곤경을 치러서 그렇지 물론 돌아오기는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일상이었던 때였으니 말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헤지라력으로는 1년이 354일이다. 이후로 비자 유효기간을 개월 수로 표시하던 걸 일수로 바꾸어서 더 이상 그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공문서도 차츰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기관에 따라 헤지라력을 기준 삼는 곳이 있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인허가나 면허와 관련된 일은 더욱 그렇다.


비자 발급을 위한 초청장은 초청자가 기업일 경우 외교부 온라인 포털에서 신청한 후 각 지역 상공회의소에서 온라인으로 확인받는 것으로 절차가 끝나니, 앉은 자리에서 초청장을 발급받을 수 있다.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 초청할 경우 초청자는 기관이 아니라 외교부가 된다. 따라서 외교부의 승인이 필요한데, 사우디 정부기관 문서처리가 그렇듯 처리과정을 확인할 수도 재촉할 수도 없다. (빠를 때 2주, 늦어질 땐 2개월 가까이 걸리기도 했다.) 이전엔 외교부 초청장은 수수료가 면제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를 활용했지만 이제는 비자 수수료가 10만원으로 줄고 전자비자까지 발급되어서 굳이 이를 활용할 이유가 없어졌다.


일반 방문비자는 달리 ‘여성’과 이곳에 거주하는 교민의 ‘가족’은 사우디 외교부에서 초청장을 승인 받아야 한다. 짧게는 사나흘 길어도 일주일을 넘지는 않지만 승인이 거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든 절차가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부 사유를 물을 수도 없고 이의를 제기할 방법도 없다.


그동안 사우디 정부에서 발급하는 비자는 방문비자, 가족비자, 취업비자로 한정되어 있었고 어느 나라도 무비자입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Saudi Vision 2030 정책의 일환으로 관광사업이 활성화되면서 2019년 9월에 관광목적의 전자비자가 발급되기 시작했다. 한국도 발급대상에 포함되었고, 심지어는 도착비자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여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제든 입국해 최대 3개월 체류할 수 있다는 말이니, 그 이상 체류할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복잡하게 비자를 발급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전자비자는 수수료 162달러만 내면 온라인에서 즉시 발급받을 수 있다.


많은 나라를 다녀본 건 아니지만 입국 절차가 까다롭고 오래 걸리기로 사우디만한 나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곳 공항은 악명이 높았다. 본사에 그런 설명을 해도 설마하고 믿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부사장 한 분이 출장 오면서 네 시간 걸려 입국한 다음에 그 말이 쏙 들어갔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이민국을 통과하는데 한 시간을 넘지 않는다. 거기에 친절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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