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이야기 (3)
남의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법을 따라야 한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겪어보지 않은 문화를 가진 곳에 살겠다고 왔으니 어느 정도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일이 하나둘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산다. 그런데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건 거주허가를 받은 외국인이 사우디에서 출국할 때마다 별도의 출입국비자(ExitㆍRe-entry Visa)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우디 거주허가를 받을 수 있는 공식적인 길은 ‘취업비자’와 취업자 동반가족에게 발급되는 ‘가족비자’ 뿐이다. 현지기업이 되었든 한국기업의 지사가 되었든 사우디에서 일하려면 ‘취업비자’가 필요하다. 현지기업은 필요에 따라 노동부에 블록비자*를 신청하고, 외국계 기업은 설립할 때 최소한의 블록비자를 받고 이후에 필요에 따라 노동부에 블록비자를 신청한다. 고용인은 블록비자를 근거로 각국에 주재한 사우디대사관에서 취업비자를 발급받는다.
Block Visa;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취업비자(work visa)의 조건과 수량을 규정한 사우디 노동부의 외국인 고용허가서. 고용인의 국적ㆍ직종ㆍ직급과 인원을 규정하고 있다. 기업에서 외국인 근로자가 필요할 경우 노동부에 블록비자를 신청하고, 노동부에서는 사업내용에 따른 인원이나 직종ㆍ직급 등이 적정한지 평가해 승인한다. 정부 발주 사업을 수행할 경우 발주처에서 노동부에 블록비자 발급 협조요청서를 보내는데, 이러한 정부의 협조요청서가 없으면 기업에서 필요한 만큼 블록비자를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의 협조요청서도 발급기관이 어디인지, 발급기관의 장이 누구인지(얼마나 힘이 있는지)에 따라 승인 비율이 다르다. 정부기관의 협조요청서가 없을 경우 10%도 승인되지 않을 수 있고, 기관장이 힘 있는 왕자라면 100%가 승인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가 UN 자금으로 환경부에서 발주한 해안환경복원사업을 수행할 때 300명에 가까운 블록비자를 100% 받기도 했다.
취업비자를 받으면 유효기간(90일) 안에 사우디에 입국해 내무부에서 ‘이까마(Iqama)’라는 거주허가증(Resident Identity)을 받는다. 거주허가를 받으면 이를 근거로 가족을 초청할 수 있고, 가족이 입국하면 같은 절차를 거쳐 이까마를 발급받는다. 고용인이 이까마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노무자 같은 하위직급의 경우 가족초청이 허용되지 않기도 한다.
이까마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현지 병원에서 발급한 건강진단서가 필요한데, 간혹 이 과정에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긴다. GCC 국가가* 공용으로 적용하는 건강진단기준의 <이까마 발급금지질환>에 포함되어 있는 결핵과 B형 간염 때문이다. 현재 질환을 앓고 있는 상태라면 자국민 보호를 위해 금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미 치료가 되어 흔적만 남았거나 보균상태로 있어 감염위험이 없는 비활성(inactive)인 경우도 예외 없이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알고서 한국 병원에서 ‘비활성 의사소견서’를 받아와도 소용이 없다. 이 때문에 어렵게 취업되어 왔다가 돌아간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GCC(Gulf Cooperation Council, 걸프협력회의);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산유국 협의체. 사우디아라비아ㆍ아랍에미리트ㆍ쿠웨이트ㆍ바레인ㆍ카타르ㆍ오만 등 6개국. 예멘도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하지만 산유국이 아니어서 제외
거주와 관련된 모든 인허가는 스폰서(고용주) 명의로 이루어진다. 예외적으로 개인이 스폰서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는 법인이 스폰서가 된다. 당초에는 외국인 고용인을 통제할 목적으로 스폰서 제도를 만들어 스폰서에게 고용인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웠다. 그래서 거주허가ㆍ갱신, 출입국비자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은행 계좌 개설까지 스폰서의 승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고용인이 법이나 규정을 어겼다고 해서 스폰서가 제재를 받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규정은 사실상 스폰서가 고용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고 있다. 다만, 고용인의 가족은 고용인이 스폰서가 된다.
