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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한국사는 없다

by 박인식

유성운

페이지2북스

2024년 8월 5일


모임에서 동북공정 이야기가 나왔다. 중국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한 분이 그것이 알려진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면서 우리가 그렇게 발끈할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과민하다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데, 비록 착취하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일본이 지배하는 동안 갖춰놓은 시설을 우리 발전의 동력으로 사용한 게 사실일 텐데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매국으로 몰아간다며 역사를 편협하게 해석하는 이들에 대해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언제부턴가 재야사학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의 주장은 대체로 우리 역사의 우수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에는 망설임 없이 식민사관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중 하나가 낙랑군의 위치였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한사군 ‘한반도설’을 지지하지만 재야사학자들은 ‘만주설’을 지지한다. 이 문제가 이처럼 논란이 되는 것은 역사를 민족 자존심과 연결해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지원을 중단하면서 미국 하버드 대학교 한국 고대사 사업이 중단된 것은 바로 “낙랑군의 ‘한반도설’을 인정하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의하는 것이며 식민사관의 잔재”라는 재야사학자의 주장에 정치인들이 호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심재훈 단국대 교수의 인터뷰를 인용해 “낙랑군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화가 수입되어 삼한과 일본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이 당시 역사의 전체적인 모양새인데 그렇게 우리 역사에 자신이 없는가? 무조건 땅이 크고 역사가 오래고 사상 처음이 우리여야만 만족하는 심리야말로 우리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데서 나오는 자격지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그런데도 같은 이유로 남녘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거친 <전라도 천년사>가 반일 감정을 앞세운 시민단체에 의해 난도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라도 천년사>에 문제를 제기한 이유 중 하나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지명을 사용하고 일부 일본학자의 견해를 소개했다는 것인데, 저자는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일본서기>에 적힌 무령왕에 대한 기록이 무령왕릉을 입증하면서 <일본서기>에 대한 국내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특히 <일본서기>가 적어도 백제와 관련해서는 신뢰할 내용이 적지 않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일본서기>를 만들어낸 신화 정도로 생각해 왔고, 그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서기>를 역사서로 대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을 노략질이나 해서 먹고 사는 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저변에 그들에게 당한 압제에 대한 반감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그런 반감과 피해의식이 우리 문화가 그들보다 우월하고 그들이 역사적으로 열등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그리고 그것이 심재훈 교수가 말하는 ‘우리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데서 나오는 자격지심’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처럼 편향된 신념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가 난도질 되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한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신문사에서 정치 사회 현안을 역사에 빗댄 칼럼을 써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저자는 우리 고대사를 기후학적, 환경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가 이런 작업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는 대학원에서 기후환경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저자는 고구려 장수왕이 왜 드넓은 만주벌판으로 더 뻗어나가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역사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장수왕이 광활한 만주벌판으로 방향을 잡았더라면 우리 민족의 영역이 더욱 확장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렇지 않고 좁디좁은 한반도로 방향을 틀어 우리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저자는 당시의 기후환경 여건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는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4세기부터 유라시아 북반구에는 긴 한랭기가 도래했다. 원래 식물이 풍부한 곳이라면 환경이 약간 나빠지더라도 그 영향이 적을 수 있지만 식물이 풍부하지 않은 곳의 환경이 악화하면 그곳에서 살던 동물들은 생존 위기에 빠진다. 따뜻한 곳이 추워지는 것보다 추운 곳이 더 추워지는 것이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다시 말해 한랭화로 인해 남부 농경 지역보다 북부 유목 지역이 더 큰 피해를 보았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생존을 향해 초원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것이 4~5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대혼란을 일으킨 ‘민족 대이동’이다. 이 ‘민족 대이동’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 로마제국이었다. 한랭화가 시작되자 말이나 소에게 먹일 풀이 부족해진 게르만 민족이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이동했고, 이 여파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이다.”


한랭화가 유럽만 휩쓴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랭화가 시작되면서 부여가 자리 잡은 만주 북부에서는 농업도 유목도 어려워진 것이다. 저자는 이때 국가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식량을 생산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것이 장수왕이 드넓은 만주를 놔두고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후에 이어진 온난화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었다.


“9~10세기부터 시작된 온난화는 유목 민족이 발호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초목이 자라니 말을 키우기 좋아졌고, 초원이 넓어져 활동 반경이 확장되었다. 몽골이 단기간에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환경 덕분이었다. 몽골 제국의 팍스 몽골리카는 온난화라는 토대 위에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14세기경, 세계사에서 대기근(The Great Famine)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유럽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이 기근으로 영국 인구가 42퍼센트나 줄었다. 대기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공교롭게 이때 흑사병이 일어났는데, 이 영향으로 지역에 따라 인구의 70~80퍼센트가 몰살한 곳도 있었다. 저자는 이토록 흑사병 희생자가 많이 나온 것이 대기근의 후유증이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굶주리면서 체력과 내성이 약해진 것이 희생을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후에 따라 제국이 무너지기도 하고 새로운 제국이 나타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름으로는 역사에 관심이 있다는 나는 기후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처럼 상세하게 다룬 책은 읽어보지 못했다. 앞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겠다.


저자는 짧게 다루었는데 내게는 질문을 푸는 실마리가 된 구절도 있다.


“고대 아테네의 영역을 보면 영토가 해안선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나라를 유지했을까 싶지만 그 비밀은 길에 있다. 고대에는 해로가 육로보다 빠르고 안전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륙 깊숙이 영토를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일전에 노르웨이 피오르를 찾았을 때 일이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무지 길이 없을 것 같은 곳에 마을이 몇 곳 눈에 띄었다. 그곳 사람들은 다른 마을과 어떻게 왕래했을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고대에는 해로가 육로보다 빠르고 안전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해로라고는 이용해 본 일이 없으니 궁금증을 풀 수 없었던 것이다. 문득 역사를 내 눈높이로 해석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저자의 글에 매료되어 읽어오면서 저자가 환갑 가까운 나이가 아닐까 짐작했다. 젊은 사람이 썼다고 여기기엔 글이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런던에서 연수 중인 저자를 만났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아직 한창 나이이니 앞으로 그의 글을 읽을 기회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독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좋은 글을 좀 더 자주 써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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