이까마에는 등록번호ㆍ국적ㆍ생년월일과 같은 신상정보와 함께 스폰서ㆍ직종ㆍ직급ㆍ종교를 기재한다. 종교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인지 아닌지 확인할 용도로 표시한다. 사우디에는 이슬람의 두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 메카는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출생지이고 메디나는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인데, 두 도시는 무슬림만 들어갈 수 있어 이때 이까마에 표시되어 있는 종교로 무슬림인지 확인한다. 사우디인은 모두 무슬림으로 태어나고 살기 때문에 사우디 ID로 확인한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출입하기 위해서는 주지사의 승인이 필요하다.) 다른 용도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까마를 가진 외국인이 사우디에서 출국하려면 출입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 또한 스폰서의 승인이 있어야 비자를 받을 수 있으니 여행의 자유조차 속박을 받는 셈이다. 자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을 통제하겠다는 것이야 그 나라 주권이니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종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어떻게 출국하는 것까지 통제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교민 한 분은 스폰서와 사이가 틀어져 7년이나 한국에 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인근 GCC 국가에서도 사우디처럼 외국인에게 이까마를 발급하지만 출입국비자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사우디 말고 이런 제도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는 고용인 가족의 출입국비자는 고용인이 발급하도록 제도가 완화되었다.
이곳에서는 신분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이까마에 연동되어 있다. 이까마 유효기간이 지나면 출입국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것은 물론 모든 금융거래가 중단된다. 계좌가 동결되고, 신용카드도 정지되며, 은행에서 수표를 찾을 수도 없다. (여기서는 아직도 당좌수표를 사용한다.) 손발이 다 묶인다는 말이다.
이까마는 매년 갱신하는데, 이까마를 갱신하기 위해서는 스폰서(법인)의 모든 허가증이 유효한 상태라야 하고 자국민 의무고용비율(다음번에 설명)을 충족시켜야 한다. 법인의 허가증은 대부분 매년 갱신해야 하고 자국민 의무고용비율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어 이 중 어느 하나만 놓쳐도 이까마를 갱신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이까마를 갱신하지 못한 채 불법체류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불법체류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언제든 법인이 조건을 다 갖추면 갱신비용과 벌금을 내고 이까마를 갱신할 수 있고, 간혹 일괄 완화하거나 사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고유가 시대가 끝나면서 몇 년 전부터 이런저런 조세가 많이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외국인에게만 부과되는 부양가족세(dependant fee)이다. 처음에 인당 월 3만원이던 것이 현재 12만원까지 올랐다. 이는 기업이 아닌 개인이 부담하는 것이어서 가족이 많거나 수입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부담이 되고 있다. 함께 근무하던 수단 직원 하나는 월급이 200만원 정도인데 부양가족이 다섯인가 그랬다. 월급의 25%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듣자하니 더 나은 직장을 찾지도 못했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그냥 불법체류자로 지내는 모양이다.
사우디 정부에서는 저유가로 곳간이 비어가니 만만한 외국인부터 잡는다. 몇 년 전에 전기요금을 한 번에 엄청나게 올려 난리가 났었다. 많게는 열 배 정도 뛰기도 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전기요금을 내리는 대신 자국민에게만 전기요금 오른 만큼 보조금을 지급했다. 외국인만 봉이 된 것이다.
결국 견디다 못해 상당히 많은 외국인들이 돌아갔다. 얼마 전에 귀국한 외국인이 150만 명이라는 보도가 있던데, 그래서인지 필리핀인들이 많이 모이던 시가지 남쪽이 휑해졌고 그곳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식당을 운영하던 교민 한 분도 문 닫고 귀국